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망설이다 하루가 다 갔다 - 불안, 걱정, 회피의 사이클에서 벗어나기 위한 뇌 회복 훈련
샐리 M. 윈스턴.마틴 N. 세이프 지음, 박이봄 옮김 / 심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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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고나서 떠오르는 키워드를 딱 하나만 선택해보라고 한다면 아마 모든 독자들이 ‘예기불안’을 선택하지 않을까? 이 단어를 처음 읽고는 무슨 뜻인지, 불안과는 다른 것인지 등의 질문이 떠올랐고 생소한 이 단어가 곧 독서의 계기가 되었다.


  저자는 서문에서부터 이 책을 꼭 순서대로 읽을 것을 당부한다. 앞부분에서 설명하는 불안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과정들을 이해해야 후반부에 제시되는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급한 마음에 곧장 해결책을 찾아 8장부터 펼친 독자는 이런 주의를 마주하게 된다. 그러니 웬만하면 저자의 의도대로 독서할 것을 권한다.


  그래서 도대체 예기불안이 뭔데? 나와 같은 호기심으로 이 리뷰를 보고 있을 분을 위해 책의 정의를 알려드리자면   ‘예기불안anticipatory anxiety’이란 스스로 불안하거나 불편하게 만들 것이라고 예상되는 사건과 상황들을 예측하면서 경험하는 불안을 의미한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면 21쪽에 실린 공포의 3단계를 보면 좀 더 이해가 쉽다. 예를 들어 ‘나는 벌이 무섭다’고 두려움을 가질 수 있다. 근데 그 다음에 ‘벌을 보면, 나는 너무나 공포에 질려서 공황발작을 일으키다가 통제력을 잃거나 심장발작을 일으킬지도 몰라.’ 라고 생각한다면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생각에서 더 나아가 ‘내가 벌을 보고 공황발작을 일으켜서 통제력을 잃고 무언가 미친 짓을 할까 봐 다음주에 있을 캠핑 생각만 해도 끔찍해.’까지 다다를 경우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이 두려워지는 공포의 세 번째 단계, 바로 이 책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예기불안이다.


  마지막 예시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예기불안은 어떤 일이 미래의 특정 시점에 맞닥뜨릴 것이라 예측할 때, 예측된 시점 이전의 기간 동안 발생한다는 특징이 있다. 예기불안은 그게 설사 회피라 하더라도 일단 결정을 하면 사라지는데대개 그런 경우 효과는 일시적이다. 


  이런 예기불안에 사로잡히면 반복적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 빠져 결정을 회피하는 만성적인 망설임으로 이어진다. 결정을 회피하는 유형은 미루기와 지체하기, 손바닥으로 하늘가리기 식의 적극적인 책임 회피, 망각, 면책조항을 두는 조건으로 결정하기가 있다. 각 유형별로 일상 속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책에 설명되어 있는데 그 중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최고의 선택 시도하기(지나친 분석으로 마비되기)’였다. 몇 가지 대안들 중 하나를 선택하기 몹시 어려워하는 경우를 말한다. 상식적인 수준을 넘어 너무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끊임없이 비교하는데에 신경을 쏟는 나머지 결국 결정을 회피하는 꼴이 되고 마는데, 완벽주의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만성적으로 망설이는 사람들은 유독 행동하지 않았을 때 얻는 대가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아서 손실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는 것인데 앞서 말한 완벽주의가 실패를 토대로 성장할 기회를 차단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기에 회피로 인한 효과는 하나로 연결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3장에서는 뇌가 잘못된 경보에 반응하는 방식을 설명한다. 예기불안은 촉발 요인과 함께 시작되는 데 촉발 요인은 감정을 빠르게 ‘솟구치게’ 한다는 특징이 있다. 



  감정이 솟구치는 뇌의 부위는 편도체다. 편도체는 뇌의 영역 중 느끼고 반응하는 부위에 해당한다. 사고하는 부위와 다르다는 게 핵심이다. 편도체는 평가하고 확인하고 판단하는 일과 거리가 멀다. 경보시스템 역할만 담당하기에 켜지든지 꺼지든지 둘 중 하나다. 심리학이나 뇌과학 관련 책에서 투쟁-도피-경직 반응이란 용어를 본 적이 있다면 바로 이것과 연관된 부위가 편도체다. 편도체의 경보 반응은 의지나 의도와 상관없이 그냥 일어난다. 자동반사적으로 나오는 것이라 이런 즉각적인 공포 반응은 생각을 다스려서 가라앉히기 불가능하다.


  문제는 실제 ‘공포’와 ‘불안’은 다르다는데 있다. 사람들이 흔히 불안함을 느낄 때 사실 실제로는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안은 안전한 상태에서도 위험에 처해있다고 느끼게 만들고 이런 느낌 때문에 예기 불안은 강한 회피를 유발한다. 그래서 이런 예기불안이 스트레스와도 연관이 깊을거라 생각하기 쉬운데, 의외로 스트레스는 예기불안의 원인이 아니라고 한다. 


  4장에서는 불안, 걱정, 회피의 사이클을 살피고 결국 회피는 새로운 배움, 회피하지 않고도 잘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기회 자체를 박탈한다는 쓰라린 현실을 알려준다. 이를 벗어나 성장하고 싶다면 회피를 회피해야한다는 말로 정리한다.


 이어서 5장에서는 불안에 사로잡힌 사고를 멈추기 어려운 여섯가지 이유, 불안한 생각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는 ‘노력의 역설’을 설명하고 6장에서는 불확실성을 대하는 태도와 후회에 대한 두려움, 완벽주의가 어떻게 의사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한다.


  7장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한걸음 물러나 관찰하는 메타인지적 관점과 걱정에 대한 잘못된 일곱가지 믿음, 치유를 향한 사고방식으로 전환하는 방법을 전한다. 전환의 필수 요소 세 가지 ‘예상’, ‘수용’, ‘허용’은 이 책의 마지막까지 기억해야 할 중요한 키워드다. 그리고 불안을 느낄 때 만날 수 있는 내면의 세 가지 목소리에 대해서도 알아본다. 걱정하는 예기불안의 목소리와 회피하려는 거짓 위안의 목소리가 짝을 이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변명의 대화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면 그게 꼭 남의 얘기 같지 않아서 부끄러운 기분이 든다. 그리고 이런 내면의 악순환을 깨닫게 해 줄 지혜로운 마음의 목소리를 내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드디어 순서대로 다 읽고 오라던 8장이다. 8장에서는 좀 더 회복에 초점을 맞춰 기존의 다른 책들과는 다른 접근 방식을 제시한다. 8장의 제목이 내려놓음과 전념인 만큼 어떻게 내려놓음과 전념을 실천해야 하는지 저자가 정리한 방법론이 전개된다. 사실 절대 여기부터 보지 말고 순서대로 보라고 강조한 것치고는 제시한 방법이 내가 먼저 접한 방법들과 딱히 다를 게 없어 김이 빠지긴 했다.


  하지만 읽다보면 미묘한 디테일의 차이를 찾을 수 있다. 마음챙김을 설명할 때 보통 다른 책에선 지금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그저 바라보고 직시하라는 말들이 흔히 나온다. 중구난방으로 솟구치는 생각을 그저 바라보라는 것이다. 실제로 명상 등을 통해 마음을 들여다 볼 때면 생각의 내용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경우도 생기게 마련이다. 이 책에서는 생각의 ‘내용’을 다루지 않을 것을 강조한다. 내용을 곱씹기 시작하면 의심과 걱정이 다시 관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저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하며 거짓 위안의 내용을 되새기는 행동은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한 어조로 말한다.


  앞으로 예기불안을 마주칠 때마다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책의 저자는 DANCE 할 것을 제안한다. 치유를 향한 내려놓음의 다섯가지 원리를 정리하고 그 앞 글자를 딴 것인데 내용은 아래의 첨부 사진을 참고할 것.



  9장에서는 자주 묻는 질문과 답변을 실었고 마지막 10장에서는 유연함과 자신감을 쌓아나가는 방법을 얘기하며 마무리한다. 개인적으로 예기불안에 관해 이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바는 327~328쪽에 잘 정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책의 제목처럼 오늘도 망설이다 하루를 다 보내고 마는 회피의 달인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 네이버 이북까페를 통해 출판사 서평단에 선정되어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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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로빈스 거인의 생각법 - 내 안의 무한 능력을 꺼내는 힘
토니 로빈스 지음, 도희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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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니 로빈스는 다른 자기계발서에서 인용된 이름으로만 익숙한 작가였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Awaken the Giant Within)』도 인용으로만 접해봤지 실제로 읽어본 적은 없다. 찾아보니 한국어 번역판은 현재 절판인 것 같고 구판은 도서관에서나 읽어볼 수 있는 것 같다. (그마저도 보존서가에 있는 것을 빌려야 할 지도?)




 책은 총 12개의 섹션과 365개의 메시지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루에 한 페이지씩 봐도 좋을 내용들이다. 한 페이지가 너무 적다면 각 섹션별로 봐도 좋지만 반드시 순서대로 읽어야 하는 내용도 아니기에 관심 있는 부분만 찾아 읽어도 상관 없다. 그럼에도 어떻게 읽어야 할 지 당혹스럽다면 목차 다음 페이지에 실린 ‘이 책을 활용하는 방법’을 참고해도 좋다.



  책 구성 자체가 성공과 발전의 비유같다. 하나씩 작은 실천과 변화를 이어나가면 거인의 한 걸음을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원제를 찾아보니 유사한 의미의 부제가 붙어있었다.)



  여기서 강조하는 내용의 근거가 궁금하다면 ―혹은 그저 의심 많은 독자라면― 아마 참고문헌과 주가 많이 달린 책부터 읽어야 할거다. 


예를 들어 ‘감정은 선택할 수 있다’는 문장을 처음 접한 경우, 휘몰아치는 감정에 늘 압도되는 경험만 하고 이를 스스로 컨트롤하며 살아오지 못한 이들에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가 생각할 수도 있다. (과거의 내가 그랬다.) 뇌과학이나 심리학, 마음챙김, 알아차림, 명상 등에 관한 책을 먼저 읽어본 독자라면 이런 문장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다수의 자기계발서를 읽어온 고인물들은 이 책을 읽고 자기계발서 핵심요약서 내지는 축약본 같은 인상을 받을 것이다. 이제 정말 내 인생 바꿔보자 다짐하며 밑줄 긋고 포스트잇 플래그를 붙였던 수많은 책들의 핵심 문장들을 하나로 모은 책이다. 하지만 무겁지 않아 가벼운 마음으로 훑어보기에도 좋다. 



  자기계발서를 처음 접하는 독자는 저자가 말하는 질문 설정과 확언을 정하는데 종종 어려움을 느끼는데 다양한 각도의 질문이 실려있어 참고하기 좋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행과 지속이겠지만.



  지시적인 제목이 메시지를 파악하는 시간을 더욱 단축시켜준다. (구글링으로 찾은 책을 보니 숫자만 써 있을 뿐 소제목은 없는 것 같은데 번역하면서 추가한 것 같다.) 완독 후에 다시 책 내용을 상기하고자 할 때 빠르게 제목만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찾아보니 원제는 『Giant Steps: Small Changes to Make a Big Difference』이고 무려 94년도에 나온 책을 바탕으로 번역한 것 같다. 94년도에 이미 이렇게 정리된 내용이 있었다니. 숱한 자기계발서의 범람 후에 원조 맛집이 정리한 최신 요약서라는 인상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동기부여 자기계발서라는 장르의 틀은 이미 90년대에 다 완성된게 아닐까? 내가 요새 읽고 있는 신간들도 그저 오래된 메시지의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건 아닌지. 묘한 배신감(?)이 나를 관통한 후에 든 생각은 시대가 흘러도 변함없이 계속 팔리고 회자되고 있다는건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계발서가 여전히 영감을 준다는 방증이 아닐까 하는 점이었다. 아직도 아니 여전히 사람들에겐 이런 메시지가 필요한게 아닐까 하는, 오히려 변화무쌍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그래서 항상 불안할 수 밖에 없는― 현대인들에게 더 필요한 메시지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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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사는 게 힘들까? - 사회에 적응하기 힘든 사람들의 관계 심리학
오카다 다카시 지음, 김해용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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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제목과 부제를 보고 이건 정말 나를 위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다 읽고난 지금은 글쎄, 잘 모르겠다.) 제목부터가 퇴사를 하면서 자주한 생각이기도 했다. “나는 왜 사는 게 힘들까?” 부족한 체력 탓인지 정신력의 문제인지 아니면 그저 내가 이 사회에 적응하기 힘든 유형의 사람인건지 자주 고민했다. 매번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실패를 더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 책에서 뭔가 해결책을 찾고 싶었던 것 같다

삶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갈등 상황과 극복 방법을 실은 책이라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발달장애 얘기부터 나와서 도무지 무슨 책인지 의아했다. 책 날개에 적힌 ‘발달장애의 그레이존’이라는 원제를 보고 그제야 책의 목적을 알 수 있었다. 딱히 장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사회생활이 너무 힘든 사람들을 분석하고 대응 방법을 내놓은 책이다. 아, 이래서 자폐증, 집착증, ADHD 등을 언급한 거구나.

이 책은 장애라고 진단내리기 애매한 ‘그레이존’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다양한 발달 장애 유형의 예를 들고 장애는 아니지만 예의 주시가 필요한 그레이존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극복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가 ‘애착 이론’과 관련이 깊어서인지 애착 장애에 관한 이야기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각 장마다 고민하는 사람 유형과 그에 연관된 발달장애에 대해 부연하는 식이라 다양한 발달 장애 유형과 진단 방법 등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발달장애를 깊게 파고드는 학술서적이 아니기에 읽기 까다롭지 않다. 그냥 이런게 있구나 가볍게 읽고 넘어갈 수 있는 교양서다.

저자는 많은 성인의 경우 사회 생활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지점이 불안형 애착 스타일이거나 회피형 애착 스타일 때문이라는 점을 언급하며 해결하지 못하고 묵혀둔 마음의 짐이 있는건 아닌지 살펴볼 수 있게 도와준다. 다만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3분 마인드풀니스명상 같은 건 너무 뻔해서 조금 허탈했다.

책을 다 읽어갈 무렵 이 책은 그 자체로 완성도가 있다기 보다는 저자가 주장하는 ‘애착 이론’에 대한 관심을 지피는 영업서라는 인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책으로 애착 장애에 관심이 생겼다면 저자의 다른 책을 추가로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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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도 장례식장에 간다 - 동물들의 10가지 의례로 배우는 관계와 공존
케이틀린 오코넬 지음, 이선주 옮김 / 현대지성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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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과 저자의 프로필만 보고 오로지 코끼리 연구 외길인생의 코끼리 얘기들로만 가득할 줄 알았다. 생각보다 폭 넓은 야생동물 세계의 의례에 대한 관찰기이자 잃어버린 또는 너무 당연해서 굳이 인식하지 않았던 인간의 의례를 되돌아보게 하는 책이었다.

 

  들어가는 글의 제목부터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다. 소제목들로 서문을 요약하자면 우리도 동물 세계의 일부라는 것을 자각하고 과거와 현재, 나와 타인을 잇는 의례를 통해 동물처럼 의례하는 삶을 되찾자고 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다.

 

  중간 중간 실린 사진들이 묘사된 문장만으론 상상하기 어려운 동물들의 접촉을 이해하기 쉽게 도와준다. 그 규모를 가늠하기 어려운 문장을 읽을 때면 더 많은 사진이 있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내 바람을 다 채우려면 사진집 하나를 따로 발간해야 할 것이다.

 

  나는 2장인 집단 의례에 가장 많은 포스트잇 플래그를 붙였는데 유독 와닿는 문장이 많았다. 인간 사회의 집단 의례가 사냥을 위해 협력하는 과정에서 발전했다는 말로 시작해 사냥에서 죽음으로 개체수 조절과 장례문화까지 이어지는 설명이 꽤 설득력 있었다.

 

  6장 무언 의례에서 호르몬 분비와 관련 있는 특정 태도를 설명하는 문단에선 파워 포즈가 연상됐다.

 

  7장 놀이 의례에선 놀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놀이를 적은 비용으로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방법으로 접근한 것이 새로웠다.

 

  8장 애도 의례에서 드디어 이 책의 제목이 실린 페이지를 만났다. 코끼리도 장례식장에 간다는 의미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어른 코끼리의 몸집은 너무 커서 죽은 후 몇 달에서 몇 년까지 그 자리에 사체가 계속 남아있다고 한다. 죽음 이후에도 코끼리들은 죽은 코끼리를 몇 년이고 찾아가고 실제 흙을 덮는 등 매장과 흡사한 의식도 치르는데 이를 장례식과 비슷하다고 본 것이었다. 드디어 궁금증이 풀렸다.

 

  마지막 장은 여행 의례인데 92년부터 시작한 저자의 여정을 되짚어가며 근래까지의 이야기를 풀어간다.

 

  야생동물들의 생존을 위한 긴 이동을 여행 의례로 보고 인간의 여행, 정확히는 저자의 연구 여정을 돌아보는 후반부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예전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지역에서 아직 그 자리에 남아있는 나무를 발견하고 안심한 듯한 문장을 읽고 나 또한 시골에 갈 때마다 변하지 않는 증표로 마음에 담고 있던 나무 한 그루를 떠올렸다. 저자는 여행을 하면서 전 세계의 중요한 자연보호 문제가 무엇인지 배웠다고 한다. 당연히 함께 생존해야 할 동물들과 어떻게 평화롭게 공존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옐로스톤 국립공원에서 마주친 늑대가 숲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늑대를 따라 야생의 세계를 여행하는 장면을 상상했다는 문장을 보고는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돌아가신지 10년도 훨씬 넘은 할아버지는 햇빛이 거실 깊숙이 낮게 들어오는 초저녁시간이면 소파에 앉아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곤 하셨다. 어린 내 눈엔 흙먼지가 풀풀 날리고 한국처럼 산등성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벌판 때문에 매번 같은 장면의 반복처럼 보였다. 납작한 그림처럼 보였던 건 아마 다큐멘터리를 촬영할 때 망원렌즈를 주로 사용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쫓고 쫓기는 동물들, 차마 보기 힘들었던 희생된 동물과 웅장한 때로는 너무나 초라한 죽음을 매 회 한 번씩은 마주하게 되는 그런 프로그램을 왜 항상 보고 계셨는지 모르겠다. 그 시간대에 볼만한 프로그램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닐텐데. 긴박하게 생사가 갈리는 순간과 언제 그런 위기가 있었냐며 시치미를 떼는 듯한 무심한 자연의 순환을 보며 문득 어떤 생각을 하셨을 지 궁금해졌다. 초원을 달리는 얼룩말떼가 지겨워서 다른걸 보자고 졸랐던 것 같기도 하다. 책을 읽으면서 할아버지가 야생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는 장면만 반복해서 떠올랐다. 아마 앞으로도 야생동물의 생태에 관한 책을 읽는다면 계속 할아버지를 떠올리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니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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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얻는 지혜 (국내 최초 스페인어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6
발타자르 그라시안 지음, 김유경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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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서 책을 미리 보기로 먼저 훑어보았는데 각 페이지마다 중앙에 크게 숫자가 쓰여있고 매 페이지에 실린 글들이 길지 않아 읽기 쉬운 격언집처럼 보였다. 그래서 잊고 있던 책 한 권이 생각났다. 


  할머니 댁에 아빠와 작은 아빠, 고모들이 젊어서 읽었던 책들이 고대로 남아있는 오래된 책장이 하나 있다. 커다란 잠자리 안경을 쓴 통기타 가수가 표지를 장식한 기타 악보집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정말 촌스럽다고 느꼈는데 세상에 이 안경도 다시 유행이 돌아올 줄이야!) 상고 교과서, 살림대백과사전, 표지가 누런 장판 색과 다르지 않았던 족보 등 책장이 누렇다 못해 바스러지는 책들 사이에서 내 눈을 끌던 책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탈무드’였다. 아마 그냥 탈무드는 아니고 부제가 있었을 텐데 그건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하튼 인터넷이란 게 없던 시절에(심지어 시골집은 지금도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지 않다) 놀 거리도 마땅찮았던 나는 읽을거리가 생기면 일단 온돌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책장을 펼치기 바빴는데 그 책도 특별히 뭘 알고 펼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심심함을 때우기 위한 요량으로 우연히 선택되었을 뿐이었다. 도대체 누가 읽다가 본가에 남겨준 책인지가 궁금한데.. 여하튼 그 책에서 봤던 구성과 유사했다는 한 줄을 쓰기 위해 이렇게 설명이 길어졌다. 어린 나는 긴 글을 읽기엔 상상력도 집중력도 높지 않았기에 짧은 우화집 같은 책을 읽길 좋아했다. 그래서 이 책도 그렇게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을 것 같단 인상이 들었고 실제로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쉬이 읽힌다고 해서 내용도 가벼우리라는 생각은 접어두는 게 좋겠다. 목차만 봐도 유익하고 각 페이지의 내용을 음미하면 더더욱 오래 남는다. 300개라는 숫자도 적절해서 매일 필사를 해봐도 좋을 것 같다.


  오래된 문장의 힘을 의심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건 모두 지나간 시절의 이야기일 뿐이라며 구닥다리 취급을 하기 일쑤였다. 고전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따분한 인상을 주기에 그런 책들은 모조리 마음 속 골방에 처박아두곤 했다. 그런데 최근에 다른 책을 읽고는 고전에 대한 그간의 편협한 시각에 변화가 생겼다. 시대의 풍파를 겪으면서도 후대까지 살아남아 전해지는 고전에는 그 이유가 있다는 것,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는 사실 말이다. 그렇게 생각이 바뀐 시점에 이 책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옛날 옛적에나 맞는 소리였겠지 하며 넘길 수도 있었을 얘기에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된 상태에서 만난 것이기 때문이다.


  책은 총 8장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장의 주제를 나열하자면 미덕, 현실, 안목, 관계, 내면, 평정심, 온전함, 성숙이다. 인상적인 부분에 사진처럼 플래그를 붙여봤는데 세어보니 4장 관계에 많이 쏠려 있었다. 현재 가장 고민되는 부분에 더 관심이 가기 때문인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반복해서 읽을수록 다른 부분들도 새로이 다가올 날이 있을 것 같다.


  이 책이 쓰인 시기의 역사적 배경도 상상해 봤다. 과연 어떤 문화에서 나온 통찰이었을까? 

책의 뒷면에 ‘치열한 궁중 암투에서도 끝까지 살아남게 해준’이라는 문구를 읽고는 미디어로 재현된 17세기 귀족 세계의 한 장면을 떠올려봤다. 온갖 고상한 기품을 뽐내는 인사들과 부풀려진 평판만큼 지저분한 가십들로 흘러넘치는 궁중 암투극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조하는 저자를 상상하며 독서를 시작하기 전 상상의 무대를 그려봤지만 굳이 나처럼 어렵게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책의 뒷부분에 옮긴이의 해제가 친절하게 실려있어 저자와 시대 배경, 그리고 이 책에 영향을 준 사조까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해가 한층 풍부해졌다. 언어유희가 많아 스페인어로 읽기에 가장 어려운 텍스트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고 하는데 매끄러운 번역으로 읽는 나는 그런 어려움을 전혀 느낄 수 없었고 한국어로도 나름 말맛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부분이 엿보였다.


  읽는 페이지마다 자꾸 실수한 과거의 사건들이 연상되어 조금 괴로웠다. ‘아, 그 때의 어리석은 내가 이걸 미리 알았더라면 인간관계에서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떠올랐다. 그런 한편 지금이라도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된 것에 감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조카들에게도 방을 잘 오픈하는 편이 아니어서 내 방은 소위 던전으로 불린다. 접근이 금지된(?) 구역이니만큼 조카들에게 늘 궁금증을 유발하는데 아마도 책을 읽을 줄 알 무렵이 되면 시골집에서의 나처럼 책장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을까? 그때 조카들이 우연히 집어 들어 만나게 되길, 내가 멋모르고 탈무드를 읽은 것처럼 심심풀이로 부담 없이 만나게 되길, 그래서 더 빨리 이 내용들을 접하길 바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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