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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얼굴
아베 코보 지음, 이정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26년 7월
평점 :
"당신에게 천 가지 표정이 있다고 하면
내게는 하나의 얼굴조차 없다."
주인공을 어떻게 정의하면 될까? 소외되고 고립된 남자?
혹은 자기가 만든 감옥 속에 갇힌 채 끝없이 자신과 이야기하는
남자? 얼굴을 잃은 한 남자의 존재론적 위기를 드러내는
소설 <타인의 얼굴>
인간의 얼굴이란 무엇인가? 소통과 같은 사회적 관계에서
얼굴은 어떤 역할을 하는 걸까? 평소에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많은 질문을 떠올리게 한 소설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얼굴”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나의 얼굴은 지금까지 타인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왔을까?
연구원인 주인공은 실험을 하다가 폭발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얼굴 전체에 화상을 입게 된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살아가게 되는데, 세상 사람들의 시선과 아내의 차가운
태도 때문에 상처를 입게 된다.
고민 끝에 그는 아마도 아내에게 일종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혹은 사랑을 되찾기 위한 방법으로
가면을 제작하기로 결심한다.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본떠 만든
가면을 쓰고 타인인 척 아내에게 접근해 그녀를 유혹하겠다는
위험한 계획이다.
그리고 이 모든 내용을 아내가 알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3가지 색깔의 노트에 일기 형식으로 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이 책이 다루는 부분이다.
주인공의 내밀한 심리적 변화와 갈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설정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읽기 쉬운 책은 아니었다. 자신이 만든
감옥에 갇힌 주인공은 한마디로 땅굴을 파고든다.
떠오르는 생각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디테일하게
정리한 뒤 마치 전시하듯 독자들에게 드러낸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가면이다. 그가 다른 이의 얼굴을 본떠서
만든 가면을 쓰고 난 후 주인공은 이전과 다른 행동을 한다.
마치 가면이 독립된 인격을 지니고 자신에게 생각과 행동을
명령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가면이 살아 있는 것일까? 나는 가면에 새로운 인격이
들어섰다기보다는 주인공이 이제 그동안 관습과 제도라는 시스템 안에
눌러두었던 욕망을 드러내게 되었다고 본다. 어쩌면 감춰뒀던
의처증이 드러나 아내를 유혹하는 연기를 하게 된 것은 아닐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떠올렸다.
마치 거울을 보고 스스로와 내면의 대화를 끊임없이 이어나가는 듯한
작품. 죄책감과 심리적 갈등,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욕망 등등
작품의 주인공은 자기 마음을 집요하게 분석하고 해석한다.
주인공은 자신의 불행이 망가진 얼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날선 시선이 그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을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가 느끼는 깊은 외로움과 절망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진정한 소통을 거부하는
그의 마음이 만들어낸 감옥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타인의 얼굴>은 얼굴을 잃은 남자의 기묘한 이야기이면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지를 묻는 철학적인 소설이다.
가면은 본래의 나를 감추는 물건일까, 아니면 평소 숨겨두었던 나를
드러내는 물건일까. 책을 덮고 나서도 그 질문이 오래 남는다.
"당신도 마지막에는 자기가 가면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맨얼굴이고,
맨얼굴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가면이었을는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계시지 않았나요."
-3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