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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은 계속된다 - 개정판 ㅣ 이후 오퍼스 2
노암 촘스키 지음, 오애리 옮김 / 이후 / 2007년 2월
평점 :
미국과 관계를 맺는 나라들은, 우리나라의 기본적 가치관 속에 빼앗을 수 없는 인권의 개념이 들어 있다는 것과, 미국의 판단은 민주주의 실행을 인지할 수 있느냐의 여부와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헨리키신저의 중국이야기, 634p>
톈안먼 사태로 중미관계는 악화된다. 고위급 정부 교류 잠정중단, 군사 협력 중단, 군민 양용 장비 판매 중단, 세계은행 및 국제 금융기관의 신규 대출 반대 등 미국은 제재 조치를 단행한다. 중국이 보기에 국제 관계와 국내 이슈는 별개였다. 내정불가침은 기초적인 외교원칙이었다. 그러나 핑퐁 외교의 주역 중 한명이자 뛰어난 현실정치 감각을 자랑하는 키신저는 미국이 가진 특수성을 알아달라고 했다.
‘국제사회는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의 가치관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1
정말 키신저 말처럼 미국은 자유, 인권, 민주주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국가인가? 이미 30년이 다 된 책이지만 촘스키의 <정복은 계속된다>를 간략히 훑어보는 정도면 충분히 답이 될 거 같다.
1948년 국무부 정책 계획 국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현재와 같은 불균등한 부의 분배 형태를 그대로 지키고자 한다면 이제는 더 이상 인권, 생활수준 향상 등 비현실적인 애매모호한 목표와 이타주의, 세계 자선 등 이상적인 슬로건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보다 직접적인 권력 개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정복은 계속된다, 55p>
아시아, 중동,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현재의 불균등한 부의 분배 형태에 만족해야지 자국의 자원을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용해선 곤란했다. 미국에 자원과 투자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국내발전을 추구하는 민족적인 정권은 제거되어야 마땅했다.
1951년 이란에서 모사데크가 총리로 선출된다. 그는 앵글로-이란 석유회사를 국유화하여 국민경제를 발전시키고자 했다. 1953년 미국과 군부는 유혈사태를 일으켜 모사데크를 축출한다. 석유산업 국유화는 백지화되었다.
『뉴욕타임스』는 모사데크 정권 와해를 환영하며 “자원을 많이 가진 저개발국들이 광신적 민족주의로 얼마나 큰 피해를 보았는가를 이제야 깨달음으로써 교훈을 얻게 됐다”고 주장했다. <정복은 계속된다, 57p>
1954년 미국은 과테말라 최초의 민주 정부인 아르벤스 정권을 축출한다. 아르벤스가 소작농들을 위해 추진한 토지개혁이 다국적기업 유나이티드 프루트의 이권을 침해했기 때문이다. 이후 과테말라는 36년 간 군부독재에 시달린다. 이 기간 학살당한 인원만 20만 명에 이르렀다.
이란, 과테말라 미국이 주도한 정권교체의 기준은 자유, 인권, 민주주의가 아니라 해당국가가 미국에게 자원과 투자환경을 제공하는 봉사지역에 만족하는가 아니면 감히 경제적 민족주의를 추구하는가에 있었다.
#2
1949년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다. 민족주의 성향의 수카르노가 국가수반이 된다. 수카르노는 한때 군부와 힘을 합쳐 공산당의 토지개혁 운동을 제압한 적이 있어 미국은 그를 호의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수카르노는 대내적으론 공산당과 군부 세력의 균형을 추구하고 대외적으론 등거리외교와 비동맹 자주노선을 추구했다.
미국은 인도네시아의 등거리외교, 비동맹 자주노선과 같은 중립주의를 용납할 수 없었다. 미국은 우익정당들과 군부를 암암리에 지원한다. 1965년 10월 수하르토 장군을 수카르노를 대통령궁에 연금하고 권력을 잡는다. 공산당과 동조자들에 대한 피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25만 명, 50만 명, 100만 명, 추정치는 제각각이지만 대량학살이 자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인도네시아 군부에 좌익인사 ‘총살명단’을 넘긴 사실은 가벼운 해프닝 취급을 받았다.
수하르토 군부는 국내 대량학살 뿐만 아니라 1975년엔 동티모르를 침공해 인종청소를 단행한다. 이런 만행들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서구가 자주 말하는 국제법, 침략자의 범죄, 이상주의에 대한 담론들은 자취를 감췄다. 미국, 영국, 일본, 호주 등은 동티모르 석유자원에 접근하게 되었고, 영국은 인도네시아와 대규모 무기판매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미국의 언론, 정치인, 지식인들은 수하르토를 열렬히 칭찬하기 바빴다.
1966년 중반 시사 주간지 『타임』, 수하르토 정권의 등장은 “지난 수년간 아시아 뉴스 중 최고뉴스”
1966년 10월 국무부 차관보, “인도네시아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제거된 것은 기념할 만한 사건”
1966년 11월 존슨 대통령, “오늘날 인도네시아 1억 국민은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자유를 누리고 있다.”
미국에게 수카르노가 공산주의자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또 수하르토 군부가 자국민을 학살하고 인종청소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감히 외교에서 자주권을 행사하는가, 아닌가, 여기에 더해 석유채굴권이나 무기계약권 같은 이권을 안겨주는가, 아닌가가 보다 중요했다.
경제적 민족주의를 추구하면 민주정부라도 축출하고, 외교에서 중립주의를 표방하면 독립영웅도 실각시키고, 대량학살을 자행해도 미국에게 이권을 안겨주는 독재정권을 지지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실용주의’라 불리었다.
#3
자유, 인권, 민주주의는 미국의 중요한 가치지만 현실에선 ‘실용주의’가 필요한 법이다. 이런 실용주의 정신은 지정학에도 적용되었다. 평화보다는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불안정이 더 필요한 법이다.
1949년 미 중앙정보국은 “유럽에서 진짜 문제는 소련과의 협력 관계를 통한 독일의 안정화가 아니라 독일에 대한 (미국의) 장기적 통제”라고 결론 내렸다. 따라서 독일에서 소련군이 철수하는 건 당연하지만 미군과 영국군이 철수 할 수는 없다. 미국에게는 독일을 포함한 유럽이 안정과 평화를 유지하는 것보다는 대립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 더 유리했다.
1949년 5월 상원 외교위원회 실무 회의에서 딘 애치슨 국무장관은 소련에 대한 비타협 원칙을 강경하게 표명했다. 한 상원위원이 미국의 이런 정책으로 냉전체제가 고착화될 우려를 표하자, 애치슨은 정부의 목적은 냉전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주도하에 서구를 통합하는 것이라며 반박한다.
반소주의는 이런 미국의 입장을 정당화해주었다. 소련이 유럽평화에 관심을 보이는 건 새로운 기회가 아닌 안보 위기일 따름이었다. 왜냐하면 미국과 영국은 영토 확장의 야욕이 없지만 소련은 영토 확장의 야욕이 없다는 걸 한 번도 입증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중 잣대는 미국이 해외 군사기지를 갖는 건 되지만, 소련은 안 된다는 논리로 이어졌다.
미국은 독일통일보단 독일분단을, 유럽의 평화보단 유럽의 불안정을, 냉전완화보단 냉전심화를 원했다. 미국의 손에서 벗어난 안정보단 미국이 통제하는 불안정이 더 중요했다. 도미노 이론, 소련의 영토야욕, 공산화 위험 등 반공주의는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예외주의를 정당화할 따름이었다. 이처럼 평화보단 적대를 추구하는 미국의 정책은 ‘안보정책’이라 불리었다.
#5
키신저는 미국이 자유, 인권,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매여 있는 특수함을 알아달라고 한다. 키신저는 <중국이야기>에서 중국이 청조 때부터 마오쩌둥, 덩샤오핑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온 ‘중화주의’에 대해선 곧잘 말하지만, 미국의 예외주의, 일방주의, 제국주의는 보지 못한다.
미국 주도의 질서를 거부하는 국가들에겐 자유, 인권, 민주주의를 들이밀며 이것이 미국 외교정책의 원칙이라 근엄하게 말하지만, 한편에선 민주정부를 전복하고 군부독재를 지원하면서 ‘실용주의’라는 이름 뒤에 숨는다. 그 예로 미국은 아이티에서 뒤발리에 독재기간 동안 각종 인권요청은 무시했지만, 아이티 민중들에 의해 아리스티드가 당선되자 갑자기 아이티 인권문제를 주요 의제로 삼았다.
이란, 과테말라, 인도네시아, 브라질, 칠레 등등 미국의 대외정책은 자유, 인권, 민주주의의 논리가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특권을 위협하는 경제적 민족주의, 등거리 외교 따위의 중립주의를 철저히 탄압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있었다. 다시 말해 경제적 자주권과 외교적 자주권을 유린하는 것이 곧 미국의 대외정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