룬의 아이들 - 윈터러 세트 - 전7권 룬의 아이들 (엘릭시르)
전민희 지음 / 엘릭시르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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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이 출간되었던 2002년에 내가 이 책을 알지 못했던 이유는 그 해에 내가 둘째 아이를 낳았기 때문이다. 둘째가 생기는 순간 진정한 육아의 지옥문이 열리니 그 속에서 분투 중이었던 나는 이 사랑스러운 책을 알지 못한 채 20년을 흘려보냈다. 한편으로는 이 책이 절판된 후 2019년에야 새로 출간되었기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

굳이 비교한다면 드래곤라자도 재미있었지만, 방금 다 읽은 이 책이 내 마음을 조금 더 움직였다. 광고문구에서 얼핏 본 듯도 한 작가의 유려한 문장들이, 그리고 신성 찬트의 노랫말들이 시처럼 아름다웠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얼음의 대장장이가 보리스에게 검을 허락한 장면에서의 대화를 읽고 생각의 정리가 좀 필요했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보리스 진네만은 위대한 힘 윈터러를 지니고도 어떻게 파멸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현재나 미래가 아닌 과거를 붙들고 놓지 못하는 소년 진네만. 형이 죽음으로 지켜준 보리스의 생명과 가문의 검 윈터러. 자신의 삶이 누군가의 목숨에 빚지고 있다면 그 무게는 정말 엄청날 것 같다. 특히나 나를 위해 죽은 이는 내가 가장 믿고 의지하고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 과거를 잊을 수 있을까? 형의 유언은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복수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가문의 저주를 끊고, 더 이상 죽음을 죽음으로 되갚지 말라는 형의 말에도 불구하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어린 진네만이 잊기에는 너무 강력하다. 하지만 어렸고 무능했던 12살 보리스는 그저 죽지 않고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밖엔 가질 수 없는 하루하루였다. 그래서 보리스는 악착같이 살아남는다. 비열하고 삭막한 삶 속에서도 보리스는 사랑하고 의지할 수 있었던 인물 스승이자, 육친이자, 친구와도 같은 나우플리온을 만난다. 보리스는 아무 미련도 없이 나우플리온을 따라 그의 고향섬으로 함께 가서 그의 첫 번째 제자가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름답고 강한 소녀 이솔렛을 만난다.

보리스는 삶에서 바라는 것이 많지 않다. 나우플리온가 평생 함께 사는 것, 그리고 이솔렛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 형이 지키라고 한 윈터러는 지키는 것, 이 세 가지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보리스는 소원이 없는 인간이 될 수는 없었지만, 바라는 것이 많지 않은 그 편협함 때문에 윈터러의 주인이 될 자격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 한 가지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칼을 들어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보리스의 살인은 살아남기 위해서였을 뿐. 자신의 목적이나 꿈을 위해 한 것은 아니었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고 더 강해진 보리스는 때로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에도 다른 사람에게 잔인한 선택을 하지 않은 사람으로 성장했다. 보리스는 단지 그것뿐이었고, 영웅이 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의 부조리와 악으로부터 사람들을 지켜야겠다는 거창한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윈터러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만약 나에게 이 세상을 지배할 수도 있는 거대한 힘이 있다면 무엇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보리스였다면 달의 섬으로 달려가 음험한 왕의 섭정을 제거하고, 편협하고 차가운 섬에 새롭고 따뜻하며 영광스러운 질서를 만들고 싶었을 것 같다. 자기가 알고 있는 선한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지배자, 선한 지배자가 되리라 결심했을 것 같다. 그래서 결국 나우플리온과 함께 그리고 이솔렛의 곁에서 살겠다고 결심했을 것이다. 이 정도는 자신의 욕심이 아니라 선의 구현이라고 생각하면서.

보리스는 자신을 위해 미래를 함부로 바꾸려 들지 않았다. 그저 형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가문의 비극을 초래했던 이()세계의 괴물을 죽이고, 나우플리온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심장을 얻어 이솔렛의 편에 전해 줄뿐. 그래서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이솔렛을 떠나보내며 곁에 있고 싶다고, 이솔렛을 위해 살아가겠다고 말로 하지 못한 손짓을 할 뿐이었다. 보리스와 이솔렛의 이별은 참 아름답고 아팠다.

그래서 보리스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나우플리온가 이솔렛을 다시는 만나지 못하더라도 보리스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보리스라면 행복해지기를 바라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담담히 두 사람을 그리워하며 어쩌면 두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내일을 위해 하루를 우직하게 살아갈 것만 같다.

내가 책을 읽는 시간 만큼 미뤄지는 나의 의무들이 책상 위에 차곡차곡 쌓여가지만 어쩔 수가 없다. 마법검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살아가는 일이 때때로 지루하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심연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일상의 하루하루는 때로는 겁나게 아름답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미리 앞당겨 죽고 싶을 만큼 두렵기도 하다.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용과 마법과 애틋한 사랑이 있는 세상 속으로 잠시 숨어 있을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2021.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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