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센 뤼팽의 마지막 사랑
모리스 르블랑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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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센 뤼팽, 혹 루팡이라고도 부른다. 발음의 차이일 뿐 뭐든 어떠랴?! 그를 만난다는 것이 기가 막힐 따름이다.

70년을 잠들어 있다가 이제야 나타나 뤼팽 팬들을 깜짝 놀래킨 이놈 <아르센 뤼팽의 마지막 사랑>. 바람둥이 뺨치는 그에게 마지막 사랑이라니. 제목만 들었을 때는 그의 농락(?)이 있을 것만 같았다. 이거 사랑이라고 머릿속에 박아놓고 나중에 또 여자 울려 놓고 사라지는 게 아닐까? 하고.

 

파리에서 한 인기하시는 코라. 집안 형편이 썩 좋지 않은 상황에서 언제나 자유롭게 사시는 아버지는 갑자기 자살을 한다. 딸에게 메시지 하나 딸랑 남겨놓고. 그 어떤 것에 얽매이지 말고 사랑하라는 것, 그리고 뤼팽에 관한 비밀스런 내용이었다. 딸은 아버지의 메시지를 이해했을까? 그 사건과 동시에 7억 원 상당의 금화 두 자루가 사라진다. 역시나 뤼팽의 소행이겠지 하는데 뭔가 심상치 않다. 뤼팽이 나타나긴 한 것인가? 뜨거운 사랑을 꿈꾸는 코라, 그리고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모를 뤼팽. 그 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예전처럼 감옥을 밥먹듯 탈옥하고 귀중품을 훔치며 농락하는 그런 사건은 벌이지 않는다. 르블랑의 유작 아니던가? 자신이 그린 뤼팽의 마지막을 해피엔드로 끝마쳐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자신 때문에 힘겹게 도망다니며 얼마나 변장해야 했던가. 그래서 마지막 작품에선 포용력 있고 용감한 미인을 선물해줬다. 비록 마지막은 해피엔드였지만 그의 정체는 아직도 아무도 모른다.

 

기억에 남는 홈스와의 대결은 전 세계 뤼팽팬들에겐 더없이 좋은 추억이었는지 모른다. 이젠, 정말 새로운 뤼팽을 만날 순 없지만 기억할 순 있을 것이다. 나중에 손자가 태어나도 기꺼이 주고 싶은 책이 있다면 바로 뤼팽 시리즈가 아닐까?

보고싶다! 아르센 뤼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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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와 빨강
편혜영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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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책의 느낌이란 게 있다. 표지와 제목을 보고 풍기는 분위기라고 할까? 대부분은 읽기 전과 후가 같지 않다. 제목과 표지에서 풍기는 이미지와 내용과는 대부분 차이가 있었다. 단순히 흑과 백이 아니다. 그냥 읽어본 사람만이 느끼는 그런 '느낌'이랄까. <재와 빨강>은 제목과 표지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정말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읽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2011년에 처음 만났지만 왜 지금에서야 읽었는지 모르겠다. 밤늦게 책장을 우두커니 보다 보니 눈에 들어왔다. 단지 그뿐이고 표지를 보자마자 읽고 싶었다. 이유는 여전히 알 순 없다.

 

우울한 이미지가 초반부를 지배하다 미스터리가 등장했고 마지막엔 알듯 모를듯한 연기가 뿌옇게 뒤덮었다. 마치 <무진기행>에서 나오는 안개처럼. 주인공을 비롯해 소설 배경조차 우울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정말이지 끝까지 알 수 없었다. 좀처럼 파악할 수 없는 인물이다. 일관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 혼자만의 사색을 즐기고 환상을 구연했으며 가끔은 다혈질적 폭력성을 보였다. 스스로를 가둔 고독함에 좀처럼 나오지 않은 인물.

제약회사에서 약품개발원인 그. 그러나 그의 인생엔 '쥐'가 주인공이었다. 한 번의 이혼과 아이는 없는 고독한 그에게 c국으로 파견을 제안받는다. 입사순에서도 밀리고 승진과는 도무지 거리가 먼 그가 어떻게 파견으로 뽑혔는지 주위 사람들은 술렁이고 곧바로 직장내에서 왕따가 되버린다. 그 자신도 알지는 못했으나 이혼을 뒤로하고 새로운 인생을 펼칠 절호의 기회라 여겨 떠나게 된다. 전염병이 유행처럼 전지는 c국에 입국하자 그의 인생은 180도 뒤바뀐다. 전염병 의심환자로 분류됐고 파견으로 들어갈 회사에서는 연락이 없고 그가 배정받은 숙소는 전염병으로 격리조치 됐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전처가 살해 당한 사건의 용의자로 그가 지목된다.

 

이 모든 상황에서 벗어나 쓰레기장 옆에서 노숙자로 전락한 그. 어쩌다 자신이 이렇게 됐는지 곰곰 생각해보지만 당장 배가 고파올 뿐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을 어떻게든 되돌리려 노력은 하지만 '어떤 벽'에 막혀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전처의 죽음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공기처럼 밀려와 우울해져만 간다. 진짜 자신이 죽인건지 아닌지조차 기억에 없었다. 망상인지, 실제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 와중에 심심해서 잡은 쥐가 하나둘 늘어나고 우연히 쥐의 시체들을 보고 방역원으로 뽑혔다. 노숙자보다는 쥐를 잡는 방역원이 훨씬 처지는 나았으리라.

카프카 소설 <소송>의 주인공 K처럼 그였시 이유도 영문도 알지 못한 채 밀려 나갔다. 자신이 '왜' 그렇게 됐는지는 알지 못한 채 말이다. 읽는 내내 나는 '그' 대신에 묻고 읽어 나가야만 했다. 그가 적극적으로 한 행동이라고는 파견된 회사 담당자를 찾는 것 뿐이다. 그 회사 1층 보안요원은 담당자를 만나고 싶으면 서류 한 장을 작성하고 기다리라고만 대답한다. 아무리 담당자를 만나야 한다고 이유를 얘기해도 보안요원은 자신이 맡은 일은 서류를 전달하는 것, 이라고만 되풀이할 뿐이다.

한국에서 그는 전처를 살해한 용의자이며 현재 파견된 직원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속해있는 본국 회사에 연락을 하든가 한국대사관을 찾아 도움을 청하면 될 일이다. 간단하지만 그에겐 그만한 속사정이 있는지도 모른다.

 

전처와의 관계

모든 소설이 그렇지만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부분을 친절하고 풀어주지는 않는다. 가끔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게 은근슬쩍 단서만 던저주고 또 가끔은 아예 아무것도 주지 않아 읽는 이로하여금 상상하게 만들어준다. 어떤 것이든 뭐 읽는 독자들은 상관없을 것이다. 상상은 누구나 가능한 것이니까. 그와 전처와의 관계는 정말 미스터리하다. 가끔 외박을 하고 집안일을 소홀히 하는 전처. 그것만 보면 이혼이 당연했다, 라로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가 설명하는 그녀는 무뚝뚝하고 살아 있는지 조차 의심될 정도다. 그와 그녀가 소원한 상태에서 그도 바람을 피웠다. 그게 사랑인지 아닌지 몰랐던 그는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이런 이상한 부부의 생활은 그가 일방적으로 한 강간 때문에 이혼 도장을 찍었다. 그뒤 그녀는 바로 결혼을 했고 또다시 이혼을 했다.

이혼을 한 뒤에도 그는 끝임없이 그녀를 생각했다. 그리움도 추억도 아닌 기억. 그는 정말 전처를 살해했을까?

 

이 소설의 주인공은 '쥐'다. 쥐는 한 번의 교미만 하면 그뒤 교미를 하지 않아서 암컷은 새끼를 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수컷은 시간이 나기만 하면 교미를 한다. 쥐의 번식력은 아마 세계 최강일 것이다. 생명력도 최고일 것이다. 쥐와 인간과의 관계는 공생관계는 아니다. 그런데도 실험실에는 쥐가 중요한 도구로 쓰인다. 쥐를 잡는 약품들은 계속해서 강해지고 다양해진다. 그래도 쥐는 여전히 어둠속에서 잘 산다. 인간을 죽이는 전염병 역시 점점 강해진다. 그래도 인간들은 약을 개발해 강해진다. 땅 위에서는 인간을 해할 것은 없고 어둠속에서 쥐를 해할 것은 없다. 땅의 위아래를 지배하는 인간과 쥐. 인간은 쥐를 죽이려 노력하고 쥐는 인간들이 버린 음식물을 먹으며 큰다.

그 둘의 관계는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공생관계는 아니지만 서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주 잘 살고 있다. 인간이 주는 음식물을 먹으며 말이다. 어떻게 보면 알게 모르게 인간들이 쥐를 키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정하지는 않겠지. 왜냐하면 끔찍하니까. 가끔 쥐가 나타나면 어떻게든 제거하려 난리를 친다. 그러나 그때뿐. 인간과 쥐는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공존할지 모른다. 두 생명체는 아주 질기니까.

인간이든 쥐든 아주 징그러운 족속들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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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 24명의 아티스트.24개의 공간.24가지 취향
이상현.이안나 지음 / 우듬지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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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나만에 공간이 있었다. 귀신이 나올 것처럼 으스스한 지하실. 그곳엔 온갖 잡동사니와 낡아버린 가구들, 부시멘 얼굴처럼 동그란 연탄들이 널부려져 있었다. 지금은 좀 챙피한 기억이지만 아직도 생각난다. 추운 겨울밤, 엄마는 자기 전 항상 내 손을 붙잡고 지하실로 끌고 내려갔다. 내가 뭘 잘못해서가 아니라 밤새 뜨끈한 방바닥을 위해 연탄을 새것으로 갈려고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들 하나인 나를 데리고 가는 엄마가 내심 못마땅했지만 그래도 남자인지라 뒷꽁무니를 덜덜 떨며 따라갔다. 할머니처럼 푸석한 연탄을 연탄 집게를 가차없이 잡아 뽑은 뒤 내 앞으로 놓았다. 아직도 불이 화끈화끈한 연탄을 보고 있자니 엄마가 하는 말

"야~! 이따 화장실 가지 말고 여기다 싸~그래야 불도 꺼지고 좋지. 깜깜하니까 그냥 싸!"

" 뭐야?! 내가 무슨 물총이야? 싸라고 하면 싸게? 나참..." 이라고 했겠나? 고작 다여섯 살 먹은 꼬마가..ㅎㅎㅎ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뭔놈의 재미가 들렸는지 냅다 호줌을 날리며 혼자 낄낄거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불이 꺼지는 사운드(치이~~)와 스모크&스멜(우엑!)이 재밌었나보다. 아무튼 그런 기억이 갑자기....+_+; 근데 왜 옛 기억을 얘기했더라? 아아...^^;;

밤에는 귀신이 나올만큼 무서운 공간이었지만 낮에는 나의 유일한 놀이터였다. 그곳에는 내가 길에서 주워온 비커, 의자, 주사기, 화분, 훼미리쥬스병(훼미리 쥬스 아줌마는 아시나?) 등등 내 물건들로 채워졌다. 그 공간에서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던 것 같다. 뒷산에서 잡아온 잠자리를 물이 가득한 비커에 넣고 익사시킨 뒤 바깥에 놓으면 다시 살아나는 뭐 그런거?(좀 잔인한가?@_@)

 

갑자기 뜬금없지만 그 집은 부셔졌고 새집을 지어 3층에 살고 있다. 포크래인이 그 집을 부셨을 때 지하실을 보며 울던 게 생각난다....흐흑...그때는 참 순수했지....

로망이지만 아직도 나만의 작업실을 탐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작업실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컴퓨터에 끄적거리는 잡다한 글과 내 방과 거실에 가득 찬 책들을 쌓아놓는 것밖에는 없는 것 같다. 그게 무슨 작업실이냐? 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아직까지는 그렇다는 얘기다. 나만의 작업실이 생기면 뭔가 할 것들을 벌려보겠지 뭐. 그런 막연한 상상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24명의 아티스트들의 작업실을 훔쳐보는 짜릿함, 남의 고유의 작업공간을 탐닉하는 불순함, 누구나 한번쯤은 꿈꿔왔던 작업실에 대한 욕망을 해소할 수 있는 뒷간!바로 <작업실>이다. 서론이 진짜 길었지만 이 책을 읽고 생각난 게 내 어릴 적 작업실인 지하실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만들거라 자신하는 나만의 작업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혼자 쓸 수 있는 작업실 정도는 충분히 만들 수 있다. 우리집 1층 상가에(지금 코카콜라 창고) '나폴레옹'이란 간판을 내걸고 작업실로 삼으면 된다. 그런데 그곳에서 할 게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이다.

작업실을 만들었으면 뭔가 작업을 해야 하는데 작업할 게 없다. 딱히....디자인도, 그림도, 가구 만들기도, 사진 찍는 기술도 전무하다....휴....

 

예술가, 패션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 건축가, 디자이너, 사진작가, 가구디자인의 <작업실>을 한 권의 책에서 공짜로 보여준다. 신문이나 인터넷 기사에서 본 유명한 분들도 있고 처음 들어본 예술가도 있고 알 듯 말 듯한 디자이너도 있었다. 24명의 예술가들은 소위 사회적 지위가 있는 분들이었다. 나랑은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다. 그만큼 노력도 죽어라 했다는 얘기겠지. 그들에게 작업실이란 과연 어떤 공간일까? 예술가들의 작업실은 투박하면서도 예술적이고 쓰레기를 갖다놔도 예술이다. 커피와 담배 냄새가 은은하게 섞여 몽롱한 기분에 취하게 만드는 매력. 비싼 인테리어나 소품들이 보여주는 것보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상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예술적인 감각들이 그렇게 보이게 만드는 건 아닐까? 그냥 멋있어 보인다. 왜냐 그들에겐 우리와 다른 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작업실이 궁금한 것이고.

 

<작업실>에 나오는 모든 작업장에 놀러가 보고 싶었다. 문전박대 당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놀러가 보고 싶다. 그래서 몇 군데 표시를 해두고 주소까지 알아보고 무작정 가보려 했는데 막상 그들과 뭔가 공통점이 없었다. 그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없다는 것이 치명적이었다.

커피를 대접받는다 쳐도 뭔가 얘기를 해야 할 것 아닌가? 상상에 대화를 펼쳐나가도 단 10분이면 게임 오바였다. 이것 참....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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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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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표현해야 <좀비>란 책을 정말 읽었구나, 라고 할 수 있을까?

사이코패스를 다룬 여타의 책들이 범죄자의 행동을 지켜보며 그의 잔인한 행위에만 초점을 맞췄다면 <좀비>는 주인공(사이코패스)의 내면을 파고든다. <좀비>는 사이코패스, 자신이 쓴 글인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얘기하고 있어 마치 소설을 읽는 동안 남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기분이 들었다. 보통 사람으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망상에 사로 잡혀 있는데도 자연스레 행동으로 옮긴다.

말 그대로 사이코패스가 보고, 느끼고, 행동하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 <좀비>를 읽을 때는 그가 조정하는대로 따라야 하는 노예가 되고 만다. 나에게 어떠한 결정권도 가질 수 없고 그의 삶에 개입할 수도 없다.

그렇다. 독자는 모두 그의 노예이자 좀비가 되어야 한다.

 

 

우연히 본 책에서 전두엽 절제술이란 정신과 시술을 읽는다. 이 수술을 받는 사람은 누군가의 로봇처럼 순종적으로 온순해진다. 같은 인간이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수술도 다 있나? 싶었는데 예전에 진짜 이런 수술을 했다고 한다.(영화 <셔터 아일랜드>에서도 나옴) 주인공은 그 수술을 통해 자신만의 노예를 만들고 싶어한다. 동성애자인 주인공은 자신의 취향에 맞는 남자만 골라 마취시킨 뒤 집에서 이 수술을 직접 실행한다. 의학적 기술이 없는 주인공의 실험이 잘될 리가 있나...곧 내리 실패를 하고 만다. 그때마다 그는 더욱 안달이 나서 또 다른 주인공들을 찾아 나선다. 물론 실패한 친구들은 거리낌 없이 처리한다.(끔찍!!) 그가 꿈꾸는 좀비는 만들어질 줄 모르고 하루가 멀다 하고 실패하고 그로인해 피해자의 수는 늘어만 간다.

 

실화를 바탕으로 소설화 한 것이지만 사이코패스의 내면을 독자로 하여금 엿보게 함으로써 그동안 얘기만 들었던 사이코패스의 감정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읽는 동안 암모니아수 냄새를 맡은 것처럼 묘하게 무언가 콕콕 찔렀다. 사이코패스 가면을 잠시 빌려 쓴 듯한 기분일까. 그래서 읽는 내내 색다른 기분에 사로잡혔다. 처음엔 그저 뭐 이런 또라이가 다 있어?’ 라고 생각하며 코웃음을 쳤는데 점점 그 또라이는 살아 있는 내 감정들을 갈아먹기 시작했다. 단순히 무섭다라고 표현할 순 없다. 같은 인간으로 공감할 수 없는 행동들과 그가 흥분하는 모습이 소름끼치게 다가왔을 뿐이다. 그는 단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주로 생각하고 행동했을 뿐인데 말이다.

 

<좀비>를 만들고자 하는 주인공의 시도는 책 속에서는 실패했을지 모르지만 결국 성공했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독자들은 그의 노예처럼 끌려다녀야 했으니까 말이다. 평생 기억에 남을 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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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초점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양억관 옮김 / 이상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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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들어 사회파 추리소설 읽는 재미에 푹 빠졌다. 그동안 나에겐 추리소설이란 쏠쏠한 읽는 '재미'였지만 사회적 배경이란 소스를 덮어버리자 더 맛있고 중독성 있는 덮밥이 완성됐다. 마쓰모토 세이초가 얘기하는 '해결하기 어려운 사건이 생기고, 이후 탐정이나 형가다 등장해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형식'이 아니라 '사건 해결이나 트릭을 푸는 것만큼 사회적 배경과 동기를 중시해야 한다. 일상에서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을 소재로 작품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답은 이미 존재하고 그 과정을 작가의 똘마니(형사 등)가 개입하여 문제를 이러쿵 저러쿵 떠들다 결국 범인은 00다!, 라고 푸는 게 얼마나 어리석냐는 것이다. 이는 나도 동감하는 바이며 그런 추리나 사건들은 별로 현실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천재적인 탐정들이 알아서 푸는 공식에 휘둘리다보면 내가 뭘 읽었는지 깝깝할 때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물론 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런, 일정한 틀에 짜맞춰진 추리소설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나 역시 낯선 별장에 친구들끼리 놀라왔다가 누군가 사람이 죽고 경찰이 개입하는 뻔하디 뻔한 크레파스 추리보다는 사회적인 이슈나 배경, 근거라 할 수 있는 팩트를 중심으로 짜여진 소설이 더 가슴이 와 닿는다. 그래서 마쓰모토 세이초가 마음에 든다.^^

 

그래서 더욱 <제로의 초점>이란 책은 어떤 배경에 어떤 사건이 나올지 무척 궁금했다. 그런데, 사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일까? 책이란 적어도 독자들의 긴장감이나 애간장을 쥐락펴락하며 농락해야 하거늘 이 책엔 그다지 긴장감의 기복이 일렁이지 못했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쭉 비슷비슷한 기분으로 읽었다 해도 과연이 아니었다. 내용은 괜찮았지만 처음부터 쭉 기분은 '-------'이랬다고나 할까? 원래는 '___---_-__--_-^^^^_' 이런 기복이 참 좋은데....쩝(이해하시려나..ㅎㅎ)

 

처음 시작은 이랬다. 낯선 남녀가 중매를 통해 결혼을 한다.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결혼. 개인적으로 이해는 잘 안되지만 어쨋든 일본에선 1950년대엔 그랬나 보지 뭐.+_+ 그렇게 신혼 여행을 다녀와서 집으로 돌아온다. 남편의 직장은 지방이었는데 결혼과 동시에 도쿄로 발령을 받아 마지막 정리를 하러 지방으로 출장을 떠난다. 그런데 온다던 남편의 소식은 없고 온데간데 사라져버린다. 걱정된 마음으로 부인은 남편의 행방을 찾으러 지방에 있는 직장으로 떠난다. 회사 동료들과 주위 사람들에게 남편 소식을 물어보다 문득 남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때부터 남편 과거의 정보를 조금씩 얻으며 행적을 쫓는다. 며칠 후 아주버님이 동생(남편)을 찾으러 지방에 내려갔다가 타살을 당하는데.....

 

결혼을 하자마자 사라지는 남편. 그에게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때문에 주위의 사람들은 하나 둘씩 죽는다. 공통점이 있다면 남편을 찾는다는 것. 왜 그 남편을 찾는 사람들은 죽어야만 하는지 마지막에 비로소 이유가 하나씩 밝혀진다.

진행되는 스토리는 괜찮았다. 그런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결혼식을 막 마친 행불자 부인(26살)이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파헤친다.+_+; 솔직히 좀 이해는 되지 않지만 결혼한 남편이 사라진 마당에 따지고 자시고 할 게 없겠지...찾아야 하는 이유가 있으니까. 중간부터는 남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가 궁금한 게 아니라 '왜' 사라져야만 했는지 이유를 찾는다. 그런 이유에서 보면 누구보다 부인이 사건을 풀어가는 게 좀 더 자연스러운 것인지 모른다. 참고로 이 소설은 1959년에 일본에서 출간됐다.^^;

<제로의 초점>을 다 읽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는 것. 인간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무서운 존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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