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의 사다리에 오르려는 자가 가장 먼저 직면하는 문제는 배움의 문제다. 소크라테스가 제시하고 실천하는 배움은 via negativa와 via positiva로 이루어져 있다. 알키비아데스는 배우는 자가 via negativa의 단계에서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구체적 사례다.
에로스는 좋은 것을 자기 것으로 늘 있게 하는 것이다. 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은 불사(不死)에 대한 욕망이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이기에 불사를 갈구하고, 불사를 갈구하기에 좋은 것을 추구한다. 그런데 좋은 것이 자신에게 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연습"해야 한다. "연습은 떠나가는 기억 대신에 새로운 기억을 다시 만들어 넣어 줌으로써, 같은 앎으로 보일 정도로 앎을 보존"하며, 가사적(可死的)인 것은 "다 이런 방식으로 보존"된다. <<향연>>의 첫 문장 "이야기할 준비가 꽤 되어있다"는 "직역하면 ‘연습을 안 거친 상태가 아니다’, 즉 '꽤 연습을 거쳤다'라고 옮길 수 있다.” 이처럼 <<향연>>은 연습에 관한 텍스트이기도 하다.
연습을 통해 에로스의 사다리를 오를 때 고려해야 할 것은 “올바르게 가려는 자"와 "이끄는 자"의 관계, 즉 배움과 관련한 문제다. 올바르게 가려는 자인 동시에 이끄는 자인 소크라테스는 배움을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준다. 주지하듯이, 소크라테스의 배움의 방법론에는 via negativa와 via positiva가 있다. 배움의 단계에 들어서면 먼저 via negativa를 통과해야 한다. 무지를 자각하게 하는 via negativa는 버리는 것, 비우는 것이다. 참다운 것이 아닌 것, 자기 것(이기에 좋은 것이라 여겼던 것)을 모두 없애는 것이다. 이렇게 via negativa를 거쳐 via positiva로 나갈 때 사다리의 한 단계 위로 올라서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이야기가 막 끝났을 때 술에 취한 알키비아데스가 등장한다. 그는 앞서 전개된 에로스의 사다리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소크라테스를 오만한 사람이라고 비난한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고 여러 차례 유혹을 뿌리쳤기 때문이다. 아테네의 정치가였던 알키비아데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소크라테스) 그분은 나 자신이 많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아테네 사람들의 일을 하려 하고 있다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거든. 그래서 나는 마치 세이렌들에게서 피하듯 어거지로 귀를 막고 도망쳐 나온다네.“ 알키비아데스는 via negativa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좋음의 이데아를 인식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via negativa를 넘어서야 한다. 그것을 넘어서지 못한 알키비아데스는 "여전히 소크라테스 선생님에 대한 사랑에 연연해"하고 있지만, 아가톤과 소크라테스의 살가운 대화를 듣고도 어찌할 방도가 없다. 아가톤은 "그(알키비아데스)의 뜻대로 되는 일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선생님 곁으로 가서 앉을 테니까요."라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아무렴, 그리 하게. 이리 와서 내 아래쪽에 앉게."라고 대답한다. 참으로 좋은 것,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해도,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원하지만, 거기에 이르지는 못한 채 번번이 넘어지고 마는 자는 알키비아데스와 닮은 자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참으로 씁쓸하고도 쓸쓸한 自覺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