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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평점 :
피로사회에서 저자 한병철은 주요하게 세 사람의 논의에 대해 비판을 제기했다.
알랭 에렝베르, 한나 아렌트, 조르조 아감벤.
저자가 이 세 사람의 논의를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 지 정리해 보았다.
1. 알랭 에렝베르Alain Ehrenberg의 논의에 대한 비판
알랭 에렝베르는 우울증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하며 “우울한 자는 컨디션이 완전히 정상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지쳐버리고 만다.”고 결론 내린다. 한병철은 에렝베르가 우울증을 단지 자아의 경제라는 관점에서만 관찰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본다. 사회의 원자화나 파편화로 인한 인간적 유대의 결핍 같은 우울증을 초래하는 시스템의 폭력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렝베르가 오늘날의 인간형을 니체의 주권적 인간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대중의 현실이 되려는 오늘날의 인간상은 니체의 주권적 초인이 아니라 그저 노동만 하는 최후의 인간일 것이라는 해석이다. (26-27)
아무 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성과주체는 노동이나 규율을 강요하는 외적인 지배기구로부터 자유롭지만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28-29)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 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을 허용하지 못한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른 바 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벤야민은 꿈의 새가 깃드는 이완과 시간의 둥지가 현대에 와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탄한다. 이제 더 이상 그 누구도 그런 것을 “짜지도, 잣지도” 않는다. 심심함이란 “속에 가장 열정적이고 화려한 안감을 댄 따뜻한 잿빛 수건이다.” 그리고 “우리는 꿈꿀 때 이 수건으로 몸을 감싼다.” 우리는 “수건 안감의 아라베스크 무늬 속에서 안식한다.” 이와의 소멸과 더불어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이 소실되고 “귀 기울여 듣는 자의 공동체”도 사라진다. 이 공동체의 정반대편에 있는 것이 우리의 활동 공동체이다.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은 깊은 사색적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에 바탕을 둔다. 지나치게 활동적인 자아에게 그런 능력은 주어지지 않는다. (32-33)
오직 인간만이 춤을 출 수 있다. 어쩌면 인간은 걷다가 깊은 심심함에 사로 잡혔고 그래서 이런 심심함의 발작 때문에 걷기에서 춤추기로 넘어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걷기가 그저 하나의 선을 따라가는 직선적 운동이라면 장식적 동작들로 이루어진 춤은 성과의 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사치이다. (33-34)
2. 한나 아렌트의 『활동적 삶』에 대한 비판
활동적 삶은 전통적으로 단순히 조급함, nec-oticum, a-scholia*로 부당하게 폄하되어왔다. 아렌트는 활동적 삶을 행동의 우위와 연관 지으면서 새롭게 정의하고 스승인 하이데거와 마찬가지로 영웅적 행동주의를 열렬히 옹호한다. (37) * 여유 없음을 의미하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표현
“다윈 이래 인간은 동물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이제는 다시 동물로 변신하려는 중일지도 모른다”고 아렌트는 분석한다. 그러나 근대가 낳은 노동하는 동물에 대한 아렌트의 서술은 오늘날 성과사회에 대한 관찰 결과와 일치하지 않는다. 후기 근대의 노동하는 동물은 자신의 개성이나 자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팽팽하게 자아로 무장되어 수동성과는 거리가 멀다. 과도하게 활동적이고 신경과민 상태에 빠져 있는 후기 근대인들은 신과 피안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믿음까지도 상실한다. 후기 근대의 자아는 완전히 개별적으로 고립되어 있고 세계는 전반적으로 탈서사화되었으며Entnarrativisierung 탈서사화는 삶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든다. 서사성을 지닌 죽음의 기술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벌거벗은 생명 자체라도 건강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생겨난다. 이미 니체가 말했듯이 신의 죽음 이후에는 건강이 여신의 자리에 등극한다. (40-42)
한나 아렌트는 『활동적 삶』의 마지막 장에서 본래 의도와 달리 근대의 부정적인 발전으로 인한 손상을 가장 덜 입은 것이 사유라며, 사색적 삶에 손을 들어준다. 그러나 사색적 능력의 상실이야말로 활동적 삶의 절대화와 관련이 있으며 근대적 활동사회의 히스테리와 신경증을 낳은 요인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46)
호모 사케르의 삶보다 더 많이 벌거벗겨진 것은 오늘의 삶이다. 호모 사케르는 본래 어떤 범죄로 인해 사회에서 추방당한 자를 뜻한다. 사람들은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얼마든지 그를 죽일 수 있다. 호모 사케르는 아감벤에 따르면 절대적으로 죽일 수 있는 생명이다. 강제수용소의 유대인, 관타나모 수용소의 포로들, 신분 증명 서류가 없는 사람들, 무법의 공간에서 추방을 기다리는 난민들, 산소 호흡기에 묶인 채 간신히 연명만 하는 중환자실의 환자들이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 사케르다. 후기근대의 성과사회가 우리 모두를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시켜버린다면, 사회의 변방이나 예외 상태에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배제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호모 사케르인 셈이다. 하지만 성과사회의 호모 사케르는 절대적으로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죽일 수 없는 존재하는 특성이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죽지 않는 자들Untote이다. 여기서 사케르라는 단어는 ‘저주받은’이 아니라 ‘신성한’을 의미한다. 신성한 것은 벌거벗은 생명 자체다. 그리하여 그것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보존되어야 한다. (42-43)
3-1. 아감벤의 『예외상태』에 대한 비판
사색적 삶은 보는 법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전제한다. 니체는『우상의 황혼』에서 교육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 가지 과업을 거론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47)
활동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기계처럼 어리석게 계속되는 활동은 중단되는 일이 거의 없다. 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49)
전반적인 가속화와 활동과잉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분노Wut하는 법도 잊어가고 있다. 분노는 특별한 시간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전반적인 가속화 및 활동과잉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분노는 현재에 대해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분노의 전제는 현재 속에 중단하며 잠시 멈처 선다는 점에서 짜증과 구별된다. 가속화와 활동과잉은 넓은 시간적 지평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부정적 태도가 싹틀 여지는 전혀 없다.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분노는 예외적 상태이다. 세계가 점점 더 긍정적으로 되어가면서 예외적 상태도 더 줄어든다. 아감벤은 긍정성이 확대되고 있는 현실을 간과한다. 예외 상태가 한계를 이탈하여 정상 상태가 되어간다는 그의 진단과는 반대로, 오늘날 사회의 전반적인 긍정화는 모든 예외 상태를 흡수해버린다.
사회의 긍정성이 증가하면 불안이나 슬픔 같이 부정성에 바탕을 둔 감정도 약화되며 부정성의 부재는 사유를 계산으로 변질시킬 것이다. (50-51)
힘에는 긍정적 힘과 부정적 힘, 두 가지 형태가 있다. 니체의 말을 빌리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고 단순한 무력함이나 능력의 부재와는 다른 것이다.
무위nicht-zu의 부정성은 사색의 본질적 특성이기도 하다.(52-53)
(오늘날은 분노보다는 짜증과 신경질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 짜증과 분노의 관계는 공포와 불안의 관계와 유사하다. 공포가 특정 대상에 관한 것이라면 불안은 존재 자체의 문제이다.)
3-2.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를 통한 아감벤 비판
한병철이 보기에 필경사 바틀비는 아직 후기 근대에 살고 있지 않다. 따라서 병리학적 측면을 완전히 도외시하는 아감벤의 존재신학적 바틀비 해석은 소설 자체의 이야기와도 맞지 않을 뿐 더러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심리적 구조의 변동 또한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바틀비를 순수한 잠재력의 형이상학적 형상으로 승격시킨다. (58)
아감벤은 바틀비가 고집스럽게 쓰기를 거부함으로써 ‘쓸 수 있음’이라는 잠재력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며 의지를 근본적으로 포기함으로써 절대적 잠재력을 선포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아감벤에 따르면 바틀비의 거부는 뭔가를 예고하는 선포적 성격을 지닌다지만 그의 선포는 아무것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감벤은 바틀비가 어떤 심부름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59)
바틀비의 실존은 죽음으로 향하는 부정적 존재다. 이러한 부정성은 아감벤의 신학적 해석과 모순된다. 아감벤은 바틀비를 제2의 창조의 선포자, 존재와 무 사이의 경계를 다시 해소하는 “탈창조”의 선포자로 끌어올린다. (60)
“삶의 심부름에 따라 이 편지들은 죽음을 향해 빠르게 달려간다.” 한병철이 보기에 이 소설의 중심 메시지는 삶을 위한 모든 노력은 죽음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카프카의 「단식곡예사」에서 자유의 감정을 주는 것은 오직 거절의 부정성 뿐이다. 소설은 메시아적 희망을 향해 열려있지 않다.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라는 바틀비의 상용구는 결코 기독교적, 메시아적 의미로 해석될 수 없다. 이것은 탈창조의 이야기가 아니라 ‘탈진’의 이야기이다. (6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