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래스 호텔 스토리콜렉터 101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지음, 김미정 옮김 / 북로드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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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미국에서 22살의 젊은 여성이 중절도죄로 체포되면서 세간을 떠들석하게 한 바가 있다.

독일 사업가의 딸을 위장하고, 수십조원의 상속녀가 될 거라는 거짓말과 함께 명품을 두르며

남의 돈을 갈취하던 그녀- 뉴욕 사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가짜 상속녀 '애나 델비'의 이야기다.

실제로는 트럭 운전수 아버지와 주부인 어머니를 둔 평범한 젊은이의 위선이 어떻게 통했는지는 자세하게 알아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얼마나 외적인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는지 알게 해주는 사건이었다 정도로 충분하다.

'애나 델비 사건'을 말하는 이유는 하나다.

실제 사건이었다는 <글래스 호텔>의 모티브라서? 아니다.

지금부터 얘기할 이 소설의 모티브가 된 '2008년 폰지 사기 사건' 역시 누군가의 허황된 심리를 이용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건에는 10년도 넘는 큰 시간 차가 있지만 강산이 변해도 사람은 바뀌지 않았다.

세상은 여전히, 아직도 사기꾼들이 넘치는 세상을 그려내고 있다.

<글래스 호텔>도 그러한 세상을 그려내고 있다.

『그녀로 하여금 돈의 왕국에 계속 살게끔 하는 것은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돈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전제조건이엇다. 돈이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주기 때문에. 단 한번도 돈에 쪼들려본 적 없는 사람이라면 이런 자유가 얼마나 심오한 것인지, 이것이 어떻게 삶을 완전히 뒤바꿔놓은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글래스 호텔> 본문 중-

<글래스 호텔>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두 사람, 폴과 빈센트 남매의 선택과 갈림은 결국 도덕인가, 부인가, 자유인가를 둔 인간의 끊임없는 경계선을 지나는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겨났지만 원하는 꿈과 자유를 이룬 폴과 자유롭게 살다 호텔 ceo 조너선을 만나 그의 아내가 되어 달콤한 부에 휩싸이다 몰락하게 되는 빈센트의 삶이 대비되어 둘이 추구했던 삶의 가치에 대해 더 역설적으로 접근하게 해준다. 물론 폴의 마지막 인생도 정말 과연 원하는 만큼 가치 있었는가에 대해선 좀 더 논의해볼 여지가 있겠지만...

부유하고 황홀한,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을 연기하는 실제 삶의 주인공들은 정말로 행복할까.

어쩌면 자신이 해온 과거의 얼룩들을 그저 '실패'라고만 여길지도 모른다. 타인의 믿음과 희망을 거름삼은 실패 말이다.

<글래스 호텔>은 한 사람의 실패가 연이어 불러오는 희생적 결과에 대해 여과없이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고 또 허황된 꿈과 희망을 쫓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메시지 또한 은연 중에 내포하고 있다.

돈이 돈을 번다는 것. 이것은 부가 부를 창출한다는 뜻만은 아니다. 돈이 또다른 돈을 현혹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언제쯤 <글래스 호텔>을 소설 안에서만 마주할 수 있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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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심장 스토리콜렉터 100
크리스 카터 지음, 서효령 옮김 / 북로드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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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트렌드인가. 살인에 천재를 붙이고 나니는 캐릭터가 빈번하게 출몰하는 것은...

천재적인 살인 트릭, 기가 막히게 형사를 따돌리는 계획,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도시를 자유롭게 누비는 아슬아슬한 추격전은 없다. 그럼에도 '천재' 소리를 듣는 사이코패스들은 존재한다.

무엇이 그들을 '천재'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붙여주게 했는가. <악의 심장>이 조명한 천재 사이코패스 '루시엔 폴터'가 어떤 천재인가 하는 호기심이 인다.


미국 와이오밍 주의 한 식당. 미국 전역에서 볼 법한 흔한 장소에 사람들이 앉아 있다. 우연히 밥 먹으러 들어 온 경찰이 훈훈하게 주문한다. 경찰도 밥은 먹고 살아야지. 그런데 의자에 엉덩이 붙이기도 전에 사고가 난다. 운전 중에 심장마비를 일으킨 한 남자의 차량이 식당으로 돌격한 것이다. 천운으로 식당 앞 구덩이에 걸려 차는 주차장의 다른 차와 화장실 건물에 부딪치고 멈춘다. 인명피해가 없었다는 사실에 경찰은 한숨을 돌린다. 어쩔 수 없는 사고로 끝날려는 찰나 먼저 가서 차를 살피던 동료 경찰 하나가 대박 사건을 발견한다. 그를 따라 가 사고 현장을 본 경찰은 시야가 흐려졌다. 아, 보고서 한 장으로 안 끝날 대박 사건이구나를 실감하고 만다.


한 식당에서 그저 차 사고로 끝났어야 하는 일은 새로운 사건의 단초가 된다. 사고 차량이 부딪친 다른 차량의 트렁크 속에서 두 여성의 잘린 머리를 발견한 것이다. 덜렁 들어있는 것도 아니다. 살아생전 참혹한 고문을 받은 게 분명한 '끔찍한' 형태의 모습이었다. 그 차량의 주인 리암 쇼는 신속히 잡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하면서 묵비권을 행사한다. 그러던 중 고문을 행할 마지막 관문에서 그는 두 마디만 내뱉는다.


「로버트 헌터, 난 그 사람한테만 말할 겁니다.」


로버트 헌터, 로스앤젤레스 경찰국의 강력계 형사로 일하는 남자. 이 남자를 통해 우리는 리암 쇼가 사실은 로버트의 대학교 시절 친구이자 범죄심리학도로서 라이벌 관계에 있던 '루시엔 폴터'라는 남자임을 알게 된다. 대학도 졸업하지 않고 어느 날 사라져버린 대학 동기와 다시 마주하게 된 로버트 헌터. 그는 어떤 진실을 마주할 수 있을까.


<악의 심장>은 로버트 헌터 경찰과 루시엔 폴터의 오래된 인연과 얽매인 범죄를 추적하는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를 통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그가 대학을 졸업하지 않고 사라진 건지, 로버트의 과거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주고받으며 사건의 실마리를 파헤쳐간다.


작가가 말하는 악의 심장이란 뭘까.

악한 마음이 태동하는 원천인가, 아니면 상징적인 비유인가.

적어도 루시엔 폴터가 주장하는 '자칭 천재 사이코패스'는 분명 가져본 적 없는 더 우월한 악의 근원일 것이다. 


매춘부, 가출 청소년, 술에 취한 부렁뱅이 같은 나약한 자들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작자에게 달아주기엔 너무 거창한 것일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악의 심장> 막바지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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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가 아니면 죽음을 스토리콜렉터 99
제프 린지 지음, 고유경 옮김 / 북로드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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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문학권 작가들 책을 읽을 땐 꼭 작가 소개를 먼저 확인한다. 어디 어디 대학을 나왔다는 평이한 한국 작가 소개와 달리 작가가 이룩해 온 생애, 작가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 영향, 배경 등을 소개해주기 때문이다. 작가들이라고 소재를 하늘에서 건져오겠나. 삶에서 주어진 경험과 관록이 글자가 되고 문장이 되는 거다. 제프 린지의 소개도 이런 의미에선 재미있는 부분이 많았다. 에드거 상 대상 후보에 올랐지만 다른 필명으로 출간한 흔적이 발견돼서 제외된다거나, 헤밍웨이의 조카이자 자신의 아내인 힐러리와 공동 집필로 작가 활동을 쌓아올라 왔든가 하는 얘기들 말이다. 혜성처럼 떨어진 작가가 아닌, 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해 온 과정들이 참 좋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살인마의 욕구를 가진 범죄자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주로 쓴 작가라는 설명에 이 소설에 대한 기대치가 올라갔다. <다이아몬드가 아니면 죽음을>의 주인공은 안 봐도 쓰레기 같은 놈이겠거니! 



『기사를 읽은 나는 확신했다. 아무도 절대로, 결단코 할 수 없는 일이라 해도 꼭 해내야만 했다. 

나는 기사 속 사진을 유심히 살펴봤다. 사진 속에 있는 것은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물건이었다. 

순간 전율이 일어날 정도로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것. 

그래서 실제로 보아야 했다. 그리고 훔쳐야 했다.』 - p.25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스릴을 즐기는 살인마 혹은 도둑인 라일리 울프는 제프 린지가 그려내기 최적화된 캐릭터다. 정의랑 거리가 멀고, 잔머리는 쩔고,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뭐든 잘 할 수 있는 남자니까. 뭐든에는 당연히 ... 살인도 포함된다.


<다이아몬드가 아니면 죽음을>은 사회적 범죄를 일삼는 부도덕한 상류층 인간들의 재산을 빼앗는 게 직업인 라일리 울프의 새로운 계획, 이란의 황실 보물인 '빛의 바다'(다리야에 누르)를 탈취하는 사건을 주축으로 벌어지는 스펙터클한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라일리 스스로가 다이아몬드를 훔치려고 분주히 움직이는 사이에 그를 쫓는 또 다른 남자, FBI 요원 프랭크 델가도를 통해 밝혀지는 라일리 울프의 과거까지. 따라갈 것은 많고 궁금한 것도 많다.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라일리가 어떻게 다이아몬드를 훔칠 건지가 관건 아니겠나.


라일리 울프의 도적 스타일은 어떤 천재적인 능력에 의존하지 않는다. 사람의 심리를 꿰뚫고 그 안에 파고들어 사람을 조종하는 심리전에 능한 남자다. 사람의 심리를 농락하는 것 자체가 캐릭터가 가진 능력을 온전히 보여준다. 천재적인 손 기술력, 파고들어 캐내는 빅데이터보다 더 끌린다. 하지만 그만큼 이런 도둑 스타일의 결말엔 좀 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게 해줬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부도덕한 상류층 인간들의 망연자실한 심리까지 표현해줘야 의적 느낌이 물씬 나지 않겠나. 


하지만 이런 점에 있어서 라일리 울프는 탈락이다.


라일리 울프는 '너무 쉽게' 남의 마음을 얻고 그를 이용하면서 '너무 쉽게' 농락해버린다. 이 작품에선 그런 캐릭터가 꽤 많이 나온다. 박물관의 경호를 담당하러 온 주제에 이 기간에만 즐기려는 생각으로 여자를 꼬시는 팀장 블레이드쇼도 라일리 스타일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일에선 프로일지 몰라도 개인적으론 정말 아웃인 '폭탄'이다. 폭탄 놈들끼리 싸우다 죽는 건 하나도 아쉽지가 않은데, 이 과정에서 쓰임을 다하면 버려지는 여자 캐릭터들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모니크가 마침내 눈길을 돌리며 조용해졌다. 나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훈계를 들을 때보다 훨씬 나았다.

  "난 당신이 정말 좋아요, 라일리." 잠시 후 모니크가 말했다.

  "그리고 당신을 존경해요, 많이.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몰라요." 그러고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이용하다니. 그래놓고선 그냥 떠나버리다니……"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유감이야. 도저히..... 나는 이해할 수가......"

  모니크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끝까지 말을 하진 못했지만, 나는 무슨 말인지 금세 알 수 있었다.

  "모니크." 마침내 내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모니크는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리고 거기 그대로 있었다.』-p. 452-453.



도둑놈들이 잘 사는 세상, 그리 반가운 건 아니다. 권선징악 소설을 기반으로 살아온 K 시민으로서 도둑놈들이 주인공인 소설에선 어느 정도 주인공이라도 굴러야 마땅하다는 게 내 지론이다. 하지만 도둑놈들의 세상도 마냥 기꺼워하기엔 그 불순한 인간의 삶이 매력적이다. 나름의 기준을 갖고 집요하게 달려드는 천재적인 도둑의 행적은 가슴이 두근거리게 만드는 스릴이 있다. 라일리 울프에겐 분명 충분한 매력이 있다. 한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이 책, 시리즈였다.


라일리 울프가 맘껏 훔치고, 맘껏 즐기며 시리즈를 진행하길 바란다. 모든 걸 가진 라일리 울프가 마지막엔 급행 감옥 열차에 종신형으로 올라타길 기원하며.




(위의 리뷰는 북로드의 서평 이벤트로 도서를 지원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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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선 열차와 사라진 아이들
디파 아나파라 지음, 한정아 옮김 / 북로드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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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방글라데시 아동노동 실태를 다룬 공중파 다큐를 시청한 적이 있다. 새벽부터 일어나 해가 사라질 때까지 무수한 벽돌을 머리에 인 열두살 난 여자아이의 일상을 그려낸 다큐였다. 벽돌을 나르느라 사춘기도 채 되지 않은 아이들의 이마에는 70대 노인의 것 같은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많은 벽돌을 나르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조차 매번 보장받지 못했다. 기계적으로 벽돌을 확인하고 딱지를 나눠주는 관리관의 아들은 셈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세 번을 세면 세 번 다 다른 그의 손을 거치지 않고선 돈은 나오지도 않았다. 학교에서 공부로 3위를 할 만큼 머리가 좋다던 12살 여자아이는 학교에 가는 대신 오늘도 힘겹게 벽돌을 나른다. 한달에 한 번 벽돌을 나르고 받은 수고로 엄마에게 작은 용돈을 받아 시장에 나가 간식도 사먹고 화장품 구경도 한다. 시장 나들이를 끝내고 돌아오는 소녀의 손에는 태어난 지 얼마 안된 남동생의 셔츠가 들려있다. 


어린 소녀는 그 싸구려 옷을 아기에게 입히며 더 어린 동생에게 속삭였다.


"누나가 옷 사줬으니까 너도 크면 누나한테 갚아야해, 알겠지?"


마치 이 굴레에서 벗어날 길은 동생 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게 중얼거리며 소녀의 하루가 저물고 다큐도 끝이 났다.




『보라선열차와 사라진 아이들』은 인도 아동노동의 이야기를 담아난 장편 소설이다. 미스테리 소설의 타이틀을 달고 있지만 그야말로 미스테리다. 작가 디파 아나파라는 아동 노동과 빈곤층의 실태에 대해선 독자에게 마치 영상처럼 보여주듯 묘사를 하는 필력이 뛰어난 사람이지만 과연 이 소설의 미스테리함은 장르 자체에 두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탐정도 있고 사건도 있는데 미스테리 장르가 주는 장르만의 특성은 안 보인다. 기이하다.


『보라선 열차와 사라진 아이들』은 빈민가 아이들의 연쇄적 실종 사건이 벌어지면서 소년 자이를 둘러싼 일상의 파괴를 그려내고 있다. 불합리 속에서 체념하고 익숙한 사람들에게 또 다시 이름없는 분노를 옮기는 황색언론과 종교인들의 탐욕이 빈민가 아이들의 실종 사건을 더 우리네 사회로 공감하고 익숙하게 만든다. 낯선 세계로 끝날 줄 알았던 인도가 마치 옆집의 일인 것처럼 느껴지는 건 분명 비애로 가득찬 이 세계를 나도 함께 숨쉬고 걷고 있기 때문일까.


소년 자이의 시각이 메인으로 독자에게 보여지고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분량으로 사라진 아이들의 시각 또한 등장했다. 아무 탈이 없었다던 부모의 말과 달리 아이들은 저마다의 사연과 갈등에 처해 있는 상황이었다. 어른들이 모르는 문제은 단순한 따돌림을 넘어서 인도에 뿌리내린 차별에 관한 시야를 숨김없이 드러낸다. 그런 아이들에게 있어 '보라선 열차'는 열망의 존재였다. 지금 내가 있는 불행한 삶을 바꾸고 보다 다른 희망을 찾아갈 마지막 수단의 상징이었다. 


인도의 빈곤층 실태와 아동노동에 관한 열악한 상황을 그려낸 『보라선 열차와 사라진 아이들』의 문제는 끝날 때까지도 끝나지 않는다. 또다른 이름의 누군가에게 남아서 보라선열차를 꿈꾸는 아이들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불행한 예고도 사라지지 않는다. 디파 아나파라가 말하고 싶었던 결말이 정말로 '구원'이었는가라면 누굴 위한 구원인가를 되묻고 싶었다. 『보라선 열차와 사라진 아이들』은 순문학 시각으로 미스테리 장르를 해석하려고 한 기이한 소설이었다. 내가 알던 미스테리는 아니었다고 장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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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시간 스토리콜렉터 94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북로드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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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가 놓아주질 않네요, 그렇죠?" 


나는 우울한 기분으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식어서 쓴맛이 났다. 


"셰리든, 누구도 과거에서 도망칠 수 없어." 


아버지가 대답했다. 


"자기 삶의 구성요소로 만들고 그것과 화해할 수 있을 뿐이지. 지금 여기를 사는 것, 

그리고 지나간 것과 앞으로 올 것에 대해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게 가장 좋아. 우리는 그 두 가지 모두에 아무 영향도 끼칠 수 없으니까." 」- 『폭풍의 시간』 본문 中 -



 <끝나지 않은 여름> 이후 5년 만에 셰리든과 다시 만났다. 하도 오래 전에 읽어서 예전 리뷰 쓴 걸 다시 보고 그 날의 감성을 살려야 할 정도였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탓일까. 아니면 5년 전 내 시야에 콩깍지라도 껴 있던 걸까. 다시 돌아온 셰리든과 조던 블라이스톤은 정말로 낯설다. 그리고 이 어색한 감정이 사라지기도 전에 우리는 <폭풍의 시간>을 마주했다.


<여름을 삼킨 소녀>, <끝나지 않은 여름> 내내 셰리든의 불행했던 삶은 <폭풍의 시간> 초반에도 여전히 연결되고 있다. 뉴잉글랜드의 작은 도시 록브리지에서 새 삶을 살기로 결심 중인 셰리든. 타이밍 좋게 그녀의 삶에 얽히고 싶어 청혼까지 하는 지역의 명망높은 의사인 폴도 있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이름도 바꿨다. 이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셰리든은 생각했지만 인생은 여전히 스물 한살의 셰리든 마음대로 풀리지 않는다. 어쩐지 불안한 결혼 준비에 혼란을 겪고 있는 셰리든 앞에 과거의 사건이 또 다시 터진다. 그녀의 과거가 하나씩 터져 나올때마다 읽는 나조차 불안하다. 스물 한 살인 나이가 맞단 말이냐. 도대체 무슨 삶을 살아온 거야, 셰리든...이라고 한숨이 저절로 나올 지경이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어도 결정적인 순간마다 다시 발목이 잡히는 과정을 겪고 나서야 셰리든은 도피를 멈추고 과거와 제대로 마주하려 네브래스카로 돌아간다. 그리고 어릴 적 꿈꾸던 가수의 길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나아가고, 그로 인해 또 다시 셰리든 인생엔 새로운 사람들이 얽히게 된다. 


<폭풍의 시간>에서 셰리든과 대적하는 인물이 전작에서 셰리든의 누명을 벗겨준 데다 그녀의 오빠 조던 블라이스톤 형사인 건 사뭇 새로웠다. 전작 리뷰에서 분명 조던은 선한 인물이고 약혼녀 시드니가 빌런이라고 욕을 바가지로 했었는데 셰리든의 마지막 여정엔 조던이 모난 돌이 되었다. 망할! 넬리 노이하우스의 '셰리든 그랜트 시리즈 3부작'엔 꼭 이렇게 가까운 인물들이 시리즈에 따라 이미지가 변화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전작에서 애정 있던 인물이 신작에서 정나미 떨어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조던이 바로 이런 경우였다. 전작에선 끈질기고 다분하게 파고드는 성격이 주인공으로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조연으로 떨어지니 인생에 얽히고 싶지 않은 진상이 되어버렸다. 넬레 여사, 이게 무슨 짓이요!


셰리든은 <폭풍의 시간>에서 기어코 모든 과거를 청산하는 데 성공하지만, 넬레 여사가 셰리든을 활용하는 방식은 여전히 매우 난폭하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셰리든이 원하는 꿈을 쟁취했을 거라고 보기 너무나 애매하게 묘사하는 데다, 여전히 사랑에 목 매고 정서적으로 나약한 셰리든의 모습은 가혹할 정도로 쉽게 보여준 느낌이다. 스물 한 살, 분명 어리다면 어린 나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과거를 생각하면 과연 이렇게까지 어리숙하게 남에게 인생이 휘둘려도 되나 싶을 정도로 셰리든은 매번 무너진다. <폭풍의 시간>은 분명 스타로 성공하는 셰리든의 여정을 잘 그려냈기에 재미는 있었지만, 전개의 재미와는 별개로 넬레 여사가 셰리든을 그려내는 데 있어 3부작 전부 조금 아쉬움을 남긴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피하면 점점 악화될 뿐이야. 그걸 극복하는 방법은 내면의 강인함과 자의식뿐이야. 

   나도 그런 상황을 겪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당신과는 다른 방식이었지만,

   어쨌든 자기에게 일어난 일에 아무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는 알아."」- 『폭풍의 시간』 본문 中 -


넬레 노이하우스는 여름 컨셉 3부작은 그야말로 계절에 딱 어울리는 편성이었다고 생각한다. 음울한 장마비같았던 조던 블라이스톤과 한없이 폭염같은 셰리든과의 만남. 분명 이 타오르는 여름에 만날 가치가 있는 작품인 건 확실하다.



(위의 리뷰는 북로드의 서평이벤트로 도서를 지원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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