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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 - 전6권
빅또르 위고 지음, 송면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2년 8월
평점 :
품절
내가 읽은 레 미제라블은 금성출판사에서 나온 3권짜리 1987년 초판본으로 역자는 김은희 교수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완역하여 나온 레 미제라블은 약 3종을 꼽는데 이에 관해서는
과학서 전문 번역가인 김희봉 님이 '세계적 명작의 국내 번역본을 비교 검토'하는 글에 관련 내용이 있다.
<...레미제라블은 방곤(범우), 김은희(금성), 송면(동서)본이 있다.
송면의 번역이 최근의 번역이다.
현대적인 어휘 사용으로 봤을 때는 최근 번역본인 송면의 것이 좋고,
문학적인 표현에는 김은희의 것이 나아 보인다.
사실 방곤의 번역과 송면의 번역은 너무 비슷하다.
방곤의 것을 저본으로 수정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금성출판사 레 미제라블은 원고지로 계산하니까 9천700매 정도 된다.
태백산맥 10권이 1만6천매 가량 된다니까 3분의 2분량 되겠다.
이 책은 몇 년 전 신촌의 헌책방에서 몽테크리스트 백작(금성출판사) 3권과 함께 구입했었다.
사실 관심이 있던 책은 몽테크리스트 백작이었고 레 미제라블은 옆에 있기에 덤으로 구입했다.
한권에 1500원이라는 초저가가 구입의 절대 요인이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 작품의 내용을 대강은 알고 있다.
소년용 다이제스트 판을 통해서든 만화나 영화를 통해서든 조금은 알 것이다.
나 같은 경우는 몽테크리스트 백작을 국민학교 때 '암굴왕'이라는 제목으로 읽었는데
정말 흥미진진하게 봤다.
그 당시는 그게 전부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어마어마하게 긴 장편이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레 미제라블은 아예 그림책용으로 나온 것을 읽은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나서 보니 재미는 있었던 것 같은데 내용이 가물가물하기도 하고
제대로 된 완역판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어 구입한 것이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서가 구석에 장식용으로만 꽂아두고 오랫동안 읽지 않았다.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이 저런 대작들을 읽기는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흠, 흠... 물론 난 19세기, 아니 가끔은 구석기 원시인 같은 삶을 살기에
시간의 구애를 받을 일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무늬만은 현대인이므로...
(한가한 사람이 더 바쁜 척 한다).
어쨌든 아무리 한가하더라도 이런 대작을 시작할 엄두는 안 나는 법이다.
그런데 어느날 너무 심심한 나머지 알 수 없는 오기에 사로잡혀 레 미제라블을 꺼내들게 되었다.
그리고 읽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은 이렇다.
[1815년에 샤를 프랑수와 비앵브뉘 미리엘 씨는 디뉴의 주교였다.
그 무렵 그는 75세 정도의 노인이었는데 1806년부터 디뉴의 주교직에 있었다.
이런 것들은 이제부터 이야기하려는 본 줄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지만
어떤 일이라도 정확히 해 두고 싶은 단순한 뜻에서, 어떻든 전혀 쓸모없는 이야기만은 아니므로
그가 주교구에 왔을 무렵 그에 관해서 퍼진 소문이나 평판을 여기서 말하기로 하겠다.
어떤 사람에 대한 세상의 풍문이라는 것은 그것이 정말이든 거짓말이든 본인의 생애에서,
특히 그 운명을 통해서 본인의 행위와 똑같을 만큼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일이 많다.
미리엘 씨는 엑스 고등법원 판사의 아들이었다...]
음... 시작 부분을 이렇게 장황하게 소개한 것은 바로 세 번째 줄의
'본 줄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지만...'이라는 부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바로 이것이 레 미제라블을 레 미제라블이게 하는 요소 중 하나인 것이다.
요즘 작가라면 아무리 만용을 부린다 해도 결코 쓸 수가 없는, 그런 곁가지 설명들이
이 작품에는 여러 군데,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길게 들어가 있다. 거의 지뢰밭 수준이다.
예전에 움베르토 에코가 장미의 이름의 난해한 도입부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난삽한 책의 첫 부분은 호흡을 따라잡기 위해서 독자가 치러야 하는 입문과도 같은 것이다.
산을 오르려면 산의 호흡법을 배우고 산의 행보를 익혀야 한다."
그러나 빅토르 위고는 입문 정도가 아니라 중간고사, 기말고사는 물론 평가시험,
쪽지시험까지 다 치르려는 것 같다. 정말 어떤 때는 너무 지루해서
같은 줄을 네, 다섯 번이나 읽다가 책을 갈기 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험 보기 싫다고 학교를 자퇴할 수는 없잖은가. 그동안 등록금 내고 다닌 게
아까워서라도 어떡하든 졸업은 해야지, 하는 심정으로다 꾸역꾸역 읽었다.
게다가 그 부분을 그냥 빼고 읽으면 나중에 다 읽고 나서 정말 찜찜할 거 같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부분, 특히 2부 코제트의 <제6편 르 프티픽퓌스>의 내용은 거의 살인적이다.
가령 '8.마음 다음에는 돌'의 시작은 이렇다.
[수도원의 정신적인 면을 스케치한 뒤에 물질적인 겉 모습을 간단히 설명해 두는 것도
전혀 쓸모없지는 않을 것이다. 독자도 이미 얼마간은 알고 있을 줄로 생각한다....] (이러면서 죽 설명 들어간다.)
그럼 그 다음 '9. 두건 밑에 가린 일세기'의 시작은 어떤가.
[나는 이미 사라져 버린 르 프티픽퓌스 수도원의 옛날의 생활을 자세히 얘기하면서,
이 성스러운 집의 문들을 조심스럽게 열고 말았으니까, 이제 조금 옆길로 새어
이 책의 본 줄거리와는 관계가 없는 여담을 좀 하는 것을 용서해 주기 바란다.
아뭏든 아무리 조그만 수도원이라 하더라도 그 나름의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으므로,
그만큼 우리에게 흥미가 있는 것이다.]
하하... 이건 뭐, 자기 책이니까 작가 마음대로 쓰시겠다 이거지. 하긴 뭐...
놀라지 마시라. 여담은 잠깐 나오는 여담이 아니라 그 다음 편, 그러니까
<제7편 여담>이 통째로 들어간다.
이 여담은 작가 말마따나 소설이 아니다. 그냥 작가의 평소 생각, 평소 신념일 뿐이다.
그러니 정말 읽지 않아도 무방하다(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게 그런 게 아니지...흑흑).
최근에 나온 완역본은 이런 부분들을 좀 생략했다고 하는데...
(버럭, 그럼 완역본이 아니잖아!!! 그건 독자가 선택해야지!!!)
어쨌든 이런 지뢰밭을 경험하면서 심각한 데미지를 입고
몇 달 동안 책읽기를 쉴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번 쉬면
그 다음 이어서 읽는 것이 무척 힘들다. 부담 백배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오랫동안 정진수양을 한 다음에야 심호흡을 가다듬고 조용히 책을 펼쳐든다.
그리고 눈을 부릅 뜨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서 지뢰밭으로 뛰어든다.
그러다 얼마 안가서 또 만난 대형 지뢰밭...
이렇게 읽다 쉬다를 거듭하다 2007년을 맞아 1년 간 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바로 그 전까지 3권의 절반까지 진도를 나간 채 한참을 쉬고 있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1년 넘는 기간 동안 책을 손에서 놓았다.
원고지 1만 매가 다 이런 지경이라면 아무리 자존심이 상해도 못 읽는다.
아니 안 읽지. 인생은 짧고 읽을 건 많은데 왜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며 고난의 행군을 하겠는가.
짐작하겠지만 레 미제라블은 결코 지루한 옛 고전이 아니다.
작품의 서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부분부터 독자는 그야말로 극과 극의 체험을 하게 된다.
어마어마한 지뢰밭의 고난을 통과하면 그야말로 짜릿하고
손발이 덜덜 떨릴 정도로 재미난 이야기들이 기다린다.
장발장이 감옥에서 나와 세상을 돌아다니는 부분부터...
성공하여 한 도시의 시장이 되고, 코제트의 어머니 팡틴과의 오해...
그리고 자베르 경감에게 쫓기면서, 드디어 코제트를 만나는 장면 등은
너무 정신없이 읽다 온 몸에서 진땀이 날 정도로 손에 땀을 쥐게 하고 심장을 뛰게 만든다.
옛날 이야기의 힘... 그야말로 진정한 이야기의 백미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근세 역사에서 가장 치열한 변화와 혁명의 시대에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인물들이
가장 극적인 상황에서 가장 극적인 방법으로 서로서로 관계를 맺는다.
이런 것이 바로 옛날 이야기의 힘이다.
옛 작가들은 인간을 소용돌이 속으로 던져놓고 지켜보는 사람이다.
작중 인물들이 거기서 빠져나오거나, 힘이 빠져 죽거나, 미치거나,
자포자기 하는 모습들을 작가는 문학적 역량을 총동원하여 세세히 그린다.
다른 트릭은 없다. 오직 이야기만 있을 뿐이다.
사실은 지뢰밭 역시 그 이야기의 일부분인 것이다.
그것은 빨리빨리 후딱후딱 넘기는 이야기가 아닌 지극히 풍부하고
깊이있는 시선을 통과한 작품의 배경인 것이다. 물론 이야기를 풍부하게 하는 배경이다.
여행을 다녀와서 한동안 레 미제라블을 손대지 못했다.
정말 여유가 없었고 솔직히 겁도 났다.
그러던 어느날 화장실에 들어가면서 또 다시 알 수 없는 오기로
그 놈을 손에 들었고,
그날 반나절만에 3권의 나머지 절반을 다 읽어버렸다.
다 읽고 나니 참 허탈하더라. 3년 만에 다 읽은 것이다.
그것도 세 권 합쳐 4500원이라는 돈으로...
이야기의 백미를 즐기시고 싶은 분들이라면 한번 도전해 보시라.
그야말로 이야기에 푸욱 빠져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데미지는 입겠지만 이런 문학적 데미지는 요즘 희귀하다.
일생에 한 번쯤 도전해 볼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