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 전쟁의 기억과 분단의 미래
브루스 커밍스 지음, 조행복 옮김 / 현실문화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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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읽기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 근현대사와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연구해온 학자로 국내에선 <한국전쟁의 기원>이라는 저서를 통해 많이 알려졌다.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인 지난 2010년 저자는 새롭게 기밀 해제된 자료를 추가하여 이 책을 출간했다.

 

커밍스는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규정한다. 일제강점기(1910~45) 동안 형성된 계급분열과 민족갈등, 더 구체적으로는 1930년대 만주에서 벌어진 항일세력부역세력간 갈등이 내전의 기원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한국전쟁의 성격을 무엇으로 규정하는가? 분단국가에서 사는 우리에게 이 주제는 대단히 민감한 주제다. 각 이념마다, 국가마다 이 전쟁을 부르는 명칭도 제각각이다. 남한은 주로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북한정권이 탱크를 몰고 625일 새벽 기습 남침한 사건으로써 ‘6.25전쟁이라 부른다. 북한은 한반도 남쪽을 무단 점거한 미 제국주의에 맞선 전쟁이라는 의미로 조국해방전쟁이라 부른다. 중국은 항미원조미국은 한국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그런데 태평양전쟁이나 베트남전쟁과 달리 미국에서 한국전쟁은 잘 기억되지 않는 잊힌 전쟁이다. 커밍스는 이 책을 미국인이 미국인을 위해 쓴 한국전쟁에 관한 책이라고 소개한다. 한국전쟁의 성격 규정부터 전쟁당시 미국이 가졌던 반공주의적, 인종주의적 편견들, 한반도에서 미국이 행한 폭력들, 그리고 한국전쟁이 미국사회에 남긴 막대한 영향까지 커밍스는 망각된 기억 속에서 진실을 끄집어내어 미국인들에게 보여준다.

 

미국학자가 미국인을 위해 쓴 이 책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분단국가라는 특수성은 일상적인 전쟁가능성을 머리에 이고 산다는 걸 의미한다. 나와 상관없는 누군가의 결정에 의해 개인의 운명이 송두리째 파괴될 수도 있고 실제로 70년 전 한반도가 그랬다. 전쟁을 내포한 만성화된 위기를 끊어내기 위해선 이 위기를 초래한 기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거리를 두고 위기의 기원을 고민하게 해줄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강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내용과 감상을 간략히 정리해보았다.

 

 

한국전쟁의 전개 과정

커밍스는 1장에서 한국전쟁의 전개과정을 설명한다.

625일 새벽3~4시경 웅진과 철원에서 전투가 시작된다. 조선인민군 제3사단과 제4사단이 기갑여단을 동반하여 서울로 진격한다.

626일 오후 한국군 제2사단의 병력 보강이 늦어지며 전투가 실패한다. 의정부가 뚫린다.

627일 남한군 사령부 전체가 서울 남쪽으로 이전한다.

628일 남한군 사단들도 사령부를 따라 남쪽으로 철수하고 한강대교를 폭파한다.

 

특별열차를 타고 대전으로 피신한 이승만은 다시 목포로, 부산으로 향한다. 6월 말이 되자 남한군 병력 절반은 사망했거나 포로가 되었다. 남한이 이처럼 단시간에 무너지자 미국의 무력개입이 촉발되었다. 미국의 무력개입은 당시 국무장관인 딘 애치슨이 주도한다. 간략히 살펴보면 이러하다.

 

624일 밤, 애치슨은 트루먼에게 전투사실을 알리고 이를 국제연합에서 다루기로 결정한다.

625일 저녁, 백악관 긴급회의에서 애치슨은 남한에 군사지원을 늘리고 제7함대를 대만에 배치해 공산주의자들의 침공을 방지하자고 주장한다.

626일 오후, 애치슨은 홀로 미국 공군과 해군을 한국전쟁에 투입하는 결정을 입안하고, 그날 저녁 백악관은 이를 승인한다.

 

애치슨은 미국의 무력개입을 결정했다. 무슨 이유로? 첫째, 북한의 침공은 미국의 위신에 도전한 것이다. 둘째, 일본을 중심으로 동북아시아와 중동을 연결하는 대 초승달전략에 따라 일본 산업을 부흥시켜야 한다. 즉 미국의 위신 그리고 일본의 발전, 이 두 가지가 애치슨의 결정배경이었다.

 

630, 전선을 방문한 맥아더의 판단으로 지상군 파견이 결정되었다. 맥아더가 보기에 한국군은 전투를 포기하고 꽁무니를 빼기만 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북한군에 대해선 오판했다. 맥아더는 처음에 제1기병사단만 있으면 북한군을 격퇴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 뒤에는 2개 사단이 필요하다 했고, 7월에 들어서는 최소 4개 사단 이상, 그리고 한 주 뒤에는 8개 사단을 요청했다. 9월이면 전투훈련을 받은 가용 부대는 모두 한국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미군은 아시아의 농민군 따위는 쉽게 이길 것이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병력에서 우위를 차지했지만 연달아 패배했다. 8월 초 제1해병여단이 투입으로 겨우 방어선이 낙동강에서 고착된다. 8월 말 북한군은 부산 방어선을 따라 마지막 공세에 착수하나 국제연합군은 이를 간신히 저지한다.

 

9월 중순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고 서울을 차지한다. 10월 초 미국은 38도선 너머로 공격을 가하기로 결정한다. 북한 정규군은 계속 물러나며 국제연합군을 깊숙이 유인한다. 1124일이면 국제연합군은 압록강에 도달한다. 이때까지도 맥아더는 중국의 대규모 공세 작전을 눈치 채지 못한다. 그리고 3일 뒤 중국과 북한의 합동공세에 연합국은 대패한다. 국제연합국은 계속 밀려나 12월 말이면 다시 서울이 함락될 지경에 이른다.

 

맥아더는 퇴각하면서 북한 영토의 모든 통신수단과 모든 시설, 공장, 도시, 마을을 파괴하라. 만주 국경부터 파괴를 시작하여 남쪽으로 점차 확대해야한다.”고 명령한다.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북한영토 대부분이 황폐화된다. 트루먼은 기자회견에서 핵무기도 사용할 수 있다고 언급한다. 1951년 봄 38도선을 중심으로 전선은 고착된다. 정전논의가 시작되나 전쟁포로 처리문제가 길어지며 1953727일이 돼서야 미국, 중국, 북한 세 나라가 휴전협정에 서명하게 된다.

 

 

한국전쟁은 단지 내전일 뿐인가?

전쟁을 누가 먼저 일으켰는가?”를 중심으로 한국전쟁을 바라보는데 익숙한 우리에게 전쟁이 왜 일어났는가?”라는 상식적인 질문조차 다소 도발적으로 보인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성격을 내전으로 규정하며 전쟁의 사회, 정치적 기원을 1930년대 만주에서 항일세력일제 및 부역세력간 갈등에서 찾는다. 해방 후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하던 세력이 북한지도부를 이루고 반대로 일제부역자들이 남한 정권과 군부의 핵심을 이룬다. 그는 이들 사이의 내전은 불가피했다고 한다. 마치 미국 남북전쟁처럼 상호 대립하는 두 사회체제는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 경험에서 비롯된 민족적, 계급적 분열이 낳은 내전이라는 설명에서 추가로 덧붙여야 할 부분이 있다.

 

진정한 비극은 전쟁 그 자체가 아니었다. 순전히 한국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내전이었다면 식민주의와 민족 분단, 외세 개입으로 초래된 엄청난 긴장을 해결했을지도 모른다. 비극은 전쟁이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전 상태로 돌아갔을 뿐이며, 그저 휴전을 통해 평화를 유지했을 뿐이다.” (72p)

 

해방 후 38도선 분할, 미군정시기 그리고 미국의 무력개입은 한국전쟁의 성격을 보다 복잡하게 만든다. 미국의 38도선 분할이 없었다면? 미군정에 의해 일제 부역세력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미국이 무력개입을 하지 않았다면? 무력개입을 했더라도 38도선을 지키는 것에 만족했다면?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하는 매순간마다 이면에는 미국이 있었다.

 

1945810일 미국 육군부에서 일했던 존 매클로이는 딘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을 불러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들인 뒤 한국을 어디에서 분할해야 할지를 물었다. 이들은 38도선을 선택했다. 소련은 이 분할을 조용히 수용했다.

 

194598일 존 리드 하지가 지휘하는 제24군단이 한국에 상륙한다. 이들은 한국의 지도자를 물색하고 간판인물로 이승만을 내세운다. 미국은 일제시절 통치 구조를 부활시켰다. 일제에 협력하여 얻은 지위와 부를 지키려는 극우파들이 미군정이 재건한 경찰, 군대 등에 요직을 차지한다.

 

미군정은 극우파를 내세우며 한편으론 좌익세력을 탄압한다.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는 해방 후 자체로 치안과 행정을 유지해갔다. 삼척 같은 곳에선 일본이 남기고 간 공장을 조선인 기술자들과 노동자들이 접수하여 스스로 관리했다. 정치와 경제 영역에서 조선인들이 인민위원회’ ‘자치위원회등을 통해 해방 후 자주 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를 부정하고 관련인물들을 체포한다.

 

미국의 한국정책은 공산주의에 맞선 봉쇄전략 그리고 일본의 산업부흥을 위한 역코스와 맞물려있었다. 제주도 4.3사건과 여수반란 그리고 한국전쟁까지 연이은 비극들은 이러한 미국의 전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요컨대 이승만과 부역세력에 맞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남한의 대유격전 부대를 조직하고, 장비와 정보를 제공하고, 작전을 세워주고 때로는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시작하기 전에 이미 남한에선 최대 10만 명이 정치적 폭력으로 살해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학살은 보도연맹학살 등 한국전쟁 후에도 계속 일어난다.

 

한국전쟁에 개입한 미국은 38도선을 복구하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무력개입을 주도했던 애치슨은 이번엔 38도선을 넘어 반격하는 것을 주도한다. 그러나 이 반격은 중국군의 개입으로 저지되고 미국은 민간인을 비롯한 북한 땅의 모든 걸 초토화하는 공습으로 대응한다.

 

마을과 들판 곳곳에서 주민들은 불시에 습격을 받아 네이팜탄이 터질 때 취했던 자세 그대로 죽어있었다. 한 남자는 자전거에 올라탈 참이었고, 50명의 소년과 소녀는 고아원에서 놀고 있었으며....” (65p)

 

미군은 한국전쟁에서 네이팜판을 포함해서 총 667557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태평양전쟁 내내 미국이 503000, 1942~45년 미군과 영국 공군이 독일에 쓴 폭탄이 120만 톤이었다. 북한의 피해규모는 독일과 일본보다도 컸다. 북한의 민간인 사망자 대부분은 이러한 미군의 공중폭격에 의해 발생했다.

 

한번 정리해보자. 커밍스는 한국전쟁을 일제 시절에서 비롯된 민족적, 계급적 분열에서 비롯된 내전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설명을 덧붙여야한다. 해방 후 민중들이 스스로 자주 국가를 설립하고 일제시절을 청산하려는 노력은 미국의 개입으로 저지된다. 일제 부역세력은 다시금 기회를 얻게 된다. 미국은 봉쇄전략의 일환으로 일제 부역세력과 함께 한국의 좌익세력을 탄압하고 이는 민간인 학살로 이어진다. 이후 한국전쟁에 미국이 개입하고 38도선을 넘어 반격하면서 전쟁의 성격은 제한적인 내전을 벗어나게 된다. 대규모 공중 폭격과 38도선에서 고착된 전선을 중심으로 진행된 고지전은 의미 없는 희생만을 늘려갔다.

 

수치마다 각이하지만 3년간의 전쟁으로 약 3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당시 한반도 전체 인구의 약 1/10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 수치는 전쟁의 끔찍함과 참혹함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이 참혹함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한국전쟁은 사망자 중 80%가 민간인으로 어떤 현대전보다 민간인 희생 비율이 높다. 북한에서는 200만 명, 남한에서는 100만 명이 사망했다. 북한의 민간인 사망자 대부분이 미국의 공중폭격에 의한 것이었다면, 남한에서 희생된 100만 명은 대부분 보도연맹학살같은 민간인 학살에 의한 것이었다.

 

한국전쟁은 내전인가? 이 규정은 한국전쟁의 한 측면만을 보여줄 따름이며 해방부터 한반도에 등장한 미국이라는 주요 행위자의 역할을 간과하게 만든다. 미군정시기 일제부역세력의 부활, 전쟁의 장기화, 미군의 무차별적 공습 그리고 부활한 일제부역세력의 민간인 학살. 이 사실들은 1950625일 새벽4시 북한군이 탱크를 들이밀었다든가, 195114일 중국군의 공세로 서울을 내주었다든가 하는 사건들보다 한국전쟁의 성격에 관해서 더 많은 점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한국전쟁 오늘날 제국을 만들다

한국전쟁이 미국 내부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커밍스는 8장에서 이 내용을 상세하게 다룬다. 더 많이 기억되고 회자되는 건 베트남전쟁이지만 실제 미국의 외교정책이나 군사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건 한국전쟁이라는 것이다.

 

한국전쟁은 미국이 그 이전과는 매우 다른 나라로 바뀌는 계기였다. 해외에 수백 개의 상설 군사기지를 갖추고 국내에는 대규모 상비군을 갖춘 영원한 안보국가가 된 것이다.” (281p)

 

트루먼 행정부 국무장관인 조지마셜과 차관인 딘 애치슨은 미국의 정책 방향을 조정한다. 두 사람은 일본 경제를 재건하고 남한에 공산주의에 맞선 봉쇄정책을 적용한다는 점에서 한반도의 가치를 재평가했다. 조지마셜은 애치슨에게 분리된 남한과 일본 경제를 연결할 계획을 세우라고 지시한다.

 

애치슨은 소련을 봉쇄하기 위해 소련 주변부에 친미정권을 배치하고자 했다. 또 분할된 한국이 일본의 부흥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봉쇄정책을 위해 애치슨은 상원에 자금을 요청한다. 국무부는 6억 달러를 요구했지만 의회는 주춤했다. 그리스와 터키를 위해 투입된 자금도 25000만 달러 남짓이었기 때문이다.

 

1950414일 국가안전보장회의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국가안전보장회의 문서 제68(NSC-68)’를 제출한다.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한 군비증대, 수소폭탄 개발, 동맹국에 군사 지원 등의 내용이 남긴 비밀 정책문서였다. 이 문서는 한국전쟁 덕분에 최종적으로 승인되게 된다. 애치슨은 이를 두고 “(한국전쟁은) 발발하여 우리를 구한위기라고 말한다.

 

이 말로 그가 뜻한 바는 한국전쟁 덕분에 국가안전보장회의 문서 제68호가 최종적으로 승인되었고, 미국 국방비를 네 배로 늘리는 예산안이 의회를 통과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후 내내 미국의 세계적 영향력의 근간이었던 엄청난 해외 군사기지 체계와 이에 장비를 공급할 국내 군산복합체의 동인이 된 것도 제2차 세계대전이 아니라 한국전쟁이었다.” (285p)

 

한국전쟁 이전까지 미국인들은 대규모 상비군 유지를 지지하지 않았다. 군대는 전쟁 수행과 관련되었고 전쟁이 끝나면 축소되었다. 예를 들어 1840년대 멕시코와 전쟁 때 5만 명인 군대는 전쟁 이후 1만 명으로 축소됐다. 남북전쟁 때 수백만 규모의 시민군도 19세기 말이 되자 25000명 규모의 경찰대로 줄어들었다. 당시 프랑스가 50만 명, 독일이 41만 명, 러시아가 76만 명 규모의 병력을 보유했다.

 

20세기 초에도 이런 경향은 계속되었다. 전간기에는 135000명 규모였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군대는 급격히 줄어든다. 태평양전쟁 때 1100만 명 이상이 자발적으로 입대했지만 1948년이면 육군 병력은 55만 명, 해군은 49만 명 정도로 축소된다. 당연히 국방예산도 축소한다. 덩달아서 항공산업 판매고도 줄어든다. 미국은 다시 서반구 내 고립으로 회귀하는 듯했다.

 

봉쇄정책도 군사적 측면보단 외교와 경제 수단을 통한 서유럽과 일본의 부흥을 추구하는 제한적인 것에 가까웠다. 당시 입안자인 조지케넌은 봉쇄정책을 기본적으로 외교적이고 정치적인 과제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상황은 반전된다. NSC-68호가 승인되고 조지케넌의 제한적인 봉쇄가 애치슨의 군사적 케인스주의의 형태를 띤 봉쇄로 바뀌었다. 전쟁은 일본과 미국 경제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특히 미국의 방위산업계, 항공우주산업이 호황을 누린다.

 

새로운 제국이 탄생했다. 미국 역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세계 도처에 병력이 상주하는 수많은 군사기지들이 생겨나고 엄청난 규모의 방위산업들이 여기에 연결되었다. 막대한 국방예산과 대규모 상비군 그리고 전세계적 관여로 정책의 방향이 틀어졌다. 미국은 세계의 경찰국가 기능을 자처하게 된다. 그러나 애치슨이 주도한 이 정책은 결코 미국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미국은 한국과 베트남 전쟁에서 실패했고, 이라크에선 아직도 발목이 잡혀있다. 커밍스는 이를 이렇게 평가한다.

 

미국은 1945년 이래로 어느 곳에서도 출구전략을 갖추지 못했다. 예외가 있다면 내쫓기거나(베트남) 떠나라고 요구받은(필리핀) 경우뿐이다. 다시 말해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0년째에 접어든 지금도 일본과 한국, 독일에 주둔해 있다. 정책입안자들(거의 언제나 군대 경험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민간인들로 애치슨이 전형적인 인물이다)은 미국을 전쟁으로 끌고 들어가지만 빼낼 수 없으며, 곧이어 국방부가 책임을 넘겨받아 기지를 설치한다. 그러면 전체 기획은 다른 모든 나라들에 비해 압도적인 국방 예산으로 가동되는 영구 작동 기계가 된다.” (313p)

 

미국은 한반도의 운명을 뒤바꿨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가 영구 작동하는 전쟁기계로 전락했다.

 

 

감상정리

커밍스는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저지른 일들을 조목조목 짚는다. 그의 의도는 단순히 미국을 가해자로 규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진실과 화해를 말한다. 남한에서 군사독재가 끝나고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진실과 화해를 위한 발걸음을 때었듯 미국도 지난날 메카시즘의 광풍에 의해 가려졌던 진실을 바라보는 것을 통해 화해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책의 구절을 다소 길지만 인용해본다.

 

여러 조사의 목적은 책임을 묻거나 냉전의 싸움을 다시 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과 남한 사이의 화해를 도모하고 과거에 적이었던 자들을 이해할 수 있는 인식과 태도를 얻는 것이었다. 이해란 공감이 아니고 감정이입도 아니며, 단지 적의 행동을 이끈 원칙들을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그 원칙들이 용납하기 어렵다고 해도, 역사적으로 그 적에게 일어난 일에 관한 나의 지식과 크게 상관없다. 결국 20세기에 일본이 한국을 점령한 이후의 그 모든 피와 고통의 책임을 어느 한 편에 돌리는 것(대다수 미국인들이 그렇게 한다)은 지극히 복잡하고 냉혹하고 심히 잔인한 역사를 이데올로기라는 바늘구멍을 통해 보는 것이다.” (318p)

 

커밍스는 책 서두에서 한반도 핵 위기를 이렇게 말한다. “미국과 북한이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한국전쟁을 끝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외교적으로 승인하라는 요구에 응한다면, 핵 위기는 빠르게 끝날 것이라고 믿는다.” 서로가 화해하고 평화협정을 이루면 된다는 이 간단한 해법은 분단이 되고 7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다. ‘20006.15공동선언이나 2018‘4.27 판문점 선언때처럼 해법에 한걸음 다가간 적은 있지만 곧이어 뒷걸음치는 일이 반복되었다. 커밍스와 조금 결이 다르지만 이렇게 생각한다. 한반도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길은 2000년과 2018년에 그랬듯이, 민주주의와 새로운 시대를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이 열망이 그간의 편견과 오해를 넘어 남북이 손을 잡고 화해하는 것까지 이어져야만 가능하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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