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생각쓰기
윌리엄 진서 지음, 이한중 옮김 / 돌베개 / 2007년 11월
구판절판


진부한 표현은 죽음의 키스
진부한 문구를 근절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공기처럼 우리 주위를 떠다니며, 언제나 도움을 주려는 친한 친구처럼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 대신 복잡한 생각을 단순한 은유의 형태로 표현해준다. 진부한 표현은 그렇게 해서 생겨난다. 주의 깊은 필자도 초고에서는 그런 표현을 꽤 많이 쓴다. 하지만 그 뒤에는 그것들을 쓸어낼 기회가 온다. 초고를 고쳐 쓰고 소리 내어 읽을 때는 언제나 진부한 문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얼마나 수상쩍게 들리는지 귀를 세워보자, 자기만의 참신한 표현을 만들어내려 애쓰는 대신 뻔하고 낡은 표현에 만족하지 않았느냐고 비난하는 것 같지는 않은가. 진부한 표현은 감각의 적이다. -207쪽

다른 작가를 모방하기를 주저하지 말자. 모방은 예술이나 기술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치는 창조적 과정의 일부다. 바흐도 피카소도 애초부터 완전히 바흐나 피카소인 채로 솟아난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본보기가 있어야 했다. 글쓰기에서는 특히 그렇다. 관심 있는 분야에서 최고의 작가를 골라서 그 작품을 큰 소리로 읽어보자. 그들의 목소리와 감각을, 다시 말해 언어에 대한 태도를 귀로 받아들이자. 모방 때문에 자신의 목소리와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일랑 말자. 곧 그 껍질을 벗고 여러분 자신으로 자라게 될 테니.
다른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 자신을 풍성하게 하는 오랜 전통과 만날 수 있다. 때로는 혼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깊이를 주는 민족적인 기억과 이야기의 광맥을 발굴하기도 한다. -208-209쪽

사는 게 장난이다. 재미있게 쓰는 작가들은 대개 스스로 재미를 느끼려 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작가의 핵심이라고 해도 좋다. 나는 글쓰기를 스스로에게 재미있는 삶과 지속적인 교육을 주는 수단으로 삼아왔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알아보면 재미있을 것 같은 주제에 대해 쓴다면 자신이 느끼는 즐거움이 글에 묻어날 것이다. 배움은 일종의 강장제다.-218쪽

글쓰기는 인격과 관계가 있다. 여러분의 가치가 건전하면 글도 건전할 것이다. 글은 언제나 의도를 가지고 시작한다. 먼저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 그것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 알자. 그리고 인간미와 정직함으로 글을 완성하자. 그러면 팔 수 있는 것이 생길 것이다. -235쪽

그럼 독자는 이제 무엇을 원할까? 문장 하나를 마칠 대마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물어보자.-239쪽

먼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결정하자. 그리고 하기로 결정하자. 그리고 하자. -257쪽

이것은 무엇보다 목소리의 문제다. 아버지는 자기 ‘문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말하듯이 쓰면 그만이었다. (중략) 가족사를 쓸 때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작가’가 되려 하지 말자.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는 끊임없이 글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는 나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글쟁이였다. 자기 자신이 되자. 그러면 독자는 여러분이 어디로 가든 따라올 것이다. 마음 가는 대로 쓰면 독자도 함께 훌쩍 길을 떠날 것이다. 여러분이 내놓을 것은 여러분 자신이다. 회고록과 개인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과 여러분이 기억해낸 경험과 감성 사이의 공감이다.(중략) 회고록을 쓰는 일은 치유의 행위였다.-260쪽

훌륭한 산문 작가는 어느 정도는 시인이 되어 언제나 자기가 쓰는 글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290쪽

어떤 글을 쓰든 이렇게 소리와 리듬을 고려해서 엮어나가야 한다. (중략) 문장의 어순을 바꿔보거나, 참신하고 특이한 단어로 바꿔보거나, 문장의 길이를 바꿔서 전부 같은 기계에서 뽑아낸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해보자. 드물게 나타나는 짧은 문장이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독자의 귀에 남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가진 연장은 단어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것을 독창적이고 조심스럽게 사용하는 법을 배우자.
-290-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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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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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에서 저자 한병철은 주요하게 세 사람의 논의에 대해 비판을 제기했다.

알랭 에렝베르, 한나 아렌트, 조르조 아감벤.

저자가 이 세 사람의 논의를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 지 정리해 보았다.

 

1. 알랭 에렝베르Alain Ehrenberg의 논의에 대한 비판

알랭 에렝베르는 우울증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하며 우울한 자는 컨디션이 완전히 정상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지쳐버리고 만다.”고 결론 내린다. 한병철은 에렝베르가 우울증을 단지 자아의 경제라는 관점에서만 관찰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본다. 사회의 원자화나 파편화로 인한 인간적 유대의 결핍 같은 우울증을 초래하는 시스템의 폭력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렝베르가 오늘날의 인간형을 니체의 주권적 인간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대중의 현실이 되려는 오늘날의 인간상은 니체의 주권적 초인이 아니라 그저 노동만 하는 최후의 인간일 것이라는 해석이다. (26-27)

 

아무 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성과주체는 노동이나 규율을 강요하는 외적인 지배기구로부터 자유롭지만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28-29)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을 허용하지 못한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른 바 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벤야민은 꿈의 새가 깃드는 이완과 시간의 둥지가 현대에 와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탄한다. 이제 더 이상 그 누구도 그런 것을 짜지도, 잣지도않는다. 심심함이란 속에 가장 열정적이고 화려한 안감을 댄 따뜻한 잿빛 수건이다.” 그리고 우리는 꿈꿀 때 이 수건으로 몸을 감싼다.” 우리는 수건 안감의 아라베스크 무늬 속에서 안식한다.” 이와의 소멸과 더불어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이 소실되고 귀 기울여 듣는 자의 공동체도 사라진다. 이 공동체의 정반대편에 있는 것이 우리의 활동 공동체이다.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은 깊은 사색적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에 바탕을 둔다. 지나치게 활동적인 자아에게 그런 능력은 주어지지 않는다. (32-33)

 

오직 인간만이 춤을 출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은 걷다가 깊은 심심함에 사로 잡혔고 그래서 이런 심심함의 발작 때문에 걷기에서 춤추기로 넘어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걷기가 그저 하나의 선을 따라가는 직선적 운동이라면 장식적 동작들로 이루어진 춤은 성과의 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사치이다. (33-34)

 

2. 한나 아렌트의 활동적 삶에 대한 비판

활동적 삶은 전통적으로 단순히 조급함, nec-oticum, a-scholia*로 부당하게 폄하되어왔다. 아렌트는 활동적 삶을 행동의 우위와 연관 지으면서 새롭게 정의하고 스승인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영웅적 행동주의를 열렬히 옹호한다. (37) * 여유 없음을 의미하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표현

다윈 이래 인간은 동물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이제는 다시 동물로 변신하려는 중일지도 모른다고 아렌트는 분석한다. 그러나 근대가 낳은 노동하는 동물에 대한 아렌트의 서술은 오늘날 성과사회에 대한 관찰 결과와 일치하지 않는다. 후기 근대의 노동하는 동물은 자신의 개성이나 자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팽팽하게 자아로 무장되어 수동성과는 거리가 멀다. 과도하게 활동적이고 신경과민 상태에 빠져 있는 후기 근대인들은 신과 피안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믿음까지도 상실한다. 후기 근대의 자아는 완전히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세계는 전반적으로 탈서사화되었으며Entnarrativisierung 탈서사화는 삶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든다. 서사성을 지닌 죽음의 기술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벌거벗은 생명 자체라도 건강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생겨난다. 이미 니체가 말했듯이 신의 죽음 이후에는 건강이 여신의 자리에 등극한다. (40-42)

한나 아렌트는 활동적 삶』의 마지막 장에서 본래 의도와 달리 근대의 부정적인 발전으로 인한 손상을 가장 덜 입은 것이 사유라며, 사색적 삶에 손을 들어준다. 그러나 사색적 능력의 상실이야말로 활동적 삶의 절대화와 관련이 있으며 근대적 활동사회의 히스테리와 신경증을 낳은 요인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46)

호모 사케르의 삶보다 더 많이 벌거벗겨진 것은 오늘의 삶이다. 호모 사케르는 본래 어떤 범죄로 인해 사회에서 추방당한 자를 뜻한다. 사람들은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얼마든지 그를 죽일 수 있다. 호모 사케르는 아감벤에 따르면 절대적으로 죽일 수 있는 생명이다. 강제수용소의 유대인, 관타나모 수용소의 포로들, 신분 증명 서류가 없는 사람들, 무법의 공간에서 추방을 기다리는 난민들, 산소 호흡기에 묶인 채 간신히 연명만 하는 중환자실의 환자들이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 사케르다. 후기근대의 성과사회가 우리 모두를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시켜버린다면, 사회의 변방이나 예외 상태에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배제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호모 사케르인 셈이다. 하지만 성과사회의 호모 사케르는 절대적으로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죽일 수 없는 존재하는 특성이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죽지 않는 자들Untote이다. 여기서 사케르라는 단어는 저주받은이 아니라 신성한을 의미한다. 신성한 것은 벌거벗은 생명 자체다. 그리하여 그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보존되어야 한다. (42-43)

 

3-1. 아감벤의 『예외상태』에 대한 비판

사색적 삶은 보는 법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전제한다. 니체는『우상의 황혼』에서 교육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 가지 과업을 거론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47)

활동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기계처럼 어리석게 계속되는 활동은 중단되는 일이 거의 없다. 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49)

전반적인 가속화와 활동과잉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분노Wut하는 법도 잊어가고 있다. 분노는 특별한 시간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전반적인 가속화 및 활동과잉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분노는 현재에 대해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분노의 전제는 현재 속에 중단하며 잠시 멈처 선다는 점에서 짜증과 구별된다. 가속화와 활동과잉은 넓은 시간적 지평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부정적 태도가 싹틀 여지는 전혀 없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분노는 예외적 상태이다. 세계가 점점 더 긍정적으로 되어가면서 예외적 상태도 더 줄어든다. 아감벤은 긍정성이 확대되고 있는 현실을 간과한다. 예외 상태가 한계를 이탈하여 정상 상태가 되어간다는 그의 진단과는 반대로, 오늘날 사회의 전반적인 긍정화는 모든 예외 상태를 흡수해버린다.

사회의 긍정성이 증가하면 불안이나 슬픔 같이 부정성에 바탕을 둔 감정도 약화되며 부정성의 부재는 사유를 계산으로 변질시킬 것이다. (50-51)

힘에는 긍정적 힘과 부정적 힘, 두 가지 형태가 있다. 니체의 말을 빌리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고 단순한 무력함이나 능력의 부재와는 다른 것이다.

무위nicht-zu의 부정성은 사색의 본질적 특성이기도 하다.(52-53)

(오늘날은 분노보다는 짜증과 신경질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 짜증과 분노의 관계는 공포와 불안의 관계와 유사하다. 공포가 특정 대상에 관한 것이라면 불안은 존재 자체의 문제이다.)

3-2.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를 통한 아감벤 비판

한병철이 보기에 필경사 바틀비는 아직 후기 근대에 살고 있지 않다. 따라서 병리학적 측면을 완전히 도외시하는 아감벤의 존재신학적 바틀비 해석은 소설 자체의 이야기와도 맞지 않을 뿐 더러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심리적 구조의 변동 또한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바틀비를 순수한 잠재력의 형이상학적 형상으로 승격시킨다. (58)

아감벤은 바틀비가 고집스럽게 쓰기를 거부함으로써 쓸 수 있음이라는 잠재력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며 의지를 근본적으로 포기함으로써 절대적 잠재력을 선포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아감벤에 따르면 바틀비의 거부는 뭔가를 예고하는 선포적 성격을 지닌다지만 그의 선포는 아무것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감벤은 바틀비가 어떤 심부름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59)

바틀비의 실존은 죽음으로 향하는 부정적 존재다. 이러한 부정성은 아감벤의 신학적 해석과 모순된다. 아감벤은 바틀비를 제2의 창조의 선포자, 존재와 무 사이의 경계를 다시 해소하는 탈창조의 선포자로 끌어올린다. (60)

삶의 심부름에 따라 이 편지들은 죽음을 향해 빠르게 달려간다.” 한병철이 보기에 이 소설의 중심 메시지는 삶을 위한 모든 노력은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카프카의 「단식곡예사」에서 자유의 감정을 주는 것은 오직 거절의 부정성 뿐이다. 소설은 메시아적 희망을 향해 열려있지 않다.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라는 바틀비의 상용구는 결코 기독교적, 메시아적 의미로 해석될 수 없다. 이것은 탈창조의 이야기가 아니라 탈진의 이야기이다. (6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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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 정성일.정우열의 영화편애
정성일.정우열 지음 / 바다출판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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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차이밍량)에게 누군가 물었다.
"당신은 상업 영화와 예술 영화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차이밍량은 대답했다.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면 상업 영화이고, 나의 내일을 걱정하면 예술 영화입니다. 그러므로 상업 영화는 항상 책임질 수 없는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예술 영화는 자기가 알 수 있는 한계 안에서 그냥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이 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기가 다루려는 테마가 커질수록 그것은 자기가 책임질 수 없는 말을 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예술에 해당하는 말일 것이다. -454~4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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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본다는 것
케네스 클라크 지음, 엄미정 옮김 / 엑스오북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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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림이 주는 기쁨을 더 많이 더 오랫동안 느낄 수 있으려면 그림에 관해 배워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방금 거론했던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동의하겠지만) 만약 미술이 즐거움을 주는 것 이상이라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말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미술은 막대사탕이나 풀 향기가 나는 상큼한 퀴멜 주 한 잔처럼 한 순간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는 게 아니다. 위대한 미술 작품의 의미, 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그 의미의 이부가 영혼에 활력을 주듯 우리의 삶과 관련이 있어야만 한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활발한 참여를 요하는데, 초기 단계에서는 어느 정도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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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펭귄클래식 48
조지 오웰 지음, 이기한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0월
절판


그녀가 말하는 동안 그는 정통성이 무엇인가를 모르면서 정통적인 태도를 갖는다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가를 깨달았다. 어떤 점에서 당의 세계관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잘 납득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며 지금 일어나고 있는 공적 사건에 충분한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가장 악랄한 현실침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신이 정상적이다. 마치 한 알의 곡식이 소화되지 않고 새 몸뚱이를 거쳐 탈없이 그대로 나오듯, 뒤에 아무런 찌꺼기도 남기지 않으므로 그들이 무얼 삼키든 목을 넘어간 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해로움도 줄 수 없는 것이다.

「이중사고」를 가장할 수 없는 사람들이 「이중사고」를 만들어 대고 그것은 거대한 정신적 사기방법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임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우리 사회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현실 그대로의 세계를 가장 모르는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이해력이 클수록 미망(迷妄)이 크고, 많이 알면 알수록 착란이 심해진다. 이러한 좋은 예가 전쟁에의 열광이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아질수록 심해진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다.

전쟁에 대해 거의 이성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분쟁지역에 사는 예속민들이다. 이 사람들에게는 전쟁이란 파도처럼 자기 몸 위에 덮치는 끊임없는 재앙이다. 어떤 편이 이기는가는 전혀 관심 밖의 일이다. 통치자가 바뀌었다라도 전에 받던 취급을 받으며 새 주인을 위해 전과 같은 일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이들보다 약간 나은 대접을 받는 소위 「노동자」들은 가끔 가다 전쟁을 의식할 정도다. 필요할 때면 그들은 광적인 공포와 증오에 흥분되기도 하지만 혼자 있게 되면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잊어버린다. 당원급, 특히 내부당원에 이르면 진짜 전쟁열에 휩싸버린다. 당원급, 특히 내부당원에 이르면 진짜 전쟁열에 휩싸인다. 세계의 정복이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 더욱 굳게 믿기워진다. 이러한 상반된 것의 결합-무지와 지식, 맹신과 냉소의 결합이 오세아니아 사회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다. 공식적인 이념은 그럴 이유가 없는 데까지 모순을 지니고 있다.

그는 침대에서 돌아서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권력의 성직자(聖職者)야, 신(神)은 권력이고.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자네가 보기에 권력은 말뿐일 거야. 이제는 자네가 권력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때야. 자네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권력이란 집단적이란 걸세. 개인은 오직 개인임을 포기할 때 권력을 갖게 돼. <자유의 예속>이란 당의 슬로건을 알겠지. 그것을 역(逆)으로 생각해 보았나? 예속은 자유라고. 혼자서, 자유로이 있으면 인간은 언제나 패배해.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죽을 운명에 처해있고 죽음은 가장 커다란 패배이기 때문이야. 그러나 인간이 완전하고 명백한 복종을 행할 때, 그리하여 자신의 존재를 버리고 당에 포섭되어 그 자신이 곧 당이 된다면 그는 전능하고 불멸의 존재가 되는 거야. 둘째로 알아 둘 것은 권력이란 인간에 대한 권력이란 점일세. 인간의 육체뿐 아니라 무엇보다 정신을 지배하는 권력이어야 해. 사물에 대한 권력, 자네 식으로 하자면 외적인 실재에 대한 권력은 중요하지 않아. 사물에 대한 우리의 권력은 이미 절대적이야.」
-238쪽

윈스턴은 잠시 동안 다이얼을 무시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앉으려고 애를 썼으나 몸을 비트는 바람에 고통만 왔을 뿐이었다.
「그럼 어떻게 사물을 지배할 수 있단 말예요?」 그는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날씨도, 인력(引力)의 법칙도 지배할 수 없는데. 게다가 병과 고통과 죽음이……」
오브리엔은 손짓으로 그의 말을 막더니 자기가 말을 계속했다.
-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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