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이 새겨진 소녀 스토리콜렉터 44
안드레아스 그루버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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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평화롭고 아름다운 오스트리아 빈의 외곽 숲에서 끔찍한 모습으로 구원을 요청하는 소녀가 발견된다. 소녀의 이름은 클라라. 죽음의 공포 속에서 알몸으로 도망쳐 나온 이 소녀를 발견한 사람들은 근처에 사는 노부부였다. 이 노부부는 소녀가 1년 전 실종된 아이였음을 알게 되고, 기력이 다해 쓰러진 소녀의 등에 새겨진 단테의 [지옥편] 그림을 보게 된다. 취향을 존중해주기엔 너무 끔찍한 취향을 가진 범인. 소녀는 그 끔찍한 괴물의 손아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 또 소녀의 몸에 지옥을 새긴 범인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리고 또 다른 도시. 비스바덴에 막 한 여자가 도착했다. 그녀의 이름은 자바네. 1년 전, 명석한 두뇌를 가진 프로파일러 슈나이더 교수와 연쇄살인범을 잡은 경력이 있다. 그 후론 교통 정리하는데 인생을 허비했지만. 남자친구 에릭과는 한달 전에 관계를 끝낸 상태고 지금은 범죄수사국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된 학생이었다. 남자친구는 형사였고, 아카데미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자기가 끝내놓고 잊지 못한 남자친구에게 다시 한번 시작해보자는 권유를 하기 위해 아카데미의 입학을 결정한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에릭이 머리에 총을 맞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째서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이 두 가지 사건들이 병렬하게 전개가 되는 것일까. 안드레아스 그루버가 말하고 싶은 의도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지옥이 새겨진 소녀>를 보고 있으면 문득 전기 줄 코드를 벗기었을 때의 기분이 든다. 여러가닥으로 묶여져 있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이 줄을 꼬아보고 저 줄을 꼬아보다가 결국 하나의 줄로 엮었을 때야 비로소 전기줄의 기능을 한다는 이치를 깨닫는 것처럼 <지옥이 새겨진 소녀>는 독자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끊어질 듯 말듯한 아슬아슬한 연관성으로 소설을 하나의 전기줄로 만들어낸다. 다 읽고 날 때 쯤에는 '아, 내가 눈 뜬 장님이었군!'하고 깨닫는 독자들이 여럿 나올 것이다.

 

 

 

안드레아스 그루버 자체가 무척 복잡한 인간인지라, 소설 속에서 자바네와 슈나이더가 실마리를 찾으면 오예! 드디어 풀리나! 하고 헛된 기대와 망상에 미리 축배를 들면 안 된다. 또다시 함정에 빠지는 주인공을 보며 독자들도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면 턱수염 더부룩한 안경 쓴 아저씨가 너털 웃음을 지으며 귀에 속삭여줄 것이다.

 

 

"얘야, 그래서 모르는 사람 말 믿고 따라가지 말라고 했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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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전이의 살인 스토리콜렉터 42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이하윤 옮김 / 북로드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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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표지에서부터 느껴지는 인간 육체의 사그라듦이 이토록 절묘할 줄이야. 미국 대통령 직속 관리 시설에서 미국이 하는 그 수많은 극비 실험 중 하나를 맡고 있는 다니엘 아크로이드 박사는 크리스마스 이브도 즐기지 못하고 도중에 다시 불려나온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불평한다. 천국에서 한 순간에 지옥에 떨어진 기분이다. 조카들과 모노폴리를 해야할 시간에 그는 비밀을 유지한답시고 해야하는 신체 검사(아래 구멍까지 샅샅이 살피는)에 응해야 했다. 이 날벼락 같은 일부터가 인생 더럽게 꼬이는 사건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니엘 아크로이드 박사의 연구는 '체임버'에서 이루어진다. 체임버는 사람의 인격과 육체를 분리해서 바꿔버리는 수수께끼같은 기능의 공간이다. 테러리스트를 제압하기 위해 시작한 연구라지만, 어디에 어떻게 쓰일지 누가 안단 말인가. 다니엘 아크로이드 박사는 짜증나는 프로젝트에 발을 담구긴 했지만 여전히 꺼림칙하고 열받는 연구다. 그가 체임버에 오자마자 그의 첫사랑과 꼭 닮은 빨간 머리의 여성 스태프 진저 핀홀스터가 실험의 이상에 대해서 알린다. 피험자 중 한 사람의 육체가 노쇠하여 다른 육체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인격전이의 명료한 법칙이 발견되기 시작했다는 징조였다. 인격이 전이되는 현상을 여기서는 '매스커레이드'라고 한다.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위치 더럽게 안 좋은 패스트푸드점에 있던 7명의 남녀의 이야기로 넘어가자. 그들 안에는 방금 들어온 섹시한 여자에 헤헤거리는 인종 차별자도 있고, 아랍인도 있고, 영어 공부하러 와서 남친이나 사귀려는 못돼 쳐먹은 일본 여자애와 그 마수에 걸려든 남자아이도 있다. 그리고 한구석에 자리차지하고 있는 일본인 박사도 있고. 이들이 모두 한 자리에서 갑작스런 지진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 위치 더럽게 안 좋은 패스트푸드점에는 매스커레이드 현상을 경험할 수 있는 시설이 연결되어 있었고, 그들의 정신은 서로의 육체에서 매스커레이드 현상을 일으키게 된다.


이 소동을 잠재우려고 다니엘 아크로이드 박사는 그들을 잠시 한 공간에 격리한다. 한국이었다면 국가의 음모라며 후에 보상문제를 논의하자고 모의했을지 모르지만 여기는 미국이었다. 미국에서는 보상문제를 논의하기 전에 살인부터 난다. 탈출 불가능한 한 공간에, 어떤 인간이 남의 육체에 들어가 살의를 품고 남을 공격하려 할 때, 살아남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답은 '그 미친 인간을 죽이면 된다'이다. 그럼 여기에 문제를 하나 더 추가해보자. 그 미친 인간도, 나 자신도 육체가 계속 바뀌게 된다. 살의를 품은 놈이 어느 육체에 들어갔는지 알 길은 없다. 바로 옆에 있던 같이 울고 있던 인간이 몇 초 후에 분노에 찬 얼굴을 하고 미친듯이 나를 죽이러 온다고 생각해 봐라. 키야. 이건 블록버스터급 긴장감을 가진 살인 게임이다. 절대 긴장을 늦추면 안 된다. 내 얼굴을 한 사람에게 몇 초 안에 죽을 수도 있다.


살인자는 모르고, 살인은 일어나고 있다. 탈출구는 없다. 실시간 연쇄살인 속에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추리쇼가 벌어진다. 코난도, 셜록 홈즈도 이 사건에 왔으면 욕부터 했을 거다. '시간을 주고 살인을 저질러 미친놈아아아!' 이런 비명을 질렀을 법한 살인 생중계 안에서 누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범인을 밝힐 수 있을까?


살인자로 피해다니는 피해자들과 함께 나도 미친듯이 뛰어다녔다. 전개를 조금이라도 못 따라가면 쇠파이프에 얻어맞고 죽어도 할 말이 없다. 참고로 나는 이 스릴 넘치는 살인 현장에서 전개를 따라다가 쇠파이프에 얻어맞고 죽은 인간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충고하건데, 독자들이여, 절대 살인자의 속도에 잡히지 말고 주인공들과 뛰어다녀라. 와인병 맞고 죽기 싫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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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는 여름 스토리콜렉터 43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북로드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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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살면서 원해야 할 것은 소속감을 느낄 장소뿐이다.

비판받지 않고,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받을 수 있는 곳.

 

-원문 처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말이 있다. 존재하지 않는 '사회' 속에 실존하는 자신을 우겨넣어 힘을 만들어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무리 속의 나. 소속감을 가지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은 그 자신이 더 큰 몸집과 더 나은 두뇌를 갖게 되더라도 변하지 않았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나'라는 개인이 존재하길 바라는 한편, 사회를 이루는 한 일원으로 기억되고 싶어하는 이중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넬레 노이하우스는 이 소속감에 대한 인간의 사무치는 욕망을 <끝나지 않는 여름>이라는 작품으로 보여주게 된다.

 

 

네브래스카 주 경찰 경위 조던 블라이스톤 형사는 페어필드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맡게 된다. 선량한 사람들만 살고 있을 것 같은 시골마을에서 사람 5명이 총살당하고 2명이 총상을 입었다. 용의자는 이제 겨우 17살 청년이었고, 총살당한 이들의 가족이었다. 페어필드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라는 그랜트 농장주의 가족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오늘의 참살을 맞게 되었단 말인가?

 

 

 

"그 애가 이 사건이랑 관련 있다고 해도 놀랄 건 없지. 아주 매력적인 계집애고, 사실은 진짜 가족도 아니니까."

"예?"

조던은 귀가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입양아예요. 그랜트 부부는 교양있는 사람들이지. 부모 없는 그 애한테 제대로 된 가정을 준 겁니다. 하지만 그 애는 늘 수상쩍은 사람들을 좋아했어요. 버넌과 레이첼을 힘들게 만들었지."

"딸은 몇살입니까?"

"열여섯인가, 열일곱인가...."


보안관은 다 알지 않느냐는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지독하게 매력적인 계집애라고."

 

 

 

총살 사건 당시 실종되어버린 입양 소녀, 셰리든. 그녀는 의붓어머니 레이첼의 학대와 그녀의 친아들에게 당할 뻔한 성폭행 경험을 비추어 페어필드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의 곁엔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 호레이쇼가 있다. 비록 그가 자식도 있는 유부남에 페어필드에서 모두의 선망을 받는 목사였지만 말이다. 금단의 사랑에 취한 그녀는 사랑의 도피를 감행했지만 남자는 따라오지 않았다. 더 이상 전화하지 말라는 매서운 경고와 함께. 사랑하는 이에게 버려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한 가정을 망친 총살사건의 주범으로 떠오른다.

 

 

 

세상은 둘도 나뉘어져 있다. 그녀라는 존재를 할퀴려는 인물들, 그녀를 보호해주고자 하는 인물들. 선과 악을 만난 것마냥 셰리든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듯 위태롭게 그 무리 사이를 헤쳐가는 중심 인물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 줄타기도 오래가지 못했다. 세상의 주목을 이끌고 싶어하는 언론이 악인들의 거짓말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미국 전역의 사람들은 이 소설에 속아 셰리든을 둘도 없는 음탕한 여자아이로 만들어버렸다. 실제로 그녀는 매력적인 소녀였고, 약간의 불량함도 갖추고 있었기에 청소년시절에 겪을만한 몇가지 사고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녀는 창녀라고 매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완전히 그녀를 낙인찍어 버렸고, 사회에서 격리시켰다. 그녀가 자신이 내내 폭로한 진실로 가족이 해체되었듯이, 그녀 자신도 사회로부터 소속을 천천히 잃기 시작한 첫 단계였다.

 

 

 

조던 블라이스톤 형사는 그녀를 지지해주고 보호해주려는 몇 안되는 선한 사람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호의는 사랑이 아니다. 보다 더 근원적인,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연민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지금껏 늘 그녀를 유혹하는 남성만 경험했던 셰리든에게는 제법 신선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신뢰가 갔던 인물이었고, 그래서 기대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두 인물은 <끝나지 않는 여름> 을 장악하고 있는 한 가지 사건을 두 갈래로 바뀌어 서술하게 하는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들의 만남은 사랑도, 뭣도 아닌 채로 조던의 미친 약혼녀(망할 시드니!) 때문에 어처구니없게 갈리고 말았다.

 

 

<끝나지 않는 여름>을 관통하는 무더운 주제는 소속감이다. 계속 언급해왔지만 셰리든이 얻고 싶어하는 가족, 조던의 잃어버린 옛 뿌리, 셰리든의 이복 오빠의 밝혀진 출신, 중병 리플리 증후군을 앓고있는 레이첼 그랜트의 부부로서의 사슬, 호레이쇼가 선택한 가족... 모든 인물들이 시시때때로, 중요한 순간에 소속에 대한 선택을 받게 된다.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의 갈림길이 아니라 그저 나아가기 위해 무엇이든 택해야 하는 선택들. 그것들이 인물들을 하나하나 파멸로 만들어갔다.

 

 

그러나 넬레 노이하우스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소속감에 배제된 짙은 패배감은 아니다. 끊임없이 돌출되는 오해와 와해되는 사건들 속에서도 자신과 사회라는 존재를 끊임없이 갈망하는 조던과 셰리든을 통해 '나'에 대해 한걸음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탐구심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인간의 사회성을 회복하는 훈훈한 마무리로 끝나 나를 허탈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어찌되었든 반쪽짜리 해피엔딩이다 싶은 <끝나지 않는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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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이었던 소녀 스토리콜렉터 41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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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EED FOR ME. <내 것이었던 소녀>, 시에나의 강렬한 외침이다. 심리학자 조 올로클린의 집 문 앞에 피를 뒤집어쓴 소녀가 나타난다. 그녀는 조 올로클린의 딸 찰리의 단짝친구 시에나였고, 소녀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다시 도망친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소녀의 아버지이자 전직 형사인 레이 헤거티의 처참한 시체가 발견된다. <내 것이었던 소녀>는 이제 갓 열 여섯살 된 소녀가 살인 혐의를 받는 것으로 그 무거운 사건의 시작을 알린다.

"소식 들었어요?"

"무슨 소식요?"

"레이 헤거티가 죽었대요. 딸이 찔렀다던데, 엄청나죠?"

레이 헤거티는 동료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폭주족 6명을 상대로도 카리스마를 뿜는 사자였고, 현 경감 베로니카 크레이의 정신적 지주였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은 가정적으로도 화목할까? 사회적 존경과 가정의 화목은 엄연히 별개의 것이다. 베로니카 경감은 레이 헤거티의 사회적 면모 속에서 진정한 영웅적 인물상을 탐하려 했지만 가족들이 보는 레이 헤거티는 그저 쓰레기였다.

"시에나는 늘 저더러 화장실 문을 잠그라고 했어요. 어느 날 밤,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문손잡이가 돌아갔어요. 문은 잠겨있었고요.

저는 누구냐고 물었어요. 금방 나간다고 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됐니?"

"문손잡이가 한번 더 돌아갔어요."

롤리타스러운 기질이 있던 레이 헤거티는 어린 딸들에게 검고 어두운 마수를 뻗곤 했다. 베로니카 경감의 환상을 비웃듯, 감춰졌던 레이 헤거티의 추잡한 성적 기질이 세상에 드러났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레이 헤거티가 점점 쓰레기스러운 아버지로 낙인 찍힐수록 시에나의 혐의도 점점 짙어졌다. 시에나가 범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조 올로클린은 악화되어 가는 상황이 답답하기만 했다. 시에나가 범인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범인이지?

 

시에나에게서 단서를 찾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소녀는 아무것도 기억 나지 않는다면서 입을 꾹 다문 상태다. 마치 누군가를 보호하기라도 하듯이. 올로클린 교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소녀의 곁에 연결고리인 사람들에게서 단서를 얻는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사람, 시에나를 특별히 엄하게 대하던 교사 고든 엘리스라는 사람에게 꽂히게 된다. 사라진 그의 첫 아내, 그리고 이후 성을 바꾼 고든 엘리스의 수상한 모습, 두번째 아내의 너무 어린 나이까지. 다정다감해 보이고 멋지게 생긴 청년 교사와 소녀. 조 올로클린의 촉은 진실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내 것이었던 소녀>는 레이 헤거티의 살인사건 뿐만 아니라 망명 신청자 일가족이 폭사한 사건을 함께 다루고 있다. 처음에 읽을 때는 그저 일상의 한 귀퉁이를 장식하는 사건 중 하나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거머리마냥 폭사 사건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던져지고 있다. 라디오, 법원, 올로클린의 아내의 사건에 엮여서 계속 언급이 되고 있다. 도대체 이 사건은 뭐길래 자꾸 말하는 걸까. 폭사 사건과 레이 헤거티 살인 사건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내 것이었던 소녀>는 진실에 다가서는 조 올로클린의 추측이 맞아 떨어지면서 그가 시에나를 자극하는 장면에서 제목이 빛을 발한다. 내 것이었던 소녀. 그리고 내 것이 될 수 없었던 소녀. 그리고 누구의 것이 되고 싶었지만 될 수 없었던 소녀, 시에나의 강렬한 사랑이 폭발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아저씨는 몇 살이에요?"

"마흔 아홉"

"아저씨는 사람이 사랑에 빠지기에 적절한 나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세요?"

"사랑이 뭔지 제대로 이해하려면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그러는데 어떤 사람들은 절대 사랑을 이해 못 한대요."

"그건 사실일거다. 시에나. 하지만 어떤 관계는 분명히 잘못이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한 사랑에 의해 자신을 무너뜨린 한 소녀와 그 소녀를 둘러싼 어그러진 애정의 관계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면서 완전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그 결말이 소녀에게는 당연한 파멸이었겠지만. 소녀가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 조 올로클린의 관찰이 소녀 시에나의 사랑을 더 파멸스럽게 다가오게 만든다. 누구나 예측하는 파멸, 서글플 수밖에 없는 결말. 소녀의 인생을 집요하게 망가뜨린 사랑이 시에나를 바라보는 나에게까지도 절망스러움을 옮겨다주었다.

 

레이 헤거티의 살인범은 역시나 내 예상을 빗나갔다. 하지만 그를 죽인 살인범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들었지만 곧 이어 소녀와 연계하여 이해되는 인물이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시에나가 걸어가야 했던 그 길을 먼저 걸어간 자의 말로였다. 지독한 사랑같으니라구.

<내 것이었던 소녀>의 주축 인물이자 주인공인 조 올로클린 마저도 결국 파멸과 같은 사랑을 겪어야 했다. 뜨겁게 타오르는 사랑도, 차갑게 식어버린 채 관계만 유지하던 사랑도 모두 끝이 났다. 그와 동시에 <내 것이었던 소녀>도 끝났다. 입을 바짝바짝 타오르게 만드는 강렬한 소설이었다.

호주에는 코알라와 캥거루만 있는 게 아니었다. 마이클 로보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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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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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배크만의 이름은 전작 <오베라는 남자>에서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2015년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 <오베라는 남자>는 5월 중순에 영화로 개봉될 정도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파란 배경에 흰 수염과 흰 머리를 갖고 있는 독특한 남성 오베를 만나기 전에 그의 신작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를 읽으면서 기다리는 것도 좋을 듯 하다.


7살 소녀 '엘사'에게는 올해 일흔 여덟이 되는 일흔 일곱의 할머니가 있다. 그녀는 '세상 의 모든 일곱살짜리에겐 슈퍼 히어로가 있어야 한다.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정신과에서 검사를 받아봐야 한다'는 말을 외치는 신여성이다. 그리고 엘사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다. 할머니는 엘사의 슈퍼 히어로다. 할머니는 일곱 살짜리에게 퍽 어울리는 히어로였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사고를 쳐 경찰관을 골치아프게 하지만 엘사를 사랑하는 방식을 남다르게 표현하는 아주 멋진 할머니다. 그런 할머니가 암으로 죽었다.


이 우라지게 멋진 할머니를 이 두꺼운 책의 3분의 1에서 죽이다니. 만약 내 아파트 이웃에 프레드릭 배크만이 살았다면 야무지게 뒤통수를 갈겨주었을 것이다. 다행히 프레드릭 배크만은 내 이웃에 살고 있기는 커녕 국경을 넘고 바다를 건너야만이 있는 곳에 있다. 지구가 넓어서 다행이다. 나는 감옥 갈 일이 없고 프레드릭은 목숨을 잃을 일이 없으니. 아, 한 가지 프레드릭에게 고마운 점이 있다면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의 명언 '우라지게'를 남겨줬다는 것이다. 우라지게 멋진 작가 같으니라구.


덕분에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의 3분의 2는 7살 소녀 엘사가 온통 떠안았고, 나는 지극히 특이하다못해 이웃으로는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소녀와 함께 죽은 할머니가 부탁한 '편지 전해주기'를 하게 되었다.


할머니가 편지를 쓴 대상은 다양하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할머니가 살았던 '아파트의 입주민'이라는 것.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에 나오는 입주민들은 할머니만큼이나 심상치 않은 인물들이 산다. 입주민을 넘어 자기 소유의 아파트인 것마냥 모든 일에 참견해대는 개떡같은 브릿마리, 예순 일곱이 되는 우라지게 멋진 택시 기사 알프, 밤마다 짖어대는 괴물같은 워스, 그리고 진짜 괴물같은 남자 울프하트, 엘사의 어머니 울리카와 검은 치마를 입은 여자까지. 한 아파트에 군집해 서로에게 민폐를 끼쳐주는 게 고맙다 못해 감사한 집단들이다. 절대 어디 이사가지 말고 이 아파트에 천년만년 머물러주길 바랄 정도다.


 엘사는 아주 어릴 때부터 할머니가 들려주었던 '미아마스' 왕국에 대한 비밀과 암호로 감춰진 편지 전해주기를 통해 할머니의 인생을 더듬게 된다. 한 때는 의사로서 생명을 구하는 일에 최선이었던 할머니. 그러나 남들에게 존경을 받는 동안 정작 딸은 외롭게 만든 할머니. 구해선 안되는 생명을 모르고 생명이란 이유만으로 구한 할머니. 모두에게 미안한 일 투성이었던 할머니. 할머니의 편지를 받은 이들은 할머니가 구체적으로 뭐라고 썼는지 입을 다문다. 독자 입장에선 답답하고 궁금하다. 하지만 모두들 입을 모아 한 소리로 말한다. 할머니의 의도는 딱 하나다. "미안하다"라는 것.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는 말그대로 지뢰 천지다. 말도 안되는 곳에서 독자를 웃기고, 울리고, 화를 내게 만들고, 가슴 찡하게 만들어버린다. 프레드릭 배크만의 전작 <오베라는 남자>에서 그랬듯이 가족, 이웃과의 화해로 점쳐진 놀랍도록 훈훈한 작품이다. 할머니의 편지는 하나의 완성된 사건을 만들기 위한 조각이었고, 엘사는 할머니의 부탁에 따라 충실하게 사건을 완성시켰다.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의 놀라운 점은 할머니, 어머니, 손녀 이 3대의 인생 성장기가 국수 먹듯이 술술 풀린다는 것이다. 먹은 후에 거북함과 허기짐을 쫓아내고 포만감이 자리하듯이. 너무 따뜻하고 만족스러운 느낌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잔영으로 남은 것이 너무 좋았다. 일하는 곳의 동료가 프레드릭 배크만을 알고 있었던 지라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를 자기도 읽어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꼭 읽어보라고 권했다. 이 우라지게 멋진 아파트 이웃을 모르고 산다면 할머니한테 너무 미안해서 말이다.


미국 아마존에서 전작 <오베라는 남자>의 평점을 4.5점을 줬다는데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는 평점 5개 만점을 받기를 바란다.

이 우라지게 멋진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는다면 할머니한테 무진장 미안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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