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황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9
이노우에 야스시 지음, 임용택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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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풍경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이 소설은 재미있는가? ‘재미를 국립국어원의 표준대사전에서 찾아보니, 첫 번째 뜻이 아기자기하게 즐거운 기분이나 느낌이라고 나와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을 재미있다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 소설은 아기자기한 것과도 거리가 멀고, 즐거움과도 거리가 있다.

 

소설은 조행덕의 역마살을 쫓는다. 조행덕의 역마살은 조행덕을 시장판에서 만난 서하 여자가 건네준 서하문자를 시작으로 서하군의 선봉장 주왕례와 위구르 왕족의 여자와 멸망한 위지 왕조의 후예 위지광을 거쳐 둔황의 불경에 가 닿게 만든다.

 

조행덕은 무슨 대단한 의지를 갖고 행동하지 않는다. 허무하게 실패한 과거 시험의 끝에서 그저 발길이 닿는 곳으로 운명이 그를 이끄는 데로 따라간다. 그가 있던 사주(둔황)성이 점령당할 것이 뻔한 급박한 상황에서도 조행덕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흐르는 대로 흘러왔기에 전혀 후회는 없다고 회고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의지에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 개입된 적도 없었고, 원하지 않는 일을 강요당한 적도 없었다. 물이 놓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극히 자연스럽게 오늘에 이르렀다. (생략) 만약 새로 인생을 시작한다 해도, 지금과 동일한 조건이 주어지는 한, 자신은 역시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삶은 스스로의 의지와 능력으로 길을, 그것도 가능하면 넓은 길을 뚫는 과정이라고 여긴다.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 온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성공한 삶, 후회 없는 삶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조행덕이 말하는 의지라 함은 오히려 운명에 가까워보인다. 주어진 조건에 따라 자신의 마음이 가는 곳으로 거스르지 않고 흘러왔기에 후회가 없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위태로운 경계에서 행덕은 재물과 목숨 그리고 권력의 허망함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그러나 그 지독한 허무의 순간에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의미 있는 대상, 경전을 전쟁의 불길로부터 구할 수 있다면 구하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조행덕은 처음으로 덧없음을 거스르고 뛰어넘고자 하는 의지를 발휘하는 것이다.

 

한 인간이 평생 처음으로 품었던 영원에 대한 꿈 덕에 둔황의 불경이 불에 타지 않고, 100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도 지구상에 남아 갖가지 이야기를 여전히 만들어 내고 있게 된다는 것이다.

 

시종일관 덤덤한 문체, 아무 것에도 욕심 없는 행덕의 태도, 그리고 행덕이 걸었던 척박한 길이 어우러져 소설을 읽고 난 뒤에도 둔황은 오래 오래 마음에 머무른다.

 

2013-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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