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가 꼼짝하지 않는 복서의 눈 말입니다.
스스로는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죠.

자기자신은 움직이고 있다고 여기고 있어요.
그런데 다리는 멈추어 있습니다.
다리의 움직임이 멈추면 어깨도 자연히 매끄러운 움직임을 잃습니다.

그렇게 되면 펀치에 힘이 없어지죠.
그런 눈이었습니다.
왠지 좀 이상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 원인을 본인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 순간을 경계로 나는 재기하였습니다.
밤에도 푹 잘 수 있었고, 식사도 거르지 않고 체육관에도 빠지지 않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질수는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단순히 아오키에게 이긴다든가, 그런게 아니었습니다.
인생 그 자체에 질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이 경멸하고 모욕스럽게 느끼는 것에 간단히 짓뭉개질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나머지 다섯 달을 견뎠습니다.
아무와도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잘못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다. 라고 스스로를 자위하였습니다.
매일 가슴을 쫙 펴고 학교에 가서 가슴을 쫙 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고 등학교를 졸업하자 큐슈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큐슈로 가면 고등학교 시절의 친구들과는 얼굴을 마주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사와씨는 거기까지 얘기하고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내게 커피를 한 잔 더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사양하였다. 벌써 세 잔이나 커피를 마셨던 것이다.

"그렇게 강렬한 경험을 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변합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좋은 방향으로 변할 수도 있고, 나쁜 방향으로 변할 수도 있죠.
좋은 방향이라면, 나는 그 일로 굉장히 참을성이 강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 반년 동안 내가 당한 고난에 비하면 그 후의 경험한 고난따윈 고난 축에도
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절에 비하면, 하고 생각하면 대개의 어려움은 참고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상처나 고통 같은 것에 대해서도,
보통 사람 이상으로 민감해졌습니다.

이런 것들은 플러스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 플러스적 특질을 얻음으로 해서 나는 그 후 진짜 좋은 친구를 몇 명 사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이너스적인 요소도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부터 인간이란 것을 전혀 신용할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을 불신하는, 그런게 아닙니다.
나는 아내도 있고 아이도 있습니다.
우리는 한 가정을 이루고 서로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 일은 신뢰감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은 이렇게 평온무사하게 생활하고 있지만,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만약 무언가 지독한 악의를 품은 것이 찾아와 그 평화를 뿌리째 뽑아버린다면,
설사 자신이 행복한 가정과 좋은 친구들로 둘러싸여 있다 해도 앞날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하는 말을 혹은 당신이 하는 말을,
누구 하나 믿어주지 않는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런 일은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법이죠.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죠. 늘 그 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일은 여섯 달 만에 그럭저럭 끝났습니다만 이 다음에 그런 일이 다시 생긴다면,
그것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자신이 그것에 얼마나 오래 견딜 수 있을지, 전혀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때로 정말 두려워집니다.

밤중에 그런 꿈을 꾸고 놀라 벌떡 일어나는 일도 있습니다.
아니 그런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 때 나는 아내를 깨웁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매달려 웁니다.

한 시간 정도 운 적도 있습니다.
너무 두렵고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야기를 멈추고 창 밖 구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구름은 아까부터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관제탑도 비행기도 운송차량도 트랩도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도,
그런 깊은 구름의 그림자에 모든 색을 잃고 있었다.

"내가 무서워하는 것은 아오키 같은 인간이 아닙니다.
아오키 같은 인간은 어디에나 흔히 있고, 그 점에 대해서는 이미 포기했습니다.
그런 인간을 보면,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관계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피하는 거죠. 피하는 도리밖에 없어요.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그런 인간은 금방 알아볼 수가 있어요.
나는 아오키에 대해서는 나름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기회가 올 때까지 잠자코 끈질기게 기다리는 능력,
기회를 확실하게 포착하는 능력, 사람의 마음을 실로 교묘하게 장악하고 선동하는 능력
- 모든 사람들이 그건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토악질이 올라올 만큼 싫어하지만, 그래도 그것이 능력 이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내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아오키 같은 인간이 하는 말을 비판없이
받아들이고 그대로 믿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스스로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말주변이 좋고 받아들이기 쉬운 타인의 의견에 좌지우지되면서 집단으로 행동하는
인간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에게 어떤 잘못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손톱만큼도 품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무의미하게 또 결정적으로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하는 인간들입니다.

그들은 그런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그런 족속들입니다.

나는 한밤중에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꿈꿉니다.
꿈속에는 침묵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꿈 속에 등장하는 인간들에게는 얼굴이 없습니다.

차가운 물처럼 침묵이 모든 것에 푹 배어들어 있을 뿐입니다.
침묵 속에 모든 것이 흐물흐물 녹아들어 있습니다.
내가 그런 상황에 녹아들면서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습니다."

오사와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기다렸지만, 얘기는 거기서 끝났다.
오사와씨는 마주잡은 두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채 그저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 시간은 이르지만, 맥주라도 한 잔 하지 않으렵니까?"
잠시 후에 그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죠. 라고 나는 말했다.

정말 맥주 라도 마시고 싶은 기분이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로써 무라카미 하루키씨의 <침묵>을 다 읽었습니다.
이 소설은 하루키씨의 단편 중에서 제가 참 좋아하는 글입니다.

남을 교묘하게 조종하려는 인간에 대한 두려움.
집단으로 행동하고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인간들에 대한 미움이 새록새록 이는..

그러나 진정한 승자는 이 모든 상황을 간파하고 그 술수에 휘말리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라는 진리를 깨닫게 해준 단편입니다.

함께 책을 열심히 읽어주신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끝으로 '더 견고하고 강한 인간으로 살아내기'를 알려주신 무라카미 하루키상에게 감사를 드리며 책읽기를 계속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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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oven 2004-01-27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이핑 하느라 힘들었는데 읽으셨다니 기쁘네요.
좋아하는 소설을 가끔 이렇게 타이핑 해본답니다.
더욱 친근한 느낌이 들고, 속속들이 알아가는 느낌이 들어 좋은 공부라고 여겨요.^^

landscape 2004-03-01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특히 침묵8이 너무 마음에 듭니다.
하루키의 세계에 대해 다른 면을 본것같아 좋았습니다.

motoven 2004-03-08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특히 좋아하는 소설입니다.
사람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강인함이 특히 마음에 듭니다. ^^
 




1.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으로 가야한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말죽거리 잔혹사>에 이은 유하의 다음 작품이 무엇일까 자못 기대되다.

2. 유하의 시세계는 이 영화에서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었을까 궁리하다.

3. <친구> <클래식>에서 이미 보아왔던 고교시절의 이야기가 전개됨에 새로울 것이 없어지다.

4. 권상우의 캐릭터를 왜 그렇게 한없이 죽여 놓았을까? 궁금해지다.

5. 사라진 이정진과 한가인의 마지막 멘트의 개연성에 대해 묻고 싶어지다.

6. 권상우를 위한 권상우에 의한, 권상우의 영화임을 느끼다.

7. 제목에 너무 비중을 실은게 아닌가? 생각하다.

8. 진추하와 아비의 One summer night, 모리스 앨버트의 'Feelings', 아바의 노래들..
   휘버스의 '나 어떻게', 영사운드의 '등불', 양희은의 '이루어 질수 없는 사랑' 같은
   70년대의 주옥같은 노래에 흐믓해지다.

9. 철학이나 무게가 덜 실린 영화에 아쉬움이 남다.

10. <화산고> <동갑내기 과외하기>에 이은 몸짱 권상우의 활약에 주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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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고 미루다가 겨우,, 사토라레를 봤습니다.

비범한 사람의 고독.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의 모습.
그 고독을 안아주려는 인간미.
사랑은 사랑을 낳고, 그 사랑이 결국 커다란 과업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결론.

이런 모습들을 보았네요..
생각한 만큼 재밌거나 버라이어티하지는 않았으나 잔잔한 드라마 한편이었습니다.

고상한 할머니의 모습처럼,
격조있고 우아하게 늙어야겠다는 생각은 자주 자주 하게 되네요..

마음을 들키는 일.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일까요?
우리 맘 들키지 않게 살금살금 살자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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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여러사람에게 화자되는 영화라 한번 봐보지~하는 심경으로 본 킬빌..
선혈은 낭자했으나, 너무나도 만화 같아서 사실감이 덜해서 오히려 유쾌하더이다..
움하하하..

우마써먼 이제는 나이가 들어보였어도 그 유연한 몸매 아름다웠고,
루씨리우의 무표정이 빚어내는 은근한 카리스마도 아름답더군요.

이 영화를 보면서 서양인들이 꿈꾸는 동양의 매력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게 됐는데,
작고 단단하고 똑똑 떨어지는 일본이라는 매력이
서양인들이 그리는 미술계에서도,
영화계에서도 종종 차입되고 있음에 살짝 부러움을 느꼈습니다.

우마써먼의 일어 발음은 엉성했지만 영화가 뒤로 갈수록 차차 나아지더이다..
(순서대로 영화를 찍지 않았을지언정..ㅡㅡ;)
루씨리우는 일본인답지는 않았으나 썩 발음이 좋은편이었고,
루씨리우의 수하였던 그 이탈리아계 여인 (이름 잊어버림)의 발은 아주 퍼펙트했답니다.

이 영화에서 '칼라'를 보셨나요?
군데 군데 곳곳에 Red 칼라를 너무나도 아름답게 집어 넣은 타란티노의 미적인 시각에
'대단하군'이란 생각이 들었으며,
이 영화의 칼라 컨셉은 역시 레드를 중심으로한 강렬한 삼원색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음악 선정이 여러분이 말씀 하신대로 좀 깨던데,,
그 의도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마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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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toven 2004-01-25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쿠엔틴 타란티노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트렌드가 되어 버리는듯 하더군요.
킬빌 2탄이 기대되지 않던가요? 새로운 타란티노 영화도 기대됩니다. ^^
 

 

어느 토요일 오후 별 생각없이 그저 존쿠삭을 보겠다고
극장에 들러서 봤건만..

상영시간 내내 긴장을 늦추지 않고 영화에만 몰입하게 해준
오랜만에 집중력을 길러준 영화였었죠.

어찌나 무섭고 긴장이 되든지..
옆에 남자라도 앉았으면 좋았겠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다중인격장애를 가진 남자가
자신 안에 있던 10명의 자아를 죽이고 말콤이라는 본인을 찾는듯이 보였으나,,
영화는 반전에 반전을 가지고 오게 되죠..

아가사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10개의 인디안 인형)을 혹시 읽으신 분 계신가요?
영화는 그 추리소설에서 열쇠를 얻어 줄거리를 만들었다는 인상 또한 강했답니다.

한번 보고는 100% 이해가 가지 않아
어젯밤 디빅파일로된 영화를 다시 보았습니다..
그래셔, 이제는 나름대로 100% 이해가 간다는..ㅎㅎ

이런류의 서스펜스는 강추입니다.
구성과 완성도 면에서 탁월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싶네요..
쾅쾅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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