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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평점 :
6, 7월은 맡은 일 다 끝내기 달로, 8월은 방학한 아이들과 세 끼 밥챙겨먹기 달로 전력투구한 이후 9월은 흥청망청 노는 달로 보내는 중이다. 현재 방영중인 드라마 보기, 이미 종영된 드라마 몰아서 보기, 하루에 영화 세 편 보기, 가끔은 소설 읽기를 하느라 눈이 빠질 것 같다. (아, 물론 지난 추석 연휴는 배터지기 직전까지 먹는 주간으로 보냈다.) 시간가는 줄도 모르겠고, 배고픈 줄도 모르겠으나, 문득 아름다운 소설, 영화, 드라마의 주인공과 달리 나는 하루하루 늙어가고 있다는 깨달음이 더욱 또렷해지는 순간이 있다. 내가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될까하는 익숙한 자책감이 밀려오지만, 내년에 내가 후회할 일은 공부 안한 것일까, 더 놀지 못한 것일까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후자인 것 같다는 생각에 이번 달은 끝까지 놀아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이런 결심에도 불구하고 끝내 나를 잡고 놓아주지 않은 소설이 있으니, 그게 『비행운』이다. 소설집 속의 소설들이 다 인상적이었다. 그 중에서도 「물속 골리앗」, 「하루의 축」, 그리고 「서른」이 강렬하다.
「서른」의 한 대목. 화자인 강수인이 학원에서 가르치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하는 혼잣말, ‘너는 자라서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라는 문장을 보고 난 이후 이 문장이 잊혀지지 않는다. 이보다 더 슬프고 참담한 독백이 있을 수 있을까?
강수인은 마치 이런 예감을 실현시키기라도 하듯 옛 남자친구에게 속아 끌려 들어간 다단계 판매 조직에 옛 학원 제자 혜미를 속여 밀어 넣는다. 그 덕분에 수인은 조직에서 벗어 날 수 있었고, 항상 씩씩하고 당찼던 혜미가 잘 이겨내라라 믿어 본다. 그러나 수인은 혜미가 절망한 나머지 자살을 시도했다가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차마 병원을 찾아가지 못하던 수인은 10년 전 고시원에서 함께 공부하며 의지했던 언니로부터 엽서와 선물 꾸러미를 받는다. 언니는 임용고시에 합격했지만, 아직 발령받지 못했다는 소식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전하며, 수인에게 고마웠다고 한다. 선물 꾸러미 속에는 10년 전 수인이 꼬박꼬박 이름을 적어가며 포인트를 쌓았던 빵집 적립카드, 수인이 그 포인트로 빵을 먹으라며 언니에게 선물했던 카드가 들어 있었다.
수인은 언니에게 답장을 쓴다. 스무살 언니와 헤어진 이후의 삶에 대해, 그리고 언니가 준 것과 자신이 받은 것은 다를 수도 있다면서 길고긴 편지를 마무리한다.
수인이 언니에게서 받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수인은 언니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에서 또다른 절망을 보았을까? 자신을 고맙게 기억해주는 사람이 한 명은 있다는 위안을 얻었을까? 지금의 자신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희망을 품고 열심히 살았던 어리석음을 만났을까? 아니면 고마운 사람에 고맙다고 말할 수 있었던 순수함을 보았을까?
수인은 아마도 언니에게 답장을 보내고, 혜미를 찾아 갔을 것이다. 찾아 가서 그 다음에 수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그 편지를 쓰던 수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것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처럼 살려고 발버둥 칠수록 밑으로 밑으로 떨어져 내리기만 하는 수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혜미에게 사과하고 혜미와 그리고 자신의 아픔을 슬퍼하는 것. 그것 밖에 남은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참 운 좋게도 스무 살과 서른 살을 통과해 왔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범위와 대상을 한정할 수 없는 막연한 책임감도 함께 느꼈다. 내가 몰랐다 하더라도, 내가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의 운 좋음은 누군가의 파국을 디딘 것은 아니었을까?
작가 김애란은 출구가 없는 이들의 절망을 깊이 이해하고 슬퍼한다. 동정이 아닌 공감의 능력이 정말 대단하다. 내가 세상의 절망에 대처하는 방법은 고작 자동이체로 후원금 내기, 그리고 홀랑 잊고 살기! 그러나 나보다 열 살 어린 작가 김애란은 세상의 절망을 껴안고 함께 앓고 있는 중!!
이제 김애란 작가의 신간이 나온다면 주저하지 않고 사보기로 한다. 세상의 절망을 공감하는 힘을 조금이나마 빌리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