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는 눈앞에 보이는 事物들의 變化에 關心을 集中하였다. 이 變化는 곧 運動(kinesis)이며, 이는 潛在態(dynamis)에서 現實態(entelecheia)로 展開해가는 目的論的 過程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目的論的 思惟는 오늘날에도 世界에 대한 包括的 說明 틀로 作動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不變하는 것이 있음을 認定한다. 그런데 플라톤은 그 不變하는 것을 찾아내서 그것에 基盤을 두고 變化하는 世界의 中心을 잡아보려 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오히려 實在하는 事物들의 變化에 더 깊은 關心을 가졌다. 世界에 대한 說明을 體系的으로 完成하기 위해서는 變化하는 世界를 잘 說明해야 할 必要가 있기 때문이다. 變化의 問題에 集中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事物을 그 事物일 수 있게 하는 本質의 變化 與否에 따라 偶然的 變化와 實體的 變化를 區分한다. 外形의 變化뿐만 아니라 質的 變化까지 包含하여 變化를 說明하는 것이다. 이로써 世界는 물론 人間의 삶과 內面의 變化에 대해서도 槪念的 說明이 可能해진다.

本質에 있어서의 變化를 일컫는 實體的 變化는 目的論的 運動이다. ‘왜 사는가’라는 물음에 ‘좋음을 얻기 위하여’라고 對答한다면 이는 ‘좋음’이 人生의 ‘目的’이라는 의미이다. 人間은 좋음의 씨앗을 潛在態로 內面에 지니고 태어났으며, 좋음을 實現함으로써 目的을 成就한 狀態, 즉 現實態로 實體的 變化를 이룬다. 이처럼 人間을 비롯한 모든 個物에는 固有한 目的이 內在하고 있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目的論이다. 完成된 狀態라는 끝(telos)을 上程하고 그 끝을 향해, 目的의 完成을 향해 나아가는 過程이 運動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差異가 드러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人間의 神的 本性은 外部로부터 人間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人間의 內面에 潛在態로 지니고 태어나는 것이라고 믿었다.

窮極的 目的으로서의 完成된 狀態를 上程하는 모든 思想은 아리스토텔레스의 目的論的 思惟에 起因한다. 根源的 意味에서 進步主義者는 目的論者라 할 수 있다. 어떤 目的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進步라는 意味에서 그러하다. 그런데 이 目的이라고 하는 完成의 側面에 있어서 어떤 狀態를 完成으로 볼 것인가는 사람마다 다르다. 따라서 完成된 狀態가 무엇인가라는 進步의 目的에 대한 明確한 定義가 要求된다. 目的論은 個人의 次元에서와는 달리 社會的, 國家的 次元에서는 全體主義로 흐를 危險이 있다. 社會가 追求해야 할 目的을 設定하고 그 目的을 향해 社會 全體가 움직여가게 되면 人間은 道具로 轉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目的論은 獨斷論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哲學의 中心을 이루는 基本的 原理는 目的論이다. 이는 古代의 낡은 思惟가 아닌 現在의 政治 理論에도 適用되고 있는 現實的 思惟임을 留念해야 한다. 눈앞에 펼쳐진 事態를 올바르게 把握하고 判斷하려면 目的論的 思惟의 不斷한 鍊習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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