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말 사전 슬기사전 3
박효미 지음, 김재희 그림 / 사계절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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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나쁜 말 사전

"몰랐으니까 썼죠. 욕만 나쁜 말인줄 알았다고요.”

'사전'이라고 하면 짙은 갈색이나 남색 가죽 장정의 표지 위에 진지한 글씨체로 금박의 제목이 박혀 있는 벽돌책이 떠오른다.
책장을 열면 그림은 없고 온통 깨알같이 작은 글씨의 옳고 바른 말들만 가득하다.
그러니 이 책 '나쁜 말 사전'은 이 모든 사전과 반대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저학년들은 국어시간에 사전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운다.
간혹 초등학생을 위해 세밀화 그림과 함께 보다 쉽게 풀어쓴 사전이 있다.
그러나 '나쁜 말 사전'은 사전에 대한 모든 전형을 벗어나려고 한다.

이 책은 차별의 언어를 저학년에게 설명하는 책이다.
비속어를 비롯해 남녀, 인종, 장애, 외모, 노인 등을 차별하는 36개의 나쁜 말이 실려있다.
<고양이 해결사 깜냥>을 그린 김재희 작가의 그림으로 저학년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간다.

아이 입장에서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왜 차별적 언어인지 이해가 잘 안 될 수도 있다.
별 뜻을 두지 않고 평생 써온 말이었는데 바깥 외(外)를 써서 어머니 본가를 표현해온 것이다.
유교사회 남존여비 사상의 잔재는 '미망인', '과부' 등의 말에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몰랐다고 하지 말고 말하기 전에 꼭 생각하고 말하자.
무심코 던진 한 마디 말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
내가 그 상처받는 사람이 될 때가 올 수도 있다.

- 우리 가족 한줄평
아이: 재미있고 머리에 쏙쏙 들어오지만 오히려 모르던 나쁜 말을 배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빠: 저도 모르게 써오던 '나쁜' 말들이 많이 있었네요. 어른들이 먼저 읽어야 할 책이네요.
엄마: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말들의 사전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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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계에서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가 널리 읽히고 이슈가 되었던 것과 같이

문학계에서는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말』이 그랬던 것 같다.

물론 이 책들의 제목만 보지 말고 내용을 잘 살펴본다면

책을 처음 접할 때 제목이 주었던 충격이 생각보다 크지는 않을 것이다.

무언가의 종말에 대한 언급은 비단 지금에 국한하지 않는다.

헤겔을 비롯한 많은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매 시대마다 자기시대에 세상의 종말이 왔다고 주장해왔으니까.

 

도서출판b에서 가라타진 고진 컬렉션이 나와 이 책은 그 다섯번째 책이다.

한국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의 종말」이라는 글로 문학동네(2004. 겨울)를 통해 소개되었다. 문학동네 편집진도 당시에 이 글을 싣는데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하고, 한국문학시장이 침체한 현실 속에서 문학주의의 비판에 근거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역사적으로 보자면 '문학'은 인류역사에서 근대에 와서야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았다.

문학 중에서도 '소설'은 근대에 이르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근대 이전 문학에서 소설은 중요한 위치가 아니었고 오히려 시(poetics)가 다른 중요한 예술장르와 어깨를 겨루는 위치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의 종말이 곧 소설의 종말을 뜻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18세기 이르러 영국을 중심으로 '미학'이 등장하여 이후 독일에 영향을 주었다.

이는 미술에서도 중요한데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가 주창한 '숭고(sublime)'의 개념이 낭만주의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이어 독일에서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같은 작가들이 등장했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1818)

 

본래 '감성론'이라는 의미의 '미학'은 감성에 대한 새로운 태도였다.

 

이전 시대에 '상상력'이라는 것은 환상을 초래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었고 이같은 태도는 최초의 근대소설이라 불리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서도 엿볼 수 있다. 돈키호테는 중세 기사문학을 엄청나게 많이 읽는 바람에 풍차를 거인으로 보고 돌진하는 어처구니 없는 인물이다. 말그대로 기사문학 폐인인 것이다. 통속적인 기사소설에 대한 비판으로 썼다는 이 소설 시작 부분에 보면 세르반테스가 이 소설이 자신의 창작물이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거나 보고 자신이 편집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것은 '소설'이라는 장르가 당시에 높이 평가되는 장르가 아니었기 때문일 수 있다.

 

 오노레 도미에 <풍차를 공격하는 돈키호테>(c.1855)

 

'상상력'은 환상을 초래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었으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후 감성·지성이 지적·도덕적 능력과 밀접히 연결되어있다는 인식의 변화로 말미암아 그 지위가 상승하게 되었다. 근대인들은 단순한 오락거리였던 '소설'에서 도덕적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문학은 허구이지만 진실보다 더 진실을 보여준다는 것, 무력·무위·반정치로 보이지만 혁명정치보다 더 혁명적일 수 있다고 인식했기에 이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문학의 지위가 상승하면서 더불어 문학은 도덕적 과제라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되었다.

 

그러나 가라타니 고진은 "문학은 영구혁명 중에 있는 사회의 주관성"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인용하면서 칸트 이후 문학의 입장이 오늘날에는 사라졌다, 소설은 근대 문학에서 이미 제 역할을 다했다고 주장한다. 이제 아무도 소설에 혹은 문학에 그와 같은 기대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번역과 근대의 관계 또한 가라타니 고진의 분석에서 중요하다. 근대문학은 과거 세계를 지배하던 제국의 언어(이를테면 한자, 라틴어, 아라비아어)가 근대 국가(nation)가 성립하면서 각 민족의 속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즉, 근대국가는 제국의 보편적인 지적 언어를 속어로 번역하면서 새로운 문어를 창조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루터가 종교개혁 당시 '성서'를 독일어(속어)로 번역하면서 근대독일어의 기초가 되었다. 이를 '대혁명'이라며 사사키 아타루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자세히 분석한다.

 

 

 

 

 

 

 

 

 

 

 

 

 

 

나는 이 책을 단숨에 읽어내려갔으며 읽으면서 속이 후련하다고 해야할까, 그런 감정을 느꼈다.

'종말'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종말을 이야기하려면 당신부터 그 입 다물라'고 일격을 가하는 그의 문체는 탄산음료를 마실 때 같이 청량함을 안겨주었다. (내게는 탄산음료가 그런 존재다.)

'비평가'들은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 무엇에 대해서도 재치있는 코멘트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초조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전문가'들은 '한 가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환상에 매달립니다. 결국 둘 다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사키 아타루는 생물 종의 평균 수명이 400만년이라면 인류는 호모사피엔스로부터 계산해도 약 20만년이 된 존재로, 네 살된 아이가 팔십 먹은 노인에게 와서 "우리 세계는 끝났다. 역사는 끝났다"같은 이야기를 주절거리고 있는 셈이라 한다.

 

그는 책을 읽는 것 자체가 혁명이다. 반복해서 책을 읽는 것, 그것이 혁명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루터는 문학자이기에 혁명가일 수 있었다. 루터가 번역한 성경이 독일 근대문학의 기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책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기 때문이다.

16세기 초까지 독일어 서적 간행 종수는 단 40종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루터가 등장하자마자 1523년 498종에 이릅니다.  그중 418종은 루터와 그의 적대자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1519년 루터 책의 출판 부수는 독일 전체 출판물의 3분의 1, 1523년에는 5분의 2에 달했습니다.

당시 식자율이 5퍼센트였으므로 많은 이가 읽을 수는 없었지만 루터의 독일어 성경은 '집단독서'(많은 사람이 한 곳에 모여 루터가 번역한 성서나 저작을 낭송하고 함께 들었던 것)를 통해서도 널리 읽혔다. 여기서 루터가 혁명적이었던 것은 부패가 만연한 카톨릭에 대해 성서라는 텍스트 본연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성서라는 텍스트를 거듭 반복해서 읽고 깨달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제의 부 축적이나 심지어 결혼, 면죄부 판매 등 성서에 없는 것들을 폐하고 성서라는 텍스트를 준거삼자는 주장은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였던 당시에 정말 대혁명이었을 것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문학'은 성전을 읽고 쓰는 '기예'라 말한다. 법, 규범, 제도 등 우리가 문학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것들도 텍스트, 즉 문학의 범주안으로 규정한다. 우리가 현실에서 협의의 의미로 생각하는 문학이 아니라 광범위한 텍스트로서의 문학, 세계를 변혁하는 것으로서 문학은 아직 끝나기는 커녕 시작도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여기서 해야할 일은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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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현대문학, 2010)

박완서 작가가 돌아가시기 전 나온 이 책은 산문집이다. 작가는 소설『나목』으로 40세라는 나이에 등단하셨다. 2011년 1월 23일 81세를 일기로 돌아가셨고 떠나시기 전 해인 2010년 이 산문집이 나오기까지 40년을 현역으로 살았다. 작가 이전에 살아온 인생 만큼 작가 이후의 삶을 사신 셈이다.『나목』『그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등 작가가 되기 이전 젊은 날 겪었던 삶이 작품 속에 고스란하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전쟁이 나 서울에 남아 피난을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양 이념에 의해 고초를 겪었다. 이러한 와중에 오발사고로 인해 총상을 입은 오빠가 죽자 20살 앳된 나이에 가장이 되었다. 그러나 2007년 발표한『친절한 복희씨』에는 중년 여성의 수다스러운 화법이 문체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특히 이 책에 수록된「그리움을 위하여」는 이런 수다 문체의 백미다. 수다라면 부정적으로 생각되기 일쑤지만 이 작품에서 수다 문체가 없었다면 그 재미는 반감하였을 것이다.

 

 

 

 

 

 

 

 

 

 

 

 

 

 

김화영 『여름의 묘약』(문학동네, 2013)

'프로방스, 홀로 그리고 함께'라는 부제가 마음에 든다. 나중에 전시제목으로라도 써먹을까.

내가 사랑하는 장 그르니에의 『섬』의 역자시다. 카뮈 전공자로, 불문과 교수이자 역자, 문학평론가로 유명하지만 이 분은 원래 시인이다. 그래서일까. 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체를 구사한다.

이 책은 예술기행문의 형식을 띠고 있다. 1977년 신혼의 아내와 뱃속의 딸과 함께 프로방스에 왔던 한 청년이 30년이라는 시간을 건너 다시 같은 곳을 여행한다. 기실 이 여행은 저자가 보낸 삶 속에 살아숨쉬는 문학 속으로 떠나는 탐방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장 지오노의 작품들을 읽고 싶어졌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해서 마치 글도 읽은 것 같지만 아니고 『지붕위의 기병』은 책 표지 이미지도 없다. 유명하지만 그다지 많이 팔리지 않는 책 중의 하나인가.

 

 

 

 

 

 

 

 

 

 

 

 

 

 

 

 

 

 

 

 

 

 

 

 

 

 

 

 

저자의 이름으로 인터넷을 검색하니 최근에 번역에 관한 설왕설래가 있었던 듯하다.

알베르 카뮈의 대표작이자 저자의 번역작으로 대표적인 『이방인』의 번역이 오역이라는 새로운 번역가의 글이 한 출판사 블로그에 뜨면서 번진 이야기였다. 오역을 운운할 만큼 불어 번역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부족하지만 저자가 번역한 많은 책을 읽고 좋아한 독자의 한 사람으로 섭섭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번역은 반역이라고 하지만 그는 아름다운 글로 반역하는 분이다. 기왕 칼을 들었으면 더 나은 번역을 들고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미셸 투르니에의『짧은 글 긴 침묵 』,『외면일기』도 장 그르니에 만큼이나 좋아하는 글들이다.

『카뮈-그르니에 서한집』이나 『시간의 파도로 지은 城』도 읽어보고 싶다.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문학동네, 2013)

『여름의 묘약』을 가을까지 야금야금 아껴 읽었다면 김영하의 신작은 한걸음에 내쳐 읽었다.

연쇄살인자가 치매에 걸리다니 이것은 신의 짖굳은 농담인가. 문학평론가 권희철은 "책이 잘 읽힌다면 이 소설을 잘못 읽고 있는 것"이라는 김영하의 말을 인용한다. 사실 이 말은『빛의 제국』이라는 다른 책에 대한 저자의 언급이다. '치매 환자로 산다는 것은 날짜를 잘못 알고 하루 일찍 공항에 도착한 여행자 같다'거나 '과거를 생생하게 보존하면서도 미래는 하사코 기록하지 않으려고 하는' 질병의 징후들은 지금 내게는 단지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에 더 처참하게 느껴진다. 갑자기 낯선 곳에서 정신을 차리게 되고 모두가 낯선 이, 모든 곳이 낯선 공간이 되는 현재를 살지만 가까운 과거부터 기억은 점점 사라진다. 미래 기억이라는 것, 예를 들어 "30분 후에 약을 먹어야지" 같은 바로 해야 할 일에 대한 기억은 더욱 그러하다. 독자는 유식한 연쇄살인자의 사유를 들여다본다. 금강경을 외고 니체를 읽으며 김경주를 읊는 일흔을 바라보는 연쇄살인자 캐릭터는 몰입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가 겪는 질병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프고 힘든지는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나는 확실히 이 소설을 쉬이 읽었지만 잘못 읽고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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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생각쓰기
윌리엄 진서 지음, 이한중 옮김 / 돌베개 / 2007년 11월
구판절판


진부한 표현은 죽음의 키스
진부한 문구를 근절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공기처럼 우리 주위를 떠다니며, 언제나 도움을 주려는 친한 친구처럼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 대신 복잡한 생각을 단순한 은유의 형태로 표현해준다. 진부한 표현은 그렇게 해서 생겨난다. 주의 깊은 필자도 초고에서는 그런 표현을 꽤 많이 쓴다. 하지만 그 뒤에는 그것들을 쓸어낼 기회가 온다. 초고를 고쳐 쓰고 소리 내어 읽을 때는 언제나 진부한 문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얼마나 수상쩍게 들리는지 귀를 세워보자, 자기만의 참신한 표현을 만들어내려 애쓰는 대신 뻔하고 낡은 표현에 만족하지 않았느냐고 비난하는 것 같지는 않은가. 진부한 표현은 감각의 적이다. -207쪽

다른 작가를 모방하기를 주저하지 말자. 모방은 예술이나 기술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치는 창조적 과정의 일부다. 바흐도 피카소도 애초부터 완전히 바흐나 피카소인 채로 솟아난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본보기가 있어야 했다. 글쓰기에서는 특히 그렇다. 관심 있는 분야에서 최고의 작가를 골라서 그 작품을 큰 소리로 읽어보자. 그들의 목소리와 감각을, 다시 말해 언어에 대한 태도를 귀로 받아들이자. 모방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와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일랑 말자. 곧 그 껍질을 벗고 여러분 자신으로 자라게 될 테니.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 자신을 풍성하게 하는 오랜 전통과 만날 수 있다. 때로는 혼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깊이를 주는 민족적인 기억과 이야기의 광맥을 발굴하기도 한다. -208-209쪽

사는 게 장난이다. 재미있게 쓰는 작가들은 대개 스스로 재미를 느끼려 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작가의 핵심이라고 해도 좋다. 나는 글쓰기를 스스로에게 재미있는 삶과 지속적인 교육을 주는 수단으로 삼아왔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알아보면 재미있을 것 같은 주제에 대해 쓴다면 자신이 느끼는 즐거움이 글에 묻어날 것이다. 배움은 일종의 강장제다.-218쪽

글쓰기는 인격과 관계가 있다. 여러분의 가치가 건전하면 글도 건전할 것이다. 글은 언제나 의도를 가지고 시작한다. 먼저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 그것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알자. 그리고 인간미와 정직함으로 글을 완성하자. 그러면 팔 수 있는 것이 생길 것이다. -235쪽

그럼 독자는 이제 무엇을 원할까? 문장 하나를 마칠 대마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물어보자.-239쪽

먼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결정하자. 그리고 하기로 결정하자. 그리고 하자. -257쪽

이것은 무엇보다 목소리의 문제다. 아버지는 자기 ‘문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말하듯이 쓰면 그만이었다. (중략) 가족사를 쓸 때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작가’가 되려 하지 말자.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는 끊임없이 글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는 나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글쟁이였다. 자기 자신이 되자. 그러면 독자는 여러분이 어디로 가든 따라올 것이다. 마음 가는 대로 쓰면 독자도 함께 훌쩍 길을 떠날 것이다. 여러분이 내놓을 것은 여러분 자신이다. 회고록과 개인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과 여러분이 기억해낸 경험과 감성 사이의 공감이다.(중략) 회고록을 쓰는 일은 치유의 행위였다.-260쪽

훌륭한 산문 작가는 어느 정도는 시인이 되어 언제나 자기가 쓰는 글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290쪽

어떤 글을 쓰든 이렇게 소리와 리듬을 고려해서 엮어나가야 한다. (중략) 문장의 어순을 바꿔보거나, 참신하고 특이한 단어로 바꿔보거나, 문장의 길이를 바꿔서 전부 같은 기계에서 뽑아낸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해보자. 드물게 나타나는 짧은 문장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독자의 귀에 남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가진 연장은 단어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것을 독창적이고 조심스럽게 사용하는 법을 배우자.
-290-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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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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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에서 저자 한병철은 주요하게 세 사람의 논의에 대해 비판을 제기했다.

알랭 에렝베르, 한나 아렌트, 조르조 아감벤.

저자가 이 세 사람의 논의를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 지 정리해 보았다.

 

1. 알랭 에렝베르Alain Ehrenberg의 논의에 대한 비판

알랭 에렝베르는 우울증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하며 우울한 자는 컨디션이 완전히 정상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지쳐버리고 만다.”고 결론 내린다. 한병철은 에렝베르가 우울증을 단지 자아의 경제라는 관점에서만 관찰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본다. 사회의 원자화나 파편화로 인한 인간적 유대의 결핍 같은 우울증을 초래하는 시스템의 폭력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렝베르가 오늘날의 인간형을 니체의 주권적 인간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대중의 현실이 되려는 오늘날의 인간상은 니체의 주권적 초인이 아니라 그저 노동만 하는 최후의 인간일 것이라는 해석이다. (26-27)

 

아무 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성과주체는 노동이나 규율을 강요하는 외적인 지배기구로부터 자유롭지만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28-29)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을 허용하지 못한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른 바 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벤야민은 꿈의 새가 깃드는 이완과 시간의 둥지가 현대에 와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탄한다. 이제 더 이상 그 누구도 그런 것을 짜지도, 잣지도않는다. 심심함이란 속에 가장 열정적이고 화려한 안감을 댄 따뜻한 잿빛 수건이다.” 그리고 우리는 꿈꿀 때 이 수건으로 몸을 감싼다.” 우리는 수건 안감의 아라베스크 무늬 속에서 안식한다.” 이와의 소멸과 더불어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이 소실되고 귀 기울여 듣는 자의 공동체도 사라진다. 이 공동체의 정반대편에 있는 것이 우리의 활동 공동체이다.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은 깊은 사색적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에 바탕을 둔다. 지나치게 활동적인 자아에게 그런 능력은 주어지지 않는다. (32-33)

 

오직 인간만이 춤을 출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은 걷다가 깊은 심심함에 사로 잡혔고 그래서 이런 심심함의 발작 때문에 걷기에서 춤추기로 넘어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걷기가 그저 하나의 선을 따라가는 직선적 운동이라면 장식적 동작들로 이루어진 춤은 성과의 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사치이다. (33-34)

 

2. 한나 아렌트의 활동적 삶에 대한 비판

활동적 삶은 전통적으로 단순히 조급함, nec-oticum, a-scholia*로 부당하게 폄하되어왔다. 아렌트는 활동적 삶을 행동의 우위와 연관 지으면서 새롭게 정의하고 스승인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영웅적 행동주의를 열렬히 옹호한다. (37) * 여유 없음을 의미하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표현

다윈 이래 인간은 동물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이제는 다시 동물로 변신하려는 중일지도 모른다고 아렌트는 분석한다. 그러나 근대가 낳은 노동하는 동물에 대한 아렌트의 서술은 오늘날 성과사회에 대한 관찰 결과와 일치하지 않는다. 후기 근대의 노동하는 동물은 자신의 개성이나 자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팽팽하게 자아로 무장되어 수동성과는 거리가 멀다. 과도하게 활동적이고 신경과민 상태에 빠져 있는 후기 근대인들은 신과 피안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믿음까지도 상실한다. 후기 근대의 자아는 완전히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세계는 전반적으로 탈서사화되었으며Entnarrativisierung 탈서사화는 삶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든다. 서사성을 지닌 죽음의 기술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벌거벗은 생명 자체라도 건강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생겨난다. 이미 니체가 말했듯이 신의 죽음 이후에는 건강이 여신의 자리에 등극한다. (40-42)

한나 아렌트는 활동적 삶』의 마지막 장에서 본래 의도와 달리 근대의 부정적인 발전으로 인한 손상을 가장 덜 입은 것이 사유라며, 사색적 삶에 손을 들어준다. 그러나 사색적 능력의 상실이야말로 활동적 삶의 절대화와 관련이 있으며 근대적 활동사회의 히스테리와 신경증을 낳은 요인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46)

호모 사케르의 삶보다 더 많이 벌거벗겨진 것은 오늘의 삶이다. 호모 사케르는 본래 어떤 범죄로 인해 사회에서 추방당한 자를 뜻한다. 사람들은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얼마든지 그를 죽일 수 있다. 호모 사케르는 아감벤에 따르면 절대적으로 죽일 수 있는 생명이다. 강제수용소의 유대인, 관타나모 수용소의 포로들, 신분 증명 서류가 없는 사람들, 무법의 공간에서 추방을 기다리는 난민들, 산소 호흡기에 묶인 채 간신히 연명만 하는 중환자실의 환자들이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 사케르다. 후기근대의 성과사회가 우리 모두를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시켜버린다면, 사회의 변방이나 예외 상태에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배제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호모 사케르인 셈이다. 하지만 성과사회의 호모 사케르는 절대적으로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죽일 수 없는 존재하는 특성이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죽지 않는 자들Untote이다. 여기서 사케르라는 단어는 저주받은이 아니라 신성한을 의미한다. 신성한 것은 벌거벗은 생명 자체다. 그리하여 그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보존되어야 한다. (42-43)

 

3-1. 아감벤의 『예외상태』에 대한 비판

사색적 삶은 보는 법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전제한다. 니체는『우상의 황혼』에서 교육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 가지 과업을 거론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47)

활동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기계처럼 어리석게 계속되는 활동은 중단되는 일이 거의 없다. 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49)

전반적인 가속화와 활동과잉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분노Wut하는 법도 잊어가고 있다. 분노는 특별한 시간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전반적인 가속화 및 활동과잉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분노는 현재에 대해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분노의 전제는 현재 속에 중단하며 잠시 멈처 선다는 점에서 짜증과 구별된다. 가속화와 활동과잉은 넓은 시간적 지평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부정적 태도가 싹틀 여지는 전혀 없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분노는 예외적 상태이다. 세계가 점점 더 긍정적으로 되어가면서 예외적 상태도 더 줄어든다. 아감벤은 긍정성이 확대되고 있는 현실을 간과한다. 예외 상태가 한계를 이탈하여 정상 상태가 되어간다는 그의 진단과는 반대로, 오늘날 사회의 전반적인 긍정화는 모든 예외 상태를 흡수해버린다.

사회의 긍정성이 증가하면 불안이나 슬픔 같이 부정성에 바탕을 둔 감정도 약화되며 부정성의 부재는 사유를 계산으로 변질시킬 것이다. (50-51)

힘에는 긍정적 힘과 부정적 힘, 두 가지 형태가 있다. 니체의 말을 빌리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고 단순한 무력함이나 능력의 부재와는 다른 것이다.

무위nicht-zu의 부정성은 사색의 본질적 특성이기도 하다.(52-53)

(오늘날은 분노보다는 짜증과 신경질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 짜증과 분노의 관계는 공포와 불안의 관계와 유사하다. 공포가 특정 대상에 관한 것이라면 불안은 존재 자체의 문제이다.)

3-2.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를 통한 아감벤 비판

한병철이 보기에 필경사 바틀비는 아직 후기 근대에 살고 있지 않다. 따라서 병리학적 측면을 완전히 도외시하는 아감벤의 존재신학적 바틀비 해석은 소설 자체의 이야기와도 맞지 않을 뿐 더러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심리적 구조의 변동 또한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바틀비를 순수한 잠재력의 형이상학적 형상으로 승격시킨다. (58)

아감벤은 바틀비가 고집스럽게 쓰기를 거부함으로써 쓸 수 있음이라는 잠재력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며 의지를 근본적으로 포기함으로써 절대적 잠재력을 선포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아감벤에 따르면 바틀비의 거부는 뭔가를 예고하는 선포적 성격을 지닌다지만 그의 선포는 아무것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감벤은 바틀비가 어떤 심부름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59)

바틀비의 실존은 죽음으로 향하는 부정적 존재다. 이러한 부정성은 아감벤의 신학적 해석과 모순된다. 아감벤은 바틀비를 제2의 창조의 선포자, 존재와 무 사이의 경계를 다시 해소하는 탈창조의 선포자로 끌어올린다. (60)

삶의 심부름에 따라 이 편지들은 죽음을 향해 빠르게 달려간다.” 한병철이 보기에 이 소설의 중심 메시지는 삶을 위한 모든 노력은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카프카의 「단식곡예사」에서 자유의 감정을 주는 것은 오직 거절의 부정성 뿐이다. 소설은 메시아적 희망을 향해 열려있지 않다.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라는 바틀비의 상용구는 결코 기독교적, 메시아적 의미로 해석될 수 없다. 이것은 탈창조의 이야기가 아니라 탈진의 이야기이다. (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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