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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 운동의 절박한 문제들 - 러시아어판 완역 레닌 에센스 1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레닌 지음, 최호정 옮김 / 박종철출판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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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에 다시 읽는
<무엇을 할 것인가? : 우리 운동의 절박한 문제들>

<무엇을 할 것인가?>를 처음 읽었던 게 9년 전 겨울이었던 것 같다. 호기롭게 책은 폈는데 읽기도 어려운 러시아 인명, 간행물에 난생 처음 접한 레닌 특유의 문체까지 겹쳐 결국 아무것도 이해 못했던 기억이 난다. “혁명가조직”, “전러시아적 신문” 더듬더듬 키워드만 머리에 남긴 채로 끝난 레닌과 첫 만남은 1년 뒤에도 비슷한 성과를 남기며 끝났다. “아, 혁명가조직이랑 전국적 신문 건설이 중요했구나.”
<무엇을 할 것인가?>는 1902년에 출간되었지만 실제 작업은 1901년 봄부터 겨울까지 진행되었다고 한다. 레닌이 1870년생이니깐 이 책을 쓸 때 나이가 지금 나와 동갑이다. 8년 전에는 이해 못했지만 동갑이 된 지금은 사정이 조금은 더 낫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에 다시 책을 펴본다.
1898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당이 창건되었지만 아직 정식으로 조직된 하나의 당이라기 보단 개별 그룹들의 총합에 가까웠다. 이에 레닌은 당 건설 계획을 구체화할 목적으로 집필을 시작한다. 따라서 책의 주요주제는 레닌에 따르면 아래 세 가지여야 했다.
(1)당의 정치선동 성격과 내용 : 전제주의 압제 폭로
(2)당의 조직적 임무 : 직업적 혁명가조직 건설
(3)전러시아적 전투조직 건설계획 : 전러시아적 정치신문 계획
하지만 당 내에 ‘경제주의’라는 경향이 나타나며 당초 집필 계획이 일부 변경된다. 당의 정치임무, 당의 조직임무, 당의 조직계획에서 드러나는 견해 차이는 당 내 근본적 대립이며 여기에 대한 대중적이며 체계적인 설명이 필요해졌다.

■당의 정치임무 거부하는 경제주의
레닌은 현대 사회민주주의 당 내 두 가지 경향이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는 독일의 베른슈타인, 프랑스의 밀레랑 등으로 대표되는 사회개량주의이고, 또 다른 하나는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이다. 베른슈타인주의는 사회모순을 무마하고, 사회혁명을 부정하고, 계급투쟁을 점진적 개혁을 위한 현실적 투쟁 및 협소한 노동조합주의로 끌고 가 사회주의 의식을 타락시킨다.
경제주의는 러시아의 베른슈타인주의다.
이들은 ‘교조주의’ ‘당의 경직화’를 말하며 ‘비판의 자유’를 사회민주주의 당의 통합조건으로 제시한다. 레닌은 여기에 맞서 ‘비판의 자유’란 당을 기회주의 경향으로, 부르주아 개혁 정당으로 바꿀 자유, 혁명적 이론으로부터 벗어날 자유를 뜻할 뿐이라고 반박한다.
이들은 레닌의 노선 이렇게 비판한다. 교조적인 관점 때문에 “발전의 객관적, 혹은 자생적 요소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그러면서 운동의 임무는 최근 몇 년간 발생한 노동운동으로 규정해야한다고 말한다. 즉 당의 임무는 있는 그대로의 노동운동에 봉사하는 것이지 독자적인 사회민주주의 정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이는 레닌이 제기한 당의 임무와는 사뭇 달랐다.
“역사는 우리에게 당면 임무를 제기했다.... 이 임무를 실행한다면, 즉 유럽 반동의 가장 강고한 보루일 뿐만 아니라 아시아 반동의 가장 강고한 보루이기도 한 것을 파괴한다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세계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가 될 것이다”(35p)
레닌은 당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경제주의 입장을 자생성에 굴종한 것이라 비판한다. 먼저, 자생성이라는 것도 갖가지다. 경제주의자들이 자생적 요소라 말하는 최근의 파업투쟁도 19세기 폭동들에 비하면 대단히 의식적인 운동이다. 요구사항을 제기하고, 적합한 순간을 계산하고, 다른 지방 사례를 논의한다. 다만 자생적으로 일어난 파업은 사회주의적이진 않다.
또 대중운동이 자생적으로 고양될수록 사회민주주의의 이론적, 정치적, 조직적 활동에서 더 많은 의식성이 요구된다. 문제는 러시아 대중은 고양되었는데 당은 준비부족인 것이다. 그런데 경제주의자들은 우리의 준비부족을 인정하는 대신 ‘객관적 요소’ ‘물질적 환경’을 탓한다.
“준비부족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비극, 모든 러시아 사회 민주주의자들의 비극이다..... 혁명가들은 ‘이론’에서도 활동에서도 이러한 대중의 고양에 뒤처졌으며, 전체 운동을 지도할 수 있는, 중단되지 않고 계승되는 조직을 건설하지 못했다.”(68p)

■사회민주주의의식은 외부에서만 올 수 있다
경제주의자들은 정치투쟁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봤듯 이들은 노동운동 자체에서 자라는 정치투쟁은 인정한다. 레닌은 이들이 정치를 사회 민주주의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항상 노동 조합주의적으로 이해할 뿐이라고 말한다.
경제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의 임무는 경제 투쟁 자체에 정치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현실 운동의 한 걸음이 한 다스의 강령보다 중요하다.” 즉 당은 각종 ‘입법 및 행정’ 활동 통해 해당직종 노동자들에게 ‘가시적 결과’를 가져다주는 역할을 임무로 삼아야 한다.
레닌은 분개한다. 경제개혁 투쟁은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당이 본래도 활동 일부로서 항상 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단지 정부가 갖가지 조치를 취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전제주의 자체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다. 따라서 당장 ‘가시적 결과’를 보장 못해도 전제주의에 관한 전면적인 정치폭로를 자신의 몫으로 짊어지고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을 전진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야 한다.
“사회민주주의가 노동자 계급을 대표하는 것은 각각의 기업가들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현사회의 모든 계급들 및 조직된 정치적 힘인 국가에 대한 관계에서이다.” (74p)
경제주의자들은 경제투쟁에 의해서만 계급적 정치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레닌은 반대로 경제투쟁만으로는 계급적 정치의식을 결코 발전시킬 수 없으며, 외부에서 전달해야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회민주주의 의식은 고용주-노동자 관계를 넘어 국가와 정부에 대한 모든 계급계층의 관계, 모든 계급들의 상호관계라는 영역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노동자 계급의 자기인식은 이론적 지식만이 아니라, 아니 더 올바르게 말하자면 이론적 지식보다는 정치 생활의 경험에서 생겨난, 현대 사회의 모든 계급들의 상호 관계에 대한 충분하고도 명료한 이해와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91p)
전제주의 타도라는 당면임무에 맞게 전면적 정치폭로로 각종 정치생활경험에 관한 대중의 의식을 명료화 시켜야한다. 정치폭로 연단이 될 수 있는 것은 전러시아적 신문뿐이다. 이 활동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모든 주민계층 속에서 이뤄져야한다. 그러자 경제주의자들은 이렇게 맞선다. 사회민주주의당은 다양한 반정부 계급계층을 지도할 수 없으며, 또 그런 계급계층과 힘을 합치는 것을 계급적 관점에서 이탈한 타협이라는 것이다.
레닌은 당이 다양한 사회계층들의 활동을 지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위’가 되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회 민주주의 실천가들을 동요하는 중간계층을 지도할 능력 있는 정치지도자로 단련시켜야한다.
“우리는 모든 반정부 계층들이 우리 당과 우리의 정치 투쟁을 강력히 도울 수 있도록, 또 실제로 돕게 되도록 우리 당의 지도 아래 그 같은 전면적인 정치 투쟁을 조직해야 할 임무를 짊어져야 한다.” (112p)

■당의 조직임무와 조직계획
1890년대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맑스주의가 보급되고 때마침 1896년 여름 뻬쩨르부르크 파업 등 노동운동도 성장한다. 하지만 정부는 곧장 새로운 조건에 맞게 첩자, 헌병대 부대 등을 파견하며 조직적 소탕으로 지역 서클들을 모조리 쓸어버린다. 노동자 대중은 문자 그대로 지도부 전체를 잃는다.
레닌은 당시 혁명가들의 미숙과 훈련부족은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기에 이를 비난할 수는 없다고 한다. 다만 혁명 활동 폭이 전반적으로 협소하고, 심지어는 이런 협소한 활동으론 훌륭한 혁명가 조직이 건설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 못하고 협소함을 정당화하는 “수공업성”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정치투쟁의 힘과 계승성을 보장할 수 있는 직업적 혁명가 조직을 건설해야한다. 이에 맞서 경제주의자들은 주장한다. “(당)강령의 핵심이 음모가 아니라 대중운동”, “불꽃의 반민주주의적 경향에 맞서 싸워야한다.” 즉, 혁명가 조직은 대중운동을 거부하는 ‘음모적’ ‘반민주주의 경향’이라는 것이다.
“대중이 운동에 자생적으로 이끌려 들어온다고 해서 투쟁을 조직할 필요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바로 그 때문에 조직이 더욱 필요해진다.” (144p) 대중에 대한 직접적인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라도 혁명가 조직은 반드시 필요하다. 혁명가 조직이 유인물 작성, 시위 계획 수립, 각 공장·구역 지도부 임명 등에 집중함으로써 대중은 시위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해도 더 이상 해를 입지 않게 된다. 오히려 반대로 승리하게 된다. 또 광범위한 대중을 대상으로 한 대중활동의 내용과 폭도 더욱 풍부해진다.
레닌은 정치혁명을 수행할 단일한 혁명가 조직 건설계획으로 ‘전러시아적 정치신문 발간’ 계획을 제시한다. 최근 우리 운동이 어려운 이유는 지역 활동가들이 과도하게 지역 활동에만 매몰되어있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 2년 반 동안 발행된 30여 호의 지역신문 숫자로도 확인된다. 평균 한 도시에 반년에 한 호씩 나왔다는 것인데 이는 혁명역량의 소모다. 만약 활동의 구심을 전국으로 옮기고 단일조직이 전러시아적 신문을 발간했다면 어땠을까? 차르 전제주의의 전형적이면서 두드러진 횡포가 2주일에 한 번씩 러시아 전역에 기사로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지역조직들이 지역신문만 생각하고 작업하는 비정상적 상황을 끝내고 당장 전러시아적 기관지를 위한 작업에 열중하는 상황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실제 운동을 지원할 수 있는 신문을 만들 수 있다. 이 계획에 경제주의자들은 “전제주의적 입법자, 통제불능의 입법자” “당이 권위주의적 편집국에 완전히 종속되는 것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신문계획은 먹물 근성의 발현”이라고 강하게 반발한다.
레닌은 지금 필요한 것은 다양한 세력들이 바로 조직건설에 착수할 수 있는 계획이라고 말한다. 전제주의에 대한 공동의 투쟁을 지도할 혁명가 역량을 조직해야 하는데 지금 지역신문은 이 역할을 할 수 없다. 또 혁명이란 강력한 폭발과 완전한 소강 시기를 포함하며 당 조직 활동은 이 모두를 포괄해야한다. 신문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조직은 탄압의 시기 당을 지키는 것부터 인민봉기를 준비하고 수행하는 일까지 모든 일을 할 준비를 갖출 것이다.

■마무리 : 인민봉기
책 마지막에 레닌은 인민봉기를 생각해보라고 한다. 차르 전제주의에 맞서 봉기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당 중앙위원회가 봉기준비 위해 각 지역에 임무대행자를 임명할 수 있나? 현 러시아 조건에서? 하지만 공동 신문을 발간하고 배포하는 활동 통해 그런 임무대행자 망이 저절로 형성되고 봉기의 성공 가능성을 높일 것이다. 또 광범위한 노동자 대중과 전제주의에 불만 가진 모든 계층들의 관계를 강화한다. 모든 지역조직들이 정치문제에 대해 통일된 형태로 대응할 수 있게 한다. 러시아 전역의 혁명조직들이 당의 실질적 통일을 창출하게 된다.
“한마디로 ‘전러시아적 정치 신문 계획’은 교조주의와 먹물 근성에 물든 탁상공론가의 산물이 아니며, 그와 반대로...지금 바로 봉기를 준비하고 모든 측면에서 봉기를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실천적인 계획이다.” (231p)
타도 대상(전제주의), 투쟁형태(인민봉기), 동맹대상(자유주의자 및), 봉기지도부로서 당의 통일, 그리고 이를 위한 조직계획 등등... 8년 만에 읽어서 어떻게든 소화해보려고 했는데, 역시나 과식이지 않나 싶다. 그래도 다시 읽으니 이젠 인터넷 밈처럼 떠도는 ‘위대한 레닌동지’라는 말이 새삼스레 느껴진다.
<무엇을 할 것인가?> 후반부 레닌은 “꿈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수많은 지역 위원회, 서클들이 공동의 대의에 복무하고, 공동의 과업을 중심으로, 공동의 조직 건설 현장에서 우리 혁명가들 중에 우리 노동자들 중에 정치지도자들이 나타나 전체인민을 이끄는 것을 꿈꾸어야 한다고 한다. 스스로 말하진 않았지만 레닌 자신도 그런 정치지도자 중 하나로 일떠서길 꿈꾸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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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 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미래
브루스 커밍스 지음, 조행복 옮김 / 현실문화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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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읽기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 근현대사와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연구해온 학자로 국내에선 <한국전쟁의 기원>이라는 저서를 통해 많이 알려졌다.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인 지난 2010년 저자는 새롭게 기밀 해제된 자료를 추가하여 이 책을 출간했다.

 

커밍스는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규정한다. 일제강점기(1910~45) 동안 형성된 계급분열과 민족갈등, 더 구체적으로는 1930년대 만주에서 벌어진 항일세력부역세력간 갈등이 내전의 기원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한국전쟁의 성격을 무엇으로 규정하는가? 분단국가에서 사는 우리에게 이 주제는 대단히 민감한 주제다. 각 이념마다, 국가마다 이 전쟁을 부르는 명칭도 제각각이다. 남한은 주로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북한정권이 탱크를 몰고 625일 새벽 기습 남침한 사건으로써 ‘6.25전쟁이라 부른다. 북한은 한반도 남쪽을 무단 점거한 미 제국주의에 맞선 전쟁이라는 의미로 조국해방전쟁이라 부른다. 중국은 항미원조미국은 한국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그런데 태평양전쟁이나 베트남전쟁과 달리 미국에서 한국전쟁은 잘 기억되지 않는 잊힌 전쟁이다. 커밍스는 이 책을 미국인이 미국인을 위해 쓴 한국전쟁에 관한 책이라고 소개한다. 한국전쟁의 성격 규정부터 전쟁당시 미국이 가졌던 반공주의적, 인종주의적 편견들, 한반도에서 미국이 행한 폭력들, 그리고 한국전쟁이 미국사회에 남긴 막대한 영향까지 커밍스는 망각된 기억 속에서 진실을 끄집어내어 미국인들에게 보여준다.

 

미국학자가 미국인을 위해 쓴 이 책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분단국가라는 특수성은 일상적인 전쟁가능성을 머리에 이고 산다는 걸 의미한다. 나와 상관없는 누군가의 결정에 의해 개인의 운명이 송두리째 파괴될 수도 있고 실제로 70년 전 한반도가 그랬다. 전쟁을 내포한 만성화된 위기를 끊어내기 위해선 이 위기를 초래한 기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거리를 두고 위기의 기원을 고민하게 해줄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강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내용과 감상을 간략히 정리해보았다.

 

 

한국전쟁의 전개 과정

커밍스는 1장에서 한국전쟁의 전개과정을 설명한다.

625일 새벽3~4시경 웅진과 철원에서 전투가 시작된다. 조선인민군 제3사단과 제4사단이 기갑여단을 동반하여 서울로 진격한다.

626일 오후 한국군 제2사단의 병력 보강이 늦어지며 전투가 실패한다. 의정부가 뚫린다.

627일 남한군 사령부 전체가 서울 남쪽으로 이전한다.

628일 남한군 사단들도 사령부를 따라 남쪽으로 철수하고 한강대교를 폭파한다.

 

특별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피신한 이승만은 다시 목포로, 부산으로 향한다. 6월 말이 되자 남한군 병력 절반은 사망했거나 포로가 되었다. 남한이 이처럼 단시간에 무너지자 미국의 무력개입이 촉발되었다. 미국의 무력개입은 당시 국무장관인 딘 애치슨이 주도한다. 간략히 살펴보면 이러하다.

 

624일 밤, 애치슨은 트루먼에게 전투사실을 알리고 이를 국제연합에서 다루기로 결정한다.

625일 저녁, 백악관 긴급회의에서 애치슨은 남한에 군사지원을 늘리고 제7함대를 대만에 배치해 공산주의자들의 침공을 방지하자고 주장한다.

626일 오후, 애치슨은 홀로 미국 공군과 해군을 한국전쟁에 투입하는 결정을 입안하고, 그날 저녁 백악관은 이를 승인한다.

 

애치슨은 미국의 무력개입을 결정했다. 무슨 이유로? 첫째, 북한의 침공은 미국의 위신에 도전한 것이다. 둘째, 일본을 중심으로 동북아시아와 중동을 연결하는 대 초승달전략에 따라 일본 산업을 부흥시켜야 한다. 즉 미국의 위신 그리고 일본의 발전, 이 두 가지가 애치슨의 결정배경이었다.

 

630, 전선을 방문한 맥아더의 판단으로 지상군 파견이 결정되었다. 맥아더가 보기에 한국군은 전투를 포기하고 꽁무니를 빼기만 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북한군에 대해선 오판했다. 맥아더는 처음에 제1기병사단만 있으면 북한군을 격퇴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 뒤에는 2개 사단이 필요하다 했고, 7월에 들어서는 최소 4개 사단 이상, 그리고 한 주 뒤에는 8개 사단을 요청했다. 9월이면 전투훈련을 받은 가용 부대는 모두 한국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미군은 아시아의 농민군 따위는 쉽게 이길 것이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병력에서 우위를 차지했지만 연달아 패배했다. 8월 초 제1해병여단이 투입으로 겨우 방어선이 낙동강에서 고착된다. 8월 말 북한군은 부산 방어선을 따라 마지막 공세에 착수하나 국제연합군은 이를 간신히 저지한다.

 

9월 중순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서울을 차지한다. 10월 초 미국은 38도선 너머로 공격을 가하기로 결정한다. 북한 정규군은 계속 물러나며 국제연합군을 깊숙이 유인한다. 1124일이면 국제연합군은 압록강에 도달한다. 이때까지도 맥아더는 중국의 대규모 공세 작전을 눈치 채지 못한다. 그리고 3일 뒤 중국과 북한의 합동공세에 연합국은 대패한다. 국제연합국은 계속 밀려나 12월 말이면 다시 서울이 함락될 지경에 이른다.

 

맥아더는 퇴각하면서 북한 영토의 모든 통신수단과 모든 시설, 공장, 도시, 마을을 파괴하라. 만주 국경부터 파괴를 시작하여 남쪽으로 점차 확대해야한다.”고 명령한다.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북한영토 대부분이 황폐화된다. 트루먼은 기자회견에서 핵무기도 사용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1951년 봄 38도선을 중심으로 전선은 고착된다. 정전논의가 시작되나 전쟁포로 처리문제가 길어지며 1953727일이 돼서야 미국, 중국, 북한 세 나라가 휴전협정에 서명하게 된다.

 

 

한국전쟁은 단지 내전일 뿐인가?

전쟁을 누가 먼저 일으켰는가?”를 중심으로 한국전쟁을 바라보는데 익숙한 우리에게 전쟁이 왜 일어났는가?”라는 상식적인 질문조차 다소 도발적으로 보인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성격을 내전으로 규정하며 전쟁의 사회, 정치적 기원을 1930년대 만주에서 항일세력일제 및 부역세력간 갈등에서 찾는다. 해방 후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하던 세력이 북한지도부를 이루고 반대로 일제부역자들이 남한 정권과 군부의 핵심을 이룬다. 그는 이들 사이의 내전은 불가피했다고 한다. 마치 미국 남북전쟁처럼 상호 대립하는 두 사회체제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 경험에서 비롯된 민족적, 계급적 분열이 낳은 내전이라는 설명에서 추가로 덧붙여야 할 부분이 있다.

 

진정한 비극은 전쟁 그 자체가 아니었다. 순전히 한국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내전이었다면 식민주의와 민족 분단, 외세 개입으로 초래된 엄청난 긴장을 해결했을지도 모른다. 비극은 전쟁이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전 상태로 돌아갔을 뿐이며, 그저 휴전을 통해 평화를 유지했을 뿐이다.” (72p)

 

해방 후 38도선 분할, 미군정시기 그리고 미국의 무력개입은 한국전쟁의 성격을 보다 복잡하게 만든다. 미국의 38도선 분할이 없었다면? 미군정에 의해 일제 부역세력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미국이 무력개입을 하지 않았다면? 무력개입을 했더라도 38도선을 지키는 것에 만족했다면?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하는 매순간마다 이면에는 미국이 있었다.

 

1945810일 미국 육군부에서 일했던 존 매클로이는 딘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을 불러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들인 뒤 한국을 어디에서 분할해야 할지를 물었다. 이들은 38도선을 선택했다. 소련은 이 분할을 조용히 수용했다.

 

194598일 존 리드 하지가 지휘하는 제24군단이 한국에 상륙한다. 이들은 한국의 지도자를 물색하고 간판인물로 이승만을 내세운다. 미국은 일제시절 통치 구조를 부활시켰다. 일제에 협력하여 얻은 지위와 부를 지키려는 극우파들이 미군정이 재건한 경찰, 군대 등에 요직을 차지한다.

 

미군정은 극우파를 내세우며 한편으론 좌익세력을 탄압한다.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해방 후 자체로 치안과 행정을 유지해갔다. 삼척 같은 곳에선 일본이 남기고 간 공장을 조선인 기술자들과 노동자들이 접수하여 스스로 관리했다. 정치와 경제 영역에서 조선인들이 인민위원회’ ‘자치위원회등을 통해 해방 후 자주 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를 부정하고 관련인물들을 체포한다.

 

미국의 한국정책은 공산주의에 맞선 봉쇄전략 그리고 일본의 산업부흥을 위한 역코스와 맞물려있었다. 제주도 4.3사건과 여수반란 그리고 한국전쟁까지 연이은 비극들은 이러한 미국의 전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요컨대 이승만과 부역세력에 맞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남한의 대유격전 부대를 조직하고, 장비와 정보를 제공하고, 작전을 세워주고 때로는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시작하기 전에 이미 남한에선 최대 10만 명이 정치적 폭력으로 살해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학살은 보도연맹학살 등 한국전쟁 후에도 계속 일어난다.

 

한국전쟁에 개입한 미국은 38도선을 복구하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무력개입을 주도했던 애치슨은 이번엔 38도선을 넘어 반격하는 것을 주도한다. 그러나 이 반격은 중국군의 개입으로 저지되고 미국은 민간인을 비롯한 북한 땅의 모든 걸 초토화하는 공습으로 대응한다.

 

마을과 들판 곳곳에서 주민들은 불시에 습격을 받아 네이팜탄이 터질 때 취했던 자세 그대로 죽어있었다. 한 남자는 자전거에 올라탈 참이었고, 50명의 소년과 소녀는 고아원에서 놀고 있었으며....” (65p)

 

미군은 한국전쟁에서 네이팜판을 포함해서 총 667557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태평양전쟁 내내 미국이 503000, 1942~45년 미군과 영국 공군이 독일에 쓴 폭탄이 120만 톤이었다. 북한의 피해규모는 독일과 일본보다도 컸다. 북한의 민간인 사망자 대부분은 이러한 미군의 공중폭격에 의해 발생했다.

 

한번 정리해보자. 커밍스는 한국전쟁을 일제 시절에서 비롯된 민족적, 계급적 분열에서 비롯된 내전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설명을 덧붙여야한다. 해방 후 민중들이 스스로 자주 국가를 설립하고 일제시절을 청산하려는 노력은 미국의 개입으로 저지된다. 일제 부역세력은 다시금 기회를 얻게 된다. 미국은 봉쇄전략의 일환으로 일제 부역세력과 함께 한국의 좌익세력을 탄압하고 이는 민간인 학살로 이어진다. 이후 한국전쟁에 미국이 개입하고 38도선을 넘어 반격하면서 전쟁의 성격은 제한적인 내전을 벗어나게 된다. 대규모 공중 폭격과 38도선에서 고착된 전선을 중심으로 진행된 고지전은 의미 없는 희생만을 늘려갔다.

 

수치마다 각이하지만 3년간의 전쟁으로 약 3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당시 한반도 전체 인구의 약 1/10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 수치는 전쟁의 끔찍함과 참혹함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이 참혹함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한국전쟁은 사망자 중 80%가 민간인으로 어떤 현대전보다 민간인 희생 비율이 높다. 북한에서는 200만 명, 남한에서는 100만 명이 사망했다. 북한의 민간인 사망자 대부분이 미국의 공중폭격에 의한 것이었다면, 남한에서 희생된 100만 명은 대부분 보도연맹학살같은 민간인 학살에 의한 것이었다.

 

한국전쟁은 내전인가? 이 규정은 한국전쟁의 한 측면만을 보여줄 따름이며 해방부터 한반도에 등장한 미국이라는 주요 행위자의 역할을 간과하게 만든다. 미군정시기 일제부역세력의 부활, 전쟁의 장기화, 미군의 무차별적 공습 그리고 부활한 일제부역세력의 민간인 학살. 이 사실들은 1950625일 새벽4시 북한군이 탱크를 들이밀었다든가, 195114일 중국군의 공세로 서울을 내주었다든가 하는 사건들보다 한국전쟁의 성격에 관해서 더 많은 점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한국전쟁 오늘날 제국을 만들다

한국전쟁이 미국 내부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커밍스는 8장에서 이 내용을 상세하게 다룬다. 더 많이 기억되고 회자되는 건 베트남전쟁이지만 실제 미국의 외교정책이나 군사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건 한국전쟁이라는 것이다.

 

한국전쟁은 미국이 그 이전과는 매우 다른 나라로 바뀌는 계기였다. 해외에 수백 개의 상설 군사기지를 갖추고 국내에는 대규모 상비군을 갖춘 영원한 안보국가가 된 것이다.” (281p)

 

트루먼 행정부 국무장관인 조지마셜과 차관인 딘 애치슨은 미국의 정책 방향을 조정한다. 두 사람은 일본 경제를 재건하고 남한에 공산주의에 맞선 봉쇄정책을 적용한다는 점에서 한반도의 가치를 재평가했다. 조지마셜은 애치슨에게 분리된 남한과 일본 경제를 연결할 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한다.

 

애치슨은 소련을 봉쇄하기 위해 소련 주변부에 친미정권을 배치하고자 했다. 또 분할된 한국이 일본의 부흥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봉쇄정책을 위해 애치슨은 상원에 자금을 요청한다. 국무부는 6억 달러를 요구했지만 의회는 주춤했다. 그리스와 터키를 위해 투입된 자금도 25000만 달러 남짓이었기 때문이다.

 

1950414일 국가안전보장회의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국가안전보장회의 문서 제68(NSC-68)’를 제출한다.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군비증대, 수소폭탄 개발, 동맹국에 군사 지원 등의 내용이 남긴 비밀 정책문서였다. 이 문서는 한국전쟁 덕분에 최종적으로 승인되게 된다. 애치슨은 이를 두고 “(한국전쟁은) 발발하여 우리를 구한위기라고 말한다.

 

이 말로 그가 뜻한 바는 한국전쟁 덕분에 국가안전보장회의 문서 제68호가 최종적으로 승인되었고, 미국 국방비를 네 배로 늘리는 예산안이 의회를 통과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후 내내 미국의 세계적 영향력의 근간이었던 엄청난 해외 군사기지 체계와 이에 장비를 공급할 국내 군산복합체의 동인이 된 것도 제2차 세계대전이 아니라 한국전쟁이었다.” (285p)

 

한국전쟁 이전까지 미국인들은 대규모 상비군 유지를 지지하지 않았다. 군대는 전쟁 수행과 관련되었고 전쟁이 끝나면 축소되었다. 예를 들어 1840년대 멕시코와 전쟁 때 5만 명인 군대는 전쟁 이후 1만 명으로 축소됐다. 남북전쟁 때 수백만 규모의 시민군도 19세기 말이 되자 25000명 규모의 경찰대로 줄어들었다. 당시 프랑스가 50만 명, 독일이 41만 명, 러시아가 76만 명 규모의 병력을 보유했다.

 

20세기 초에도 이런 경향은 계속되었다. 전간기에는 135000명 규모였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군대는 급격히 줄어든다. 태평양전쟁 때 1100만 명 이상이 자발적으로 입대했지만 1948년이면 육군 병력은 55만 명, 해군은 49만 명 정도로 축소된다. 당연히 국방예산도 축소한다. 덩달아서 항공산업 판매고도 줄어든다. 미국은 다시 서반구 내 고립으로 회귀하는 듯했다.

 

봉쇄정책도 군사적 측면보단 외교와 경제 수단을 통한 서유럽과 일본의 부흥을 추구하는 제한적인 것에 가까웠다. 당시 입안자인 조지케넌은 봉쇄정책을 기본적으로 외교적이고 정치적인 과제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상황은 반전된다. NSC-68호가 승인되고 조지케넌의 제한적인 봉쇄가 애치슨의 군사적 케인스주의의 형태를 띤 봉쇄로 바뀌었다. 전쟁은 일본과 미국 경제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특히 미국의 방위산업계, 항공우주산업이 호황을 누린다.

 

새로운 제국이 탄생했다. 미국 역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세계 도처에 병력이 상주하는 수많은 군사기지들이 생겨나고 엄청난 규모의 방위산업들이 여기에 연결되었다. 막대한 국방예산과 대규모 상비군 그리고 전세계적 관여로 정책의 방향이 틀어졌다. 미국은 세계의 경찰국가 기능을 자처하게 된다. 그러나 애치슨이 주도한 이 정책은 결코 미국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미국은 한국과 베트남 전쟁에서 실패했고, 이라크에선 아직도 발목이 잡혀있다. 커밍스는 이를 이렇게 평가한다.

 

미국은 1945년 이래로 어느 곳에서도 출구전략을 갖추지 못했다. 예외가 있다면 내쫓기거나(베트남) 떠나라고 요구받은(필리핀) 경우뿐이다. 다시 말해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0년째에 접어든 지금도 일본과 한국, 독일에 주둔해 있다. 정책입안자들(거의 언제나 군대 경험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민간인들로 애치슨이 전형적인 인물이다)은 미국을 전쟁으로 끌고 들어가지만 빼낼 수 없으며, 곧이어 국방부가 책임을 넘겨받아 기지를 설치한다. 그러면 전체 기획은 다른 모든 나라들에 비해 압도적인 국방 예산으로 가동되는 영구 작동 기계가 된다.” (313p)

 

미국은 한반도의 운명을 뒤바꿨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영구 작동하는 전쟁기계로 전락했다.

 

 

감상정리

커밍스는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저지른 일들을 조목조목 짚는다. 그의 의도는 단순히 미국을 가해자로 규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진실과 화해를 말한다. 남한에서 군사독재가 끝나고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진실과 화해를 위한 발걸음을 때었듯 미국도 지난날 메카시즘의 광풍에 의해 가려졌던 진실을 바라보는 것을 통해 화해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책의 구절을 다소 길지만 인용해본다.

 

여러 조사의 목적은 책임을 묻거나 냉전의 싸움을 다시 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과 남한 사이의 화해를 도모하고 과거에 적이었던 자들을 이해할 수 있는 인식과 태도를 얻는 것이었다. 이해란 공감이 아니고 감정이입도 아니며, 단지 적의 행동을 이끈 원칙들을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그 원칙들이 용납하기 어렵다고 해도, 역사적으로 그 적에게 일어난 일에 관한 나의 지식과 크게 상관없다. 결국 20세기에 일본이 한국을 점령한 이후의 그 모든 피와 고통의 책임을 어느 한 편에 돌리는 것(대다수 미국인들이 그렇게 한다)은 지극히 복잡하고 냉혹하고 심히 잔인한 역사를 이데올로기라는 바늘구멍을 통해 보는 것이다.” (318p)

 

커밍스는 책 서두에서 한반도 핵 위기를 이렇게 말한다. “미국과 북한이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한국전쟁을 끝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외교적으로 승인하라는 요구에 응한다면, 핵 위기는 빠르게 끝날 것이라고 믿는다.” 서로가 화해하고 평화협정을 이루면 된다는 이 간단한 해법은 분단이 되고 7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다. ‘20006.15공동선언이나 2018‘4.27 판문점 선언때처럼 해법에 한걸음 다가간 적은 있지만 곧이어 뒷걸음치는 일이 반복되었다. 커밍스와 조금 결이 다르지만 이렇게 생각한다. 한반도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길은 2000년과 2018년에 그랬듯이, 민주주의와 새로운 시대를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이 열망이 그간의 편견과 오해를 넘어 남북이 손을 잡고 화해하는 것까지 이어져야만 가능하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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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전환 -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8
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 길(도서출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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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전환>읽기 : 사회주의 정치의 필요성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읽게 되었다. 1944년 출간된 이 책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제1차 세계대전, 파시즘의 발흥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까지 서구 문명의 붕괴라는 당대 시대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왜 자유주의 국가들의 백년평화가 세계대전으로 비화했는가? 왜 전후 노동계급의 지지 속에 탄생한 사회민주주의 정권들이 파시즘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나?

 

이 질문에 내가 당장 드는 생각은 이렇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경쟁이 세계대전으로 비화된 것 아닌가? 베르사유 조약의 무리한 요구가 나치즘과 전쟁의 씨앗이 된 것 아닌가?

 

폴라니는 이렇게 답한다. 20세기 서구 문명 붕괴의 기원은 19세기 자기조정 시장경제의 출현에 있다. 그는 자기조정 시장경제체제란 인간사회에서 단 한순간도 실현될 수 없는 유토피아이며, 이런 유토피아적 기획에 따라 본래 상품이 될 수 없는 인간·자연·화폐가 상품으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시장경제라는 유토피아적 기획이 문명 붕괴의 기원이다.

 

이런 주장은 너도 나도 주식을 하고 부동산 투기 소식이 언론에 오르내리고 비트코인 열풍이 부는 요즘 사회분위기와는 한참이나 동떨어져 보인다. 주변에 상품 아닌 것이 없고 모두가 한몫 챙기고자 시장에 뛰어든다. 인간은 본래부터 이기적인 존재이고 시장경제는 그러한 인간본성에 가장 잘 맞는 체제처럼 보인다.

 

시장경제는 인류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체제인가?”

 

<거대한 전환>은 단지 시장경제의 폐해를 지적하고 국가의 적절한 개입을 촉구하는 정도를 넘어선다. 경제란 본래 사회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만약 경제가 사회에서 빠져나와 사회의 존속을 위협한다면 사회는 그에 맞서 보호운동을 할 수밖에 없다. 만약 인류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있다면 그건 사회이지 시장경제가 아니다.

 

 

시장경제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종획운동을 상세하게 다룬다. 영국에서 일어난 종획운동은 토지를 사유화하여 농민을 생산수단과 분리시켜 노동자화 시키는 과정이었다. 토머스 무어는 당대 종획운동을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로 표현할 정도였으니 그 과정이 얼마나 폭력적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폭력적 과정을 통해 관습적으로 사용되던 토지가 자산이 되고 토지를 잃은 농민이 임금노동자가 된다. 종획운동은 전근대사회에서 자본주의로 이행이 결코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마르크스가 임노동관계 창출이라는 자본의 초기형성에 집중했다면,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 3장에서 종획운동에 맞선 사회의 자기보호를 보여준다. 영주와 귀족들이 공유지를 사유화하고 농경지를 목초지로 바꾼다. 농경지가 목초지가 되는 과정에서 많은 농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는다. 마을이 황폐화되고, 대를 이어 살던 가택이 무너지고, 농촌 인구가 줄어든다. 이에 맞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심지어 튜더 왕조와 초기 스튜어트 왕조는 종획운동을 막으려는 보호법령과 정책을 내놓기까지 한다.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농민반란과 반종획입법이 시장경제가 형성되는 경제학적 법칙을 이해 못한 처사라고 평가한다. 결과적으로 종획운동으로 토지 가치가 오르고, 토지 소출이 증가했으며, 양모산업의 발전으로 산업혁명의 기틀을 닦았다. 종획운동은 시장경제의 발전이라는 자연스러운 추세를 보여줄 뿐이다. 이에 맞서는 것은 자연현상을 인위적으로 막는 반동적 개입주의에 불과하다. 그러나 폴라니는 이렇게 반박한다. 종획운동이 초래하는 사회변화의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야말로 의미 있는 것 아닌가?


만약 튜더 왕조와 초기 스튜어트 왕조에서 나릿일을 맡아본 이들이 종획운동에 제동을 걸 정책을 일관되게 유지하지 않았더라면 그러한 진보속도가 파멸적일 만큼 가속화되어 마침내 진보 과정 자체가 건설적 사건이 아닌 오히려 사회 전체의 퇴락을 가져오는 것으로 변할 수도 있었다.” (171)


자연스러운 것은 아직 영국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장경제에 적합한 법칙이 아니라 종획운동에 맞서 사회를 보호하려던 움직임이었다. 만약 어떤 변화가 방향도 통제할 수 없고 속도도 지나치게 빠르다면 가능한 한 그 속도를 늦추어서 공동체의 안녕을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각이다.

 

4장에서 폴라니는 시장경제가 아닌 다양한 경제체제를 보여주며 시장경제가 결코 인류역사에서 당연한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애덤스미스 이래 교환을 통해 이익과 이윤을 얻는다는 동기가 인간 경제를 움직이는 기본 전제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실제 인류역사는 그러한 경제적 자유주의의 가설이 19세기적 편견에 불과함을 보여준다.


초기 사회에 대한 최근연구에서 한 가지 분명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면, 인간은 한결같이 사회적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여러 천성적 자질들은 시대와 장소를 넘어서 모든 사회에 고루 나타나며, 인간 사회의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것도 변함없이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184)


역사적, 인류학적 연구 결과는 인간이 물질적 이해관계와 관계없이 행동했음을 보여준다. 생산과 분배 같은 경제활동은 시장경제가 가정하는 물질적 동기가 아니라 사회관계 속에 깊숙이 잠긴 채로 상호성이나 재분배 원리로 작동했다. 어떤 사회는 교환이 선물과 보답이라는 상호성의 관계에 따라 수행된다. 어떤 사회는 저장된 부를 축제나 의식 등을 통해 구성원들에게 분배한다. 트로브리앤드 제도같은 친족사회부터 고대 이집트, 고대 중국, 잉카제국 등 크고 복잡한 사회까지 상호성과 재분배 원리를 볼 수 있다. 이는 서유럽사회도 마찬가지여서 봉건제가 끝나기 전까지는 상호성, 재분배 그리고 가정경제의 원리로 경제체제가 작동하였다.

 

시장제도는 과거 존재한 여러 경제 체제들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면 시장경제는 언제, 어떻게 나타나게 된 것인가? 폴라니는 5장과 6장에서 시장의 역사를 추적하며 시장에 대한 정설을 반박한다. 고전파 경제학을 비롯한 정설은 이렇다. 개인은 물물교환 성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마을 장터와 노동분업 발생은 필연적이다. 인간의 교환성향은 처음에는 단순한 물물교환으로 시작하여 마을장터, 국내시장 그리고 대외무역으로 점차 발전한다.

 

그러나 폴라니의 연구결과는 정설의 주장과 정반대다. 재화와 노동분업의 지리적 분포에 따라 원거리무역이 먼저 나타난다. 원거리 무역이 생겨나면 종종 그로 인해 다른 시장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렇게 시장이 나타나고 개인이 판매 및 구매 행위를 하게 되며 이른바 개인의 교환 성향이라는 것이 나타난다. 무역은 인간에게 내재된 교환성향의 발현이 아닌 재화의 획득 문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또 외부 무역의 기원을 따져보면 물물교환이 아니라 모험·탐험·수렵·해적질·전쟁 등의 성격을 띠었다.

 

인간의 교환성향이 점차 발전하며 마을장터, 국내시장, 대외무역이 점차 발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마을장터, 국내시장, 대외무역은 전적으로 상이한 제도들이며 특히나 국내시장은 중상주의 국가가 등장하고서야 출현하게 된다. 중세까지만 해도 각 도시를 잇는 원거리 무역과 마을장터는 각종 관습과 보호주의 법령으로 엄격히 구분되었다. 국내시장은 근대주권국가가 영토 내 자원을 목표에 맞게 동원하기 위해 도시별로 나눠진 시장을 통합하며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이 국내시장도 아직 우리가 아는 자기조정 시장경제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선 또 다른 조건이 필요했다. 바로 노동·토지·화폐라는 허구상품이다.

 

 

사회를 해체하는 허구상품에 맞서 보호운동이 일어나다

시장경제란 여러 시장이 모여서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단일 체제를 형성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체제는 경제활동이 오로지 가격을 통해 결정되는 자기조정적 체제다. 생산과 분배 모든 경제활동이 가격에 따라 작동해야한다. 산업의 모든 요소가 시장에서 사고파는 상품이 되어야한다. 이 말은 노동·토지·화폐도 각각 임금·지대·이자로 불리는 가격이 매겨진 상품이 된다는 뜻이다.

 

시장경제는 오로지 시장사회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중략) .....시장경제는 노동·토지·화폐를 포함한 산업의 모든 요소를 포괄해야 한다. 하지만 노동이나 토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그것들은 다름 아닌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 자체이며 또 사회가 그 안에 존재하는 자연환경인 것이다. 이것들을 시장 메커니즘에 포함한다는 것은 사회의 실체 자체를 시장의 법칙 아래 종속시킨다는 뜻이다.” (242p)


중상주의가 창출한 국내시장은 이러한 자기조정 시장경제와는 사뭇 달랐다. 중상주의 국가는 상업화를 강력하게 추진했지만, 산업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토지에 대한 봉건적 질서나 길드체제와 같은 관습은 중상주의 국가가 법령을 통해 통일적으로 규제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이전과 그대로였다. 중상주의자들은 아직 노동과 토지의 상업화라는 관념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18세기 말에서야 중상주의 국가가 규제하는 전국시장에서 자기조정 시장으로의 사회구조 변화가 나타난다.

 

이러한 사회구조 변화는 두 가지 조건이 맞물린 결과였다. 중상주의 시대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상인계층이 등장한다. 상인들은 가내 산업에 원자재를 공급하는 등 생산과정을 통제했다. 그런데 이 상인이 통제하는 생산과정에 공장제의 발전이라는 획기적인 변화가 찾아온다. 대규모 기계를 사용하는 공장제의 발전은 산업생산의 성격의 뒤바꿔버렸다. 지금까지 산업생산은 상업에 따른 부산물에 불과했지만 이젠 대규모 장기투자라는 리스크를 동반한 만큼 생산이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했다.

 

시장 메커니즘을 노동·토지·화폐라는 산업 요소들에까지 확장하게 된 것은 상업 사회라는 틀에 공장제를 도입하면서 불가피하게 나타난 현상이었다. 산업 작동에 필요한 요소들이 판매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는 시장경제 체제에 대한 요구가 나타났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247p)


당연히 노동·토지·화폐는 시장에서 판매하기 위해 생산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산업생산의 요구에 따라 이들을 마치 상품으로 여기는 허구가 사회의 조직 원리가 되었다. 19세기 사회사는 이런 경향에 맞서 사회 보호의 반작용이 있는 이중적 운동 결과다. 사회는 허구상품이 초래할 재난에 맞서 스스로를 보호해야했다. 예를 들면, 노동시장의 창출을 두고 정주법, 스피넘랜드법, 구빈법 등이 엎치락뒤치락한다. 여기서 노동이동의 자유를 해소하면, 저기선 수당체제를 만든다. 수당체제를 없애고 노동시장을 만드니 곧이어 공장법이나 사회법이 제정되고 노동운동이 생겨난다. 토지의 상업화, 곡물시장의 창출 등에 맞서 토지세력은 성직자 및 군국주의 세력과 힘을 합쳐 맞선다. 금본위제가 등장하자 자본주의 국가는 중앙은행을 통해 통화정책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폴라니가 말하는 이중운동이 나타난 것이다.

 

이 이중적 운동이야말로 폴라니가 강조하는 시장경제의 유토피아적 성격과 이에 맞서는 사회 실재의 발견이 표출되는 지점이다. 시장경제가 나타난 것은 자유방임은커녕 엄청난 국가 계획에 의한 것이었지만, 시장경제에 맞선 사회의 자기 보호 운동은 아주 자발적이고 자생적으로 가타났다는 것이다.” (625p)


19세기 자기조정 시장경제를 확립하기 위해 1834년 수정구빈법, 1844년 필 은행법, 1846년 곡물법 철폐 법안 등 여러 입법들이 무수히 터져 나왔다. 자유시장체제 도입을 위해 통제, 규제, 개입의 필요와 범위가 더욱 넓어졌다. 폴라니는 이중운동에서 자유방임운동이 오히려 인위적인 활동이었으며, 그에 맞선 보호운동이야말로 자생적이라고 주장한다. 전자가 인간과 자연이 관계 맺는 사회 실체를 시장에서 사고파는 산업요소로 해체하는 과정이었다면, 후자는 이 사회 실체가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중운동의 양상은 파괴적이었다. 사회가 허구상품이라는 파괴위협에 맞서 보호행동을 하자 자기조정 시장의 작동이 망가졌다. 19세기 시장경제가 붕괴되는 조짐이 세계 곳곳에서 비슷한 형태로 나타났다. 국내경제에서 시장이 불균형 상태에 들어서며 실업문제가 발생했다. 국내정치에서 사회 계급들 간 투쟁과 긴장이 고조되었다. 금본위제에 대한 부담이 보호주의를 추동하고 제국주의 경쟁이 심화되었다. 이런 긴장은 제1차 세계대전 곧이어 파시즘의 대두로까지 이어진다.

 

 

복합사회 속에서 자유를 실현하는 것이 대안이다

그러나 시장경제가 붕괴로 이어질 내적 모순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실제 현실에서 어떤 형태로 드러나는 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문명 붕괴라는 논리적 필연이 역사에서는 어떤 정치적 사건들로 모습을 취했는가? 폴라니는 이렇게 답한다. “이 시장경제 몰락이라는 드라마의 마지막 단계로 오면 계급 세력들 간의 갈등이라는 것이 주인공으로서 무대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노동계급의 힘을 입어 많은 인민정부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 인민정부들은 얼마못가 권력을 내려놓게 된다. 비록 내적 긴장이 터져 전쟁으로 비화하긴 했지만 여전히 자기조정 시장경제라는 신화는 살아있었다. 경제제도는 사회에서 떼어져 그 자체의 메커니즘으로 조직·운영되어야 한다. 노동자들의 요구에 따라 인민정부가 사회서비스를 개선하고 임금을 올리고 실업수당을 보장할 것인가? 아니면 통화가치를 안정시켜 금본위제를 지킬 것인가? 모든 주요 유럽 국가들은 후자를 택하게 된다.

 

“1923년 오스트리아에서, 1926년 벨기에와 프랑스에서, 1931년 독일에서, 각국의 노동당은 모두 통화 가치를 구출하기 위해서 권력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자이펠·프랑키·푸앵카레·욘브뤼닝 등의 국가 지도자들이 노동당을 정부에서 배제시키고, 모든 사회적 서비스를 삭감하며, 노동조합의 저항을 분쇄하려 들었다.” (551p)


통화와 재정문제를 두고 자본가와 노동자들은 양편으로 갈라져 각축을 벌이게 되었다. 자본가들은 산업을 장악하고 정부와 의회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노동자들은 그 수를 무기로 의회에 자리를 잡고 산업체제 전체에 맞섰다. 입법부와 행정부 등의 정치체제와 산업으로 대표되는 경제체제 모두 복합사회가 작동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런데 계급갈등으로 인해 정치체제와 경제체제 양쪽 모두 마비될 위협이 현실화 되었다.

 

공포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고, 사람들은 나중에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따져보지도 못한 채 그저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날 쉬운 길만 제공해준다면 어떤 이들에라도 기꺼이 지도권을 떠안겨주기에 이르렀다. 파시즘이라는 해결책이 나타날 때가 무르익은 것이다.” (562p)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산업과 정치제도의 충돌로 사회 전체가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 복합사회의 붕괴 위험에 대한 대응으로 파시즘이 등장했지만 이는 명백히 퇴행적인 성격을 띠었다. 복합사회가 위기에 처하자 파시즘이 택한 해결책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희생하여 경제제도를 살린다는 것이었다. 파시즘은 산업사회가 제공하는 여가와 물질적 안정을 통해 인간의 자유를 더욱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말살하여 산업사회가 작동하는 부품으로 전락시키고자 했다.

 

폴라니는 파시즘이 자유주의 철학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말한다. 자유주의 철학은 권력과 강제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니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사회에서 이것은 불가능한 요구다. 특히 복합사회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두 가지 뿐이다. 자유의 이상을 따라 사회 실재를 부정하든가, 아니면 사회 실재를 받아들여 자유라는 이상을 부정하든가. “전자가 자유주의자들의 결론이라면, 후자는 파시스트들의 결론이다.” 그러면 다른 길은 없는가?

 

인간은 이제 사회 실재를 받아들이면서도 자유를 창조해야한다는 새로운 과제에 맞닥뜨렸다. 폴라니는 파시즘과 사회주의를 나누는 구분선이 여기에 있다고 한다. 양자의 차이점은 경제적인 것이 아니다. 둘이 갈리는 궁극적인 지점은 자유의 문제다. 복합사회라는 현실 앞에서 체념하고 자유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든 복합사회 속에서 자유를 실현할 것인가.

 

 

감상정리

지금까지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보자.

먼저 인류역사에서 시장경제는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역사 속 여러 경제체제는 사회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상호성, 재분배, 가정경제의 원리로 움직였으며, 이는 중세이전 서유럽도 마찬가지였다. 또 인간에게 내재한 교환성향이 있어서 이것이 발현되는 결과로 시장의 범위가 점차 넓어진 것이 아니라, 지리적 조건 등에 의해 무역이 강제되고 시장이 부수적으로 형성되고 나서야 인간은 교환성향을 보였다. 국내시장도 중상주의 국가가 개입해서 형성되었고, 이것이 자기조정 시장경제가 되기 위해선 노동·토지·화폐를 상품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영국의 종획운동은 이러한 시장경제이행 과정이 얼마나 강제적이었는지 보여주는 한 가지 예시다.

 

다음으로 사회를 해체하는 허구상품에 맞서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이 일어난다. 중상주의 국가가 단일한 전국시장을 만들긴 했지만 이것은 아직 자기조정적 시장이 아니었다. 상업사회에서 대규모공장제 생산이 등장하자 생산요소인 노동·토지·화폐가 상품이 되어야했고, 이는 곧 시장경제체제의 탄생을 의미했다. 그러나 노동·토지·화폐를 상품으로 만든다는 허구상품에 맞서 사회의 자기보호 운동이 자발적으로 발생한다. 폴라니는 이것을 이중운동이라 부른다. 이중운동은 계급 간 충돌을 통해 유럽에서 파시즘의 등장으로 귀결된다.

 

파시즘은 복합사회의 붕괴위험에 대한 대응이었다. 계급 간 충돌로 정치체제와 경제체제가 마비될 지경에 이르자 파시즘은 인간의 자유를 포기하여 산업경제를 살리고자 했다. 그러나 폴라니는 복합사회 속에서도 인간이 자유를 회복하는 길을 가자고 호소한다. 사회를 해체하여 허구상품으로 전락시키는 자유주의자들의 유토피아적 자유가 아니라 사회실재를 받아들이며 새로운 자유를 창조해야한다. 이것이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방향이다.

 

<거대한 전환>은 시장경제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여러 통념과 신화를 깨뜨린다. ‘시장은 인간본성의 자연스러운 발현이 아니다.’ ‘인류역사에서 시장경제는 찾아보기 드물었다.’ ‘시장경제는 경제법칙에 따라 저절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 근대민족국가의 개입을 필요로 했다.’ ‘사회의 보호운동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 공동체의 당연한 대응이다.’ ‘경제란 사회의 일부분에 불과하다등등. 시장경제에 대한 폴라니의 이런 주장들은 7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유효하게 들린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래서 <거대한 전환>이 고전으로 불리는구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21세기 오늘날도 폴라니가 말하는 시장경제 유토피아에서 못 벗어난 건 아닐까하는 생각에 씁쓸하기도 하다.

 

나아가 폴라니는 시장경제에 관한 비판적 검토를 넘어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다룬다. 인간은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기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 존재다. 사회 실재 속에서 유기적 관계를 맺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자 운명이다. 이런 조건 속에서 인간은 자유를 추구한다. 인간은 사회를 버리고 자유만을 취하는 추상적 존재도, 자유를 버리고 영혼 없는 사회의 부속품이 될 수도 없다. 사회를 회복하며 자유를 꿈꾸는 것만이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가 될 유일한 길이다.

 

비록 책 속에서 폴라니는 마르크스주의를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으나, 나는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마르크스와 폴라니의 문제의식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폴라니가 거부했던 것은 사회실재를 보지 못하는 경제결정론이나 계급결정론이었지 인간해방의 전망이 아니었다. 복합사회 속에서 자유를 창조하는 일은 저절로 이뤄지지 않으며, 한두 명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이 과정에서 파시즘전쟁과 같은 사회 붕괴가 또 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만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다. 사회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은 어떠해야 하는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인간에 대한 전망이다. 정치는 그러한 전망을 제시하는 장소다. 새로운 자유를 실현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정치가 절실하다. 내가 사회주의 정치가 지금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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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은 계속된다 - 개정판 이후 오퍼스 2
노암 촘스키 지음, 오애리 옮김 / 이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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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관계를 맺는 나라들은, 우리나라의 기본적 가치관 속에 빼앗을 수 없는 인권의 개념이 들어 있다는 것과, 미국의 판단은 민주주의 실행을 인지할 수 있느냐의 여부와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헨리키신저의 중국이야기, 634p>

 

톈안먼 사태로 중미관계는 악화된다. 고위급 정부 교류 잠정중단, 군사 협력 중단, 군민 양용 장비 판매 중단, 세계은행 및 국제 금융기관의 신규 대출 반대 등 미국은 제재 조치를 단행한다. 중국이 보기에 국제 관계와 국내 이슈는 별개였다. 내정불가침은 기초적인 외교원칙이었다. 그러나 핑퐁 외교의 주역 중 한명이자 뛰어난 현실정치 감각을 자랑하는 키신저는 미국이 가진 특수성을 알아달라고 했다.

 

국제사회는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의 가치관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1

정말 키신저 말처럼 미국은 자유, 인권, 민주주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국가인가? 이미 30년이 다 된 책이지만 촘스키의 <정복은 계속된다>를 간략히 훑어보는 정도면 충분히 답이 될 거 같다.

 

1948년 국무부 정책 계획 국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현재와 같은 불균등한 부의 분배 형태를 그대로 지키고자 한다면 이제는 더 이상 인권, 생활수준 향상 등 비현실적인 애매모호한 목표와 이타주의, 세계 자선 등 이상적인 슬로건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보다 직접적인 권력 개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정복은 계속된다, 55p>

 

아시아, 중동,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현재의 불균등한 부의 분배 형태에 만족해야지 자국의 자원을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용해선 곤란했다. 미국에 자원과 투자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국내발전을 추구하는 민족적인 정권은 제거되어야 마땅했다.

 

1951년 이란에서 모사데크가 총리로 선출된다. 그는 앵글로-이란 석유회사를 국유화하여 국민경제를 발전시키고자 했다. 1953년 미국과 군부는 유혈사태를 일으켜 모사데크를 축출한다. 석유산업 국유화는 백지화되었다.

 

뉴욕타임스는 모사데크 정권 와해를 환영하며 자원을 많이 가진 저개발국들이 광신적 민족주의로 얼마나 큰 피해를 보았는가를 이제야 깨달음으로써 교훈을 얻게 됐다고 주장했다. <정복은 계속된다, 57p>

 

1954년 미국은 과테말라 최초의 민주 정부인 아르벤스 정권을 축출한다. 아르벤스가 소작농들을 위해 추진한 토지개혁이 다국적기업 유나이티드 프루트의 이권을 침해했기 때문이다. 이후 과테말라는 36년 간 군부독재에 시달린다. 이 기간 학살당한 인원만 20만 명에 이르렀다.

 

이란, 과테말라 미국이 주도한 정권교체의 기준은 자유, 인권, 민주주의가 아니라 해당국가가 미국에게 자원과 투자환경을 제공하는 봉사지역에 만족하는가 아니면 감히 경제적 민족주의를 추구하는가에 있었다.

 


#2

1949년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다. 민족주의 성향의 수카르노가 국가수반이 된다. 수카르노는 한때 군부와 힘을 합쳐 공산당의 토지개혁 운동을 제압한 적이 있어 미국은 그를 호의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수카르노는 대내적으론 공산당과 군부 세력의 균형을 추구하고 대외적으론 등거리외교와 비동맹 자주노선을 추구했다.

 

미국은 인도네시아의 등거리외교, 비동맹 자주노선과 같은 중립주의를 용납할 수 없었다. 미국은 우익정당들과 군부를 암암리에 지원한다. 196510월 수하르토 장군을 수카르노를 대통령궁에 연금하고 권력을 잡는다. 공산당과 동조자들에 대한 피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25만 명, 50만 명, 100만 명, 추정치는 제각각이지만 대량학살이 자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인도네시아 군부에 좌익인사 총살명단을 넘긴 사실은 가벼운 해프닝 취급을 받았다.

 

수하르토 군부는 국내 대량학살 뿐만 아니라 1975년엔 동티모르를 침공해 인종청소를 단행한다. 이런 만행들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서구가 자주 말하는 국제법, 침략자의 범죄, 이상주의에 대한 담론들은 자취를 감췄다. 미국, 영국, 일본, 호주 등은 동티모르 석유자원에 접근하게 되었고, 영국은 인도네시아와 대규모 무기판매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미국의 언론, 정치인, 지식인들은 수하르토를 열렬히 칭찬하기 바빴다.

1966년 중반 시사 주간지 타임, 수하르토 정권의 등장은 지난 수년간 아시아 뉴스 중 최고뉴스

196610월 국무부 차관보, “인도네시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제거된 것은 기념할 만한 사건

196611월 존슨 대통령, “오늘날 인도네시아 1억 국민은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자유를 누리고 있다.”

 

미국에게 수카르노가 공산주의자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또 수하르토 군부가 자국민을 학살하고 인종청소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감히 외교에서 자주권을 행사하는가, 아닌가, 여기에 더해 석유채굴권이나 무기계약권 같은 이권을 안겨주는가, 아닌가가 보다 중요했다.

 

경제적 민족주의를 추구하면 민주정부라도 축출하고, 외교에서 중립주의를 표방하면 독립영웅도 실각시키고, 대량학살을 자행해도 미국에게 이권을 안겨주는 독재정권을 지지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실용주의라 불리었다.

 

 

#3

자유, 인권, 민주주의는 미국의 중요한 가치지만 현실에선 실용주의가 필요한 법이다. 이런 실용주의 정신은 지정학에도 적용되었다. 평화보다는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불안정이 더 필요한 법이다.

 

1949년 미 중앙정보국은 유럽에서 진짜 문제는 소련과의 협력 관계를 통한 독일의 안정화가 아니라 독일에 대한 (미국의) 장기적 통제라고 결론 내렸다. 따라서 독일에서 소련군이 철수하는 건 당연하지만 미군과 영국군이 철수 할 수는 없다. 미국에게는 독일을 포함한 유럽이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는 것보다는 대립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 더 유리했다.

 

19495월 상원 외교위원회 실무 회의에서 딘 애치슨 국무장관은 소련에 대한 비타협 원칙을 강경하게 표명했다. 한 상원위원이 미국의 이런 정책으로 냉전체제가 고착화될 우려를 표하자, 애치슨은 정부의 목적은 냉전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주도하에 서구를 통합하는 것이라며 반박한다.

 

반소주의는 이런 미국의 입장을 정당화해주었다. 소련이 유럽평화에 관심을 보이는 건 새로운 기회가 아닌 안보 위기일 따름이었다. 왜냐하면 미국과 영국은 영토 확장의 야욕이 없지만 소련은 영토 확장의 야욕이 없다는 걸 한 번도 입증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중 잣대는 미국이 해외 군사기지를 갖는 건 되지만, 소련은 안 된다는 논리로 이어졌다.

 

미국은 독일통일보단 독일분단을, 유럽의 평화보단 유럽의 불안정을, 냉전완화보단 냉전심화를 원했다. 미국의 손에서 벗어난 안정보단 미국이 통제하는 불안정이 더 중요했다. 도미노 이론, 소련의 영토야욕, 공산화 위험 등 반공주의는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예외주의를 정당화할 따름이었다. 이처럼 평화보단 적대를 추구하는 미국의 정책은 안보정책이라 불리었다.

 

 

#5

키신저는 미국이 자유, 인권,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매여 있는 특수함을 알아달라고 한다. 키신저는 <중국이야기>에서 중국이 청조 때부터 마오쩌둥, 덩샤오핑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온 중화주의에 대해선 곧잘 말하지만, 미국의 예외주의, 일방주의, 제국주의는 보지 못한다.

 

미국 주도의 질서를 거부하는 국가들에겐 자유, 인권, 민주주의를 들이밀며 이것이 미국 외교정책의 원칙이라 근엄하게 말하지만, 한편에선 민주정부를 전복하고 군부독재를 지원하면서 실용주의라는 이름 뒤에 숨는다. 그 예로 미국은 아이티에서 뒤발리에 독재기간 동안 각종 인권요청은 무시했지만, 아이티 민중들에 의해 아리스티드가 당선되자 갑자기 아이티 인권문제를 주요 의제로 삼았다.

 

이란, 과테말라, 인도네시아, 브라질, 칠레 등등 미국의 대외정책은 자유, 인권, 민주주의의 논리가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특권을 위협하는 경제적 민족주의, 등거리 외교 따위의 중립주의를 철저히 탄압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있었다. 다시 말해 경제적 자주권과 외교적 자주권을 유린하는 것이 곧 미국의 대외정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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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 보낸 편지들 레닌 전집 65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지음, 이정인 옮김 / 아고라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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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전집 읽기 065<먼 곳에서 보낸 편지들>

레닌 전집을 최근 다시 읽는다. 군대 가기 전에는 자주 읽었으니 꼬박 18개월 만이다.

<먼 곳에서 보낸 편지들>은 레닌 전집 065권으로 19171월부터 레닌이 러시아로 귀국하기 전까지 글을 담고 있다. 내용 정리와 평가, 시대적 배경설명 등 옮긴이 후기가 워낙 잘 되어있지만 공부한다는 차원에서 내용과 감상을 남긴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부는 사회주의 진영 내 사회평화주의라는 새로운 조류와의 투쟁이 주된 내용이고 후반부는 러시아 2월 혁명에 관한 레닌의 입장이다. 중간에 젊은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1905년 혁명에 대한 강연>도 있는데 꽤 흥미롭다. 여기선 사회평화주의와의 논쟁, 그리고 2월 혁명에서 자유주의적 편견에 대한 반박을 주로 살펴보고자 한다.

 

 

사회평화주의에 맞선 투쟁

19147월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 장기화 되면서 1916년 말 유럽에서 종전 협상 가능성이 대두된다. 독일과 러시아 간 단독 강화 협상 이야기가 돌고 독일은 19161212일 연합국 측에 평화 교섭을 제안하는 외교 공문을 보낸다. 우드로 윌슨 미 대통령도 외교 공문을 통해 교전국들에게 평화 조건을 구체적으로 밝혀달라고 요청한다.

 

이런 정세는 사회주의 운동 내부에도 영향을 끼친다.

19161122일 이탈리아 사회당 원내 의원단은 정부가 유용한 교섭을 도모하라고 촉구하는 동의안을 의회에 올린다. 프랑스 사회당과 프랑스 노동총동맹은 12월에 대회를 열어 평화 결의안을 통과시킨다. 191717일에는 카우츠키 및 독일 사회민주당 일부가 평화주의 선언문을 발표한다.

 

레닌은 당시 정세를 제국주의 전쟁에서 제국주의 평화로 전환되는 시기로 규정한다. 제국주의 열강들의 평화조약은 곧 제국주의 약탈품 분배다. 제국주의 정부들은 민주적인 평화, 약소민족들의 해방, 군비 축소 등에 관한 새빨간 거짓말로 약탈품 분배라는 진실에서 인민을 기만하려 한다.

 

이런 정세에서 사회주의 내 평화주의 조류는 실천적으로 제국주의 정책과 제국주의 평화를 은폐하며, 그것들을 폭로하는 대신 미화하는 데 봉사한다고 레닌은 비판한다. 그는 부르주아 개량주의자가 아닌 진짜 사회주의자라면 진실을 은폐하는 평화주의가 아니라 제국주의적 평화의 본질을 폭로하고 이에 맞서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렇게 레닌이 사회평화주의자들의 오류를 폭로하고 논쟁하는 과정 중 몇몇 대목들은 꽤나 인상 깊다.

사회평화주의자들은 지금은 전시상황이라 정부에 반대하는 것이 합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레닌은 그런 상황은 진실을 숨기는 근거가 아니라 비합법 조직과 언론을 건설해야 할 근거라고 답한다.

 

사회평화주의자들은 개량은 혁명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제국주의적 평화라도 국제법, 국비지출 등에 일정한 개선을 가져오는 평화국면이 혁명운동 발전의 한 국면이라는 것이다. 레닌은 물론 개량이 혁명을 배제하지 않는 것은 맞지만 문제는 사회주의자들이 혁명 활동을 개량 활동으로 바꿔치기하는 점에 있다고 말한다. 사회평화주의자들은 개량의 거부냐 아니냐 하는 식으로 문제를 제기하지만, 레닌은 성공하지 못할 경우 부산물로 개량을 낳는 혁명적 투쟁이냐, 아니면 개량과 개량의 약속에 대해 떠들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냐가 진짜 문제라고 답한다.

 

사회평화주의자들은 레닌을 비롯한 국제주의자들이 수적으로 너무 미미해서 이들의 활동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레닌은 프랑스 사회당, 독일 사회민주당 주류들의 활동이야말로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한다고 반박한다.

 

진정한 혁명적 국제주의자들이 수적으로 미미하다? 허튼 소리 마시오! (중략) 혁명가들의 숫자는 극히 미미했습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자기 계급의 1만분의 1, 심하게는 10만 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작은 무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수년 후, 이 작은 무리가, 이른바 미미하기 짝이 없는 소수가 대중을,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을 이끌었습니다. ? 이 소수야말로 진정으로 이들 대중의 이해를 대변했기 때문에, 다가오는 혁명을 믿었기 때문에, 혁명에 기꺼이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59p)

 

사회평화주의자는 도대체 언제, 정확히 어떤 순간에 어떤 혁명적 행동을 할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따진다. 레닌은 날짜와 성공 확률이 미리 정해진 혁명이란 결코 없다고 말한다. ‘구체적 상황에 맞게 혁명 투쟁을 이끌지 못하는 당을 어떻게 그런 투쟁이 가능한 당으로 개조시킬 것인가.’ 이것이 지금 논쟁의 핵심임에도 사회평화주의자들은 이를 얼버무리고 쟁점을 흐린다고 레닌은 비판한다.

 

 

러시아 2월 혁명

레닌은 191732일에 러시아 2월 혁명의 소식을 접한다. 레닌은 취리히에서 단편적인 정보들을 접하며 2월 혁명에 대한 입장을 내놓는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에 관한 <테제초고>, 국내 프라우다에 보내는 <먼 곳에서 보낸 편지들>이 바로 그것이다.

 

레닌의 입장을 요약하면, ‘노동자계급은 새로운 정부를 지지해서는 안 된다,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학하는 두 번째 단계로 발전해야 한다, 이를 위해 소비에트의 강화 및 확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무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옮긴이 후기 중)

 

혁명에 관한 레닌의 분석과 입장은 레닌전집 066<4월 테제>을 읽고 더 정리하도록 하고, 여기선 흥미롭게 읽었던 대목하나만 소개하고자 한다. 레닌이 영국신문 더 타임스316일자 기사에서 드러난 영국기자의 각종 편견과 왜곡을 집는 내용이다. 사회주의와 혁명에 관한 부르주아 지식인의 편견은 한 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별 다를 게 없다.

 

영국기자는 (구 차르체제의) 가장 온건한 그룹이 아닌 사회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으면 러시아가 무정부 상태에 빠질 거라고 우려를 표한다. 사회주의자들은 공화국 건설을 말하지만 질서 있는 정부를 세울 능력은 없기 때문이다.

 

레닌은 (구 차르체제의) 온건한 사람들, 즉 군주제를 지지하는 소수의 자본가, 지주가 혁명시기에 권력을 잡기 위해선 이렇게 무정부 상태에 빠질 것이라는 둥 질서 있는 정부가 불가능할 것 이라는 둥 인민들을 기만할 수밖에 없다고 반박한다. 노동자 공화국이 군주제보다 더욱 질서 있는 정부가 될 것이다.

 

무정부 상태를 우려하는 온갖 외침들은 전쟁과 전시 공채를 통해 이익을 챙기기를 바라며 인민에 맞서서 군주제를 부활시키고 싶어 하는 자본가들의 이기적인 이해를 감추고 있을 뿐이다. (285p)

 

영국기자는 케렌스키나 치헤이제가 사회민주당의 원론주의자들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우려를 표한다. 이 기자에게 공화국, 평화, 차르타도, 빵을 주장하는 볼셰비키들은 선동주의자, 원리주의자일 뿐이다. 레닌은 말한다. 그렇다면 왜 이들이 사회민주당 원론주의자들을 고려할 수밖에 없나? 그것은 볼셰비키가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지난날 계속해서 노동계급과 함께해서 대중적 영향력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인민이 먹을 빵과 평화를 달라는 것은 선동이고, 구치코프와 밀류코프에게 장관 자리를 주는 것은 질서인 것이다. 귀에 익은 오래된 이야기 아닌가! (286p)

 

(*케렌스키는 온건 사회주의자로 임시정부 법무부 장관, 치헤이제는 멘셰비키 의원단 대표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 구치코프는 대자본가, 밀류코프는 우익정당인 입헌민주당 지도자)

 

이 외에도 두마 임시위원회는 전국을 대표하지만 소비에트는 계급 이해만 대표할 뿐이다.’ ‘두마 임시위원회의 온건한 조치덕분에 내전을 피했다.’ 등등 영국기자는 러시아 혁명에 각종 우려를 표한다.

 

레닌이 지난 몇 년간 고집스럽게 주장한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슬로건은 비웃음을 받았지만 러시아에서 점점 현실로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2월 혁명은 급박하게 돌아간다. 노동자와 병사는 구 차르체제를 무너뜨렸지만 혁명의 열매는 노동자, 병사의 손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멘셰비키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이 자본가와 지주계급의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권력을 넘기는데 합의한다. 사회주의자 케렌스키는 임시정부에 입각한다. 임시정부는 공화국, 8시간 노동제, 토지개혁 등에 대해선 함구한 채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힌다.

 

혁명의 시계가 촉박하게 재깍거린다. 레닌과 일행은 수소문 끝에 독일정부가 제공하는 밀봉열차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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