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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4월
평점 :
프레드릭 배크만의 이름은 전작 <오베라는 남자>에서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2015년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 <오베라는 남자>는 5월 중순에 영화로 개봉될 정도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파란 배경에 흰 수염과 흰 머리를 갖고 있는 독특한 남성 오베를 만나기 전에 그의 신작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를 읽으면서 기다리는 것도 좋을 듯 하다.
7살 소녀 '엘사'에게는 올해 일흔 여덟이 되는 일흔 일곱의 할머니가 있다. 그녀는 '세상 의 모든 일곱살짜리에겐 슈퍼 히어로가 있어야 한다.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정신과에서 검사를 받아봐야 한다'는 말을 외치는 신여성이다. 그리고 엘사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다. 할머니는 엘사의 슈퍼 히어로다. 할머니는 일곱 살짜리에게 퍽 어울리는 히어로였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사고를 쳐 경찰관을 골치아프게 하지만 엘사를 사랑하는 방식을 남다르게 표현하는 아주 멋진 할머니다. 그런 할머니가 암으로 죽었다.
이 우라지게 멋진 할머니를 이 두꺼운 책의 3분의 1에서 죽이다니. 만약 내 아파트 이웃에 프레드릭 배크만이 살았다면 야무지게 뒤통수를 갈겨주었을 것이다. 다행히 프레드릭 배크만은 내 이웃에 살고 있기는 커녕 국경을 넘고 바다를 건너야만이 있는 곳에 있다. 지구가 넓어서 다행이다. 나는 감옥 갈 일이 없고 프레드릭은 목숨을 잃을 일이 없으니. 아, 한 가지 프레드릭에게 고마운 점이 있다면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의 명언 '우라지게'를 남겨줬다는 것이다. 우라지게 멋진 작가 같으니라구.
덕분에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의 3분의 2는 7살 소녀 엘사가 온통 떠안았고, 나는 지극히 특이하다못해 이웃으로는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소녀와 함께 죽은 할머니가 부탁한 '편지 전해주기'를 하게 되었다.
할머니가 편지를 쓴 대상은 다양하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할머니가 살았던 '아파트의 입주민'이라는 것.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에 나오는 입주민들은 할머니만큼이나 심상치 않은 인물들이 산다. 입주민을 넘어 자기 소유의 아파트인 것마냥 모든 일에 참견해대는 개떡같은 브릿마리, 예순 일곱이 되는 우라지게 멋진 택시 기사 알프, 밤마다 짖어대는 괴물같은 워스, 그리고 진짜 괴물같은 남자 울프하트, 엘사의 어머니 울리카와 검은 치마를 입은 여자까지. 한 아파트에 군집해 서로에게 민폐를 끼쳐주는 게 고맙다 못해 감사한 집단들이다. 절대 어디 이사가지 말고 이 아파트에 천년만년 머물러주길 바랄 정도다.
엘사는 아주 어릴 때부터 할머니가 들려주었던 '미아마스' 왕국에 대한 비밀과 암호로 감춰진 편지 전해주기를 통해 할머니의 인생을 더듬게 된다. 한 때는 의사로서 생명을 구하는 일에 최선이었던 할머니. 그러나 남들에게 존경을 받는 동안 정작 딸은 외롭게 만든 할머니. 구해선 안되는 생명을 모르고 생명이란 이유만으로 구한 할머니. 모두에게 미안한 일 투성이었던 할머니. 할머니의 편지를 받은 이들은 할머니가 구체적으로 뭐라고 썼는지 입을 다문다. 독자 입장에선 답답하고 궁금하다. 하지만 모두들 입을 모아 한 소리로 말한다. 할머니의 의도는 딱 하나다. "미안하다"라는 것.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는 말그대로 지뢰 천지다. 말도 안되는 곳에서 독자를 웃기고, 울리고, 화를 내게 만들고, 가슴 찡하게 만들어버린다. 프레드릭 배크만의 전작 <오베라는 남자>에서 그랬듯이 가족, 이웃과의 화해로 점쳐진 놀랍도록 훈훈한 작품이다. 할머니의 편지는 하나의 완성된 사건을 만들기 위한 조각이었고, 엘사는 할머니의 부탁에 따라 충실하게 사건을 완성시켰다.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의 놀라운 점은 할머니, 어머니, 손녀 이 3대의 인생 성장기가 국수 먹듯이 술술 풀린다는 것이다. 먹은 후에 거북함과 허기짐을 쫓아내고 포만감이 자리하듯이. 너무 따뜻하고 만족스러운 느낌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잔영으로 남은 것이 너무 좋았다. 일하는 곳의 동료가 프레드릭 배크만을 알고 있었던 지라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를 자기도 읽어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꼭 읽어보라고 권했다. 이 우라지게 멋진 아파트 이웃을 모르고 산다면 할머니한테 너무 미안해서 말이다.
미국 아마존에서 전작 <오베라는 남자>의 평점을 4.5점을 줬다는데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는 평점 5개 만점을 받기를 바란다.
이 우라지게 멋진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는다면 할머니한테 무진장 미안할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