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아홉 통의 편지
손석춘 지음 / 들녘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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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그의 책을 빠짐없이 사보던 때가 있었다.

너무 래디컬한 거 아냐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의 책은 내 서재에 더 이상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그런 시기에 읽게 됐던 것이 그의 첫 번째 소설 <아름다운 집>이었다.

소설인지 수기인지 알 수 없는 형식의 ‘소설’.

그의 말처럼 그건 ‘손석춘의 소설’이었다.

그 소설을 덮는 순간 난, 아, 제발 소설이었으면 하고 내뱉었다.

이런 느낌은 두 번째 소설을 지나 마지막 이번에 낸 세 번째 소설에서도 어김없었다.

소설보다 더 끔찍한 현실이 바로 우리 등 뒤에 있었던 것이다.

그의 산문은 더 이상 읽지 않았어도, 그의 소설은 그렇게 계속 읽어갔다.

 

빨갱이, 레드콤플렉스, 마르크스, 빨치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소설은 산문보다 더 래디컬하다.

내가 처음에 그에게 느꼈던 래디컬은 extreme, revolutionary 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들이, 저자가 원하는 건, fundamental, basic 이라는 의미의 래디컬한 사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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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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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너나 할 것 없이 전문가로 자처하는 분야가 있는데, 그건 바로 축구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2002년 월드컵 전의 상황으로 가보자. 월드컵 1승을 바라며 모두 눈에 불을 켜고 있던 한국인들. 자칭 전문가라는 이들에게 히딩크는 불만 그 자체였다. 그에 대한 비난은 끊임없었다. ‘언제까지 테스트만 할 건가’, ‘색깔이 없다’, 심지어 ‘또 휴가?’라는 얘기까지.

하지만 히딩크는 개의치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에 흔들릴 법도 한데 말이다. 내가 추측하기에 그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알고 있었거나, 아니면 2000년에 나온 이 책『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의 원제인 알렝 드 보통의『The Consolations of Philosophy』를 읽었을 것이다.


 알다시피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시민들에게 그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모든 것들을 의심해 보라고 주문했다. 그러자 그는 사회적 기틀을 깨뜨렸다는 이유로 기소되어 결국 배심원들의 판결에 의해 사형이 집행됐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을 부정하고 목숨을 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입장을 포기하기 전에 먼저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 논법을 고려해야 한다”면서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는 의연하게 독배를 마셨다.

저자인 알렝 드 보통은 이 일화를 들려주면서 ‘인기 없음에 대한 위안’을 얘기한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와는 반대로 빈정대는 말이나 혹평을 들으면 당혹감에 시달리는데, 소크라테스처럼 그런 비평의 근거에 대해 차분히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그렇게 한다면 적어도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자괴감, 나아가 인기가 없다는 괴로움에서 해방될 수 있다면서. 이런 면에서 본다면 히딩크가 결국 자신의 입장을 포기하지 않은 건 소크라테스처럼 자신에 대한 비난의 논법을 곰곰이 따져본 후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에서는 소크라테스 외에도 5명의 철학자가 더 나온다. 돈이 없을 때는 에피쿠로스의 철학, 두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는 세네카의 철학, 부적절한 상황을 맞이하게 됐을 때는 몽테뉴의 철학, 실연을 당해 상심했을 때는 쇼펜하우어의 철학 그리고 마지막으로 삶이 힘들 때는 니체의 철학이 저자를 통해 흘러나와서 독자를 위로한다. 그런 면에서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이라는 한국책 제목보다 원제인 ‘철학의 위로’가 더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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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똥이 2005-06-29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겐 니체의 철학이 필요한건가요?
 
나를 찾아 떠나는 17일간의 여행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3
조연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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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문화관광부가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인구 절반은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굳이 이런 통계를 들지 않아도 도시에서는 고개만 돌리면 교회 십자가를 볼 수 있고, 산 속에서는 발걸음만 돌리면 아무 절에나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종교인구가 전체인구의 절반이 넘고 있음에도 뉴스에서는 언제나 흉악하고 듣기 싫은 소식들이 끊임없이 들려온다. 과연 종교는 뭘 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을 지경이다.

 

개인적으로 불교를 믿고 있다고 말하지만 내가 불교의 교리를 따르고 있는가 하면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다. 직접 살생은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내가 살생을 안 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내 몸은 이미 수많은 동물들의 살코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상에서는 종교를 마음 속 한 구석에 처박아두고 있다가 정말 위급하고 곤란한 일이 생기면, 그때가 돼서야 하느님, 예수님, 부처님을 찾는 건 나만의 일일까?

 

사람들은 이러한 고민들을 풀기 위해 일상적 종교행사와는 달리 좀더 다른 걸 찾게 된다. 그게 바로 수행이다. 이 책은 17군데의 수행처에 필자가 참석하여 느끼고 본 것들을 글로 옮긴 것이다. 우리가 흔히 들어봤던 참선, 위빠사나 같은 불교수행법 외에도 천주교․기독교․천도교에서 행해지는 마음공부․죽음명상 등의 수행들이 차분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실 이 책의 제목은 역설적이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곧 ‘나를 버리는 여행’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말하는 핵심은 “나”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모두 버릴 것, 그러면 진정한 “나”라는 건 어디에도 없다는 걸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불과 5킬로도 안되는 무게로 태어나서 적어도 그 열 배에 해당하는 무게를 가지고 땅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그 열 배의 무게는 어디서 온 것인가? 모두 외부에서 온 것이다. 마치 내 몸이 수많은 살코기들로 이루어졌듯이, 우리의 몸은 모두 외부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러니 어찌 ‘나’라고 하는 게 있을 수 있겠는가? 정말 우리는 잠깐 몸을 빌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따라서 ‘나’에 집착한다는 건 ‘본래의 나로 건너는데 필요한 나룻배 자체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만큼 사람들은 ‘나’라는 생각이 굳건하다. 아무리 전셋집이라도 오래 살수록 그 집에 애착을 가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책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나’라는 생각을 버리는 게 어려운 지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모두 한참을 고민하고 수행하면서 서서히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이러한 에피소드를 보고 있으면 바로 달려가서 그곳에서 수행을 받고 싶은 욕구가 생겨난다. 여기에 이 책의 매력이 있다. 이 책은 ‘수박맛’이 어떤지 알려주는 게 아니라, ‘수박맛’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건 언제나 ‘수행’, 즉 실천이다. 저자의 말처럼 천 번 생각보다 한 번의 실천이 중요하고, 만권의 책보다 한번이라도 진실하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 책도 내 마음의 위안을 삼는 또 다른 종교에 그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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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명의 연인과 그 옆 사람
윤대녕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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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의 새로운 산문집 <열 두명의 연인과 그 옆 사람>은 다시금 읽는 맛을 느끼게 하는 책입니다.

사실 지난 소설이었던 <누군가 걸어간다>는 윤대녕의 글맛을 느끼지 못하고,

슬금슬금 엉금엉금 겨우겨우 끝까지 읽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시금 윤대녕의 책에 손이 간 건 책 읽는 맛을 알려준 이가,

바로 그이기 때문입니다.

이 산문집은 제게 다시금 그 맛을 일깨워주어서,

정오에 도착한 책을 자정을 넘기지 않을 시간동안 모조리 읽어내게 했답니다.

어쩌면 그 동안 그의 소설을 모조리 읽어왔기에 더 맛나게 읽었는지 모릅니다.

한편 한편에서 이건 <은어낚시통신>이 아닐까 이건 <남쪽 계단을 보라>가 아닐까 하며,

예전에 읽었던 그의 소설을 다시 뒤져보고 싶은 맘을 느끼게 해주었으니까요.

흔히 그의 소설이 시와 같다는 평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의 산문은 외려 소설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 일인 것 같지만, 왠지 현실에서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분위기.

하지만,

그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분위기 또한 좋아하지 않을 수 없죠.

그가 어느 여인으로 인해 "하이네켄" 매니아가 되었다면,

저 역시 그로 인해 "하이네켄", "엔야", "굴렌굴드" 등등을 알게 되었으니,

어쩌면 저도 그에게 영향을 받은 "옆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렇게 우리는 언제나 서로에게 연인이 되고 서로의 옆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은 그러한 소통의 산물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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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여행자
윤대녕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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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에는 구계등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삼년전인가 사년전인가 저는 친구와 함께 그곳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친구는 단순히 저와 함께 하는 여행인가보다 하고 생각했겠지만, 저는 일종의 문학기행을 염두에 두고 길을 나선 것이었답니다. 굳이 기차로 광주까지 가서 완도행 고속버스를 잡아탔던 것도, 구계등에서 걸어나왔던 것도 모두 '천지간'이라는 윤대녕의 소설 때문이었습니다.

윤대녕은 소설가입니다. 그러니 너무나 당연하게도 소설을 씁니다. 하지만, 그는 소설가이기 이전에 유목민입니다. 한곳에서 정착을 해서 사는 정착민이 아니라, 이곳과 저곳을 향해 항상 걸음을 옮기는 것이 숙명인 유목민이기에 그는 지난 세월동안 무수히 많은 길을 걸어왔으며, 또한 지금도 걸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다만 그가 걸었던 길을 잠시나마 맛보기 위해 그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유목민 윤대녕은 걸음을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지나치는 모든 것을 펜으로 그림을 그려놓고 지나갑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읽은 자는 그 풍경이 너무나 생생하기에 차마 잊지 못하고 내처 그 풍경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것입니다.

그가 이번에는 눈길을 걸어온 풍경을 우리 앞에 내놓았습니다. 사막의 이미지를 남겨 놓은 지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는 이미 눈의 이미지를 가지고 찾아온 것입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도 여전히 길을 나섭니다. 그의 소설 속의 주인공은 작가와 마찬가지로 무엇인가를 찾아 그렇게 길을 걷고 또 걷습니다.

그가, 그 주인공들이 그렇게 걷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봤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그가 걸었던 길들을 - 완도, 구례, 홍대 등 - 걸어본 후에는 조금씩 느낌이 와 닿았습니다. 그가 길들을 걸었던 이유는, 제가 인생을 걸어가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마 당신이 인생을 걸어가면서 찾고자 하는 것과 그가 그토록 정착하지 못하고 걷는 이유는 아마도 같을 것입니다.

이번 소설 속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나 아저씨가 누군지 알 것 같아'. 이 말을 저도 당신에게 돌려주고 싶습니다. '이제 나 윤대녕이 누군지 알 것 같아'라고 말입니다. 아마 당신도 이 책을 읽은 후에는, 저처럼 일본이라는 곳을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며, 또한 그동안 걸어왔던 길들이 다르게 느껴질 것입니다.

당신도 <눈의 여행자>가 되어 보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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