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중국의 시험지옥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전혜선 옮김 / 역사비평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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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대 1. 5000대 1. 공무원이 되고자 하는 열정들이 매년 수치로 기록된다. 성공하고자 하는 간절함은 숫자보다 더 거대하리라. 합격과 낙방. 죽을 만치 힘든 터널의 끝을 보냐 안 보냐의 차이같다. 어떤 이는 터널 끝에 쭉 뻗은 길을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터널이 결국 끝나지 않는 동굴이었다는 걸 알게 될 것이고. 이 터널이 무엇인가. 1400여년 간 지속되어 온 지옥, '과거'이다.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이 글을 완성지었다고 한다. 징병 통지서가 오면 언제든지 죽을 각오를 한다는 마음으로 적었단다. 세상에 뭔가 이로울 만한 것을 남기고 죽어야 겠다는 각오였다.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지난 날의 시험 기록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나. 그가 말했다시피 중국의 캐캐묵은 제도를 캔다고 해서 일본의 시험제도의 문제점을 해소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시험 지옥 '과거'는 우리에게 객관적 지표 이상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죽을만큼 무언가에 매달려 얻어내야 했던 성공의 의지,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옛 선인의 부담감, 죄를 짓고 살면 아무리 천운을 타고 났어도 삶의 중요한 타이밍에서 실수할 수 있다는 오랜 지혜같은 말들은 우리들에게 난(難)이라는 공통적인 키워드로 공감을 이끌어낸다. 취업난, 입시난, 창업난. 난으로 넘쳐나는 세상에 우리도 살고 있다!

손바닥보다 더 작은 컨닝책, 빼곡히 글이 적힌 버선도 모자라 혹시 만두 안에도 쪽지를 넣어놨을까 식사하는 도시락의 만두까지 쪼개 만두소를 조사하는 웃기지도 않은 일이 벌어진다. 엄중한 감시를 통해 보내도 매년 숨겨서 들어가는 책의 분량은 책방 하나의 분량이다. 어떻게든 시험에 붙어 꽃길 좀 걸어보겠다는 당찬 의지가 느껴진다. 아아, 능력이 안돼 슬픈 짐승이여.


그런데 이 시험장에선 웃기지도 않은 일들이 벌어진다. 과거 시험은 자신의 재능과 지식만을 시험하지 않는다. 평소 쌓아온 덕과 인품까지도 시험의 대상이 되는 곳이다. 고대 중국인들에게 시험장은 귀신이 자유롭게 출입하여 인성을 시험하는 곳이라고 믿기도 했다. 그런데 이 인성 시험은 오늘날 연예인의 이미지 메이킹보다 더 무섭다. 네티즌은 모르는 게 있는데 귀신은 모르는 게 없는 탓이다. 고향에서 아랫도리 잘못 놀려서 처녀 신세 망친 놈은 반드시 죽는다. 붓을 잡아도 죽고 잠들어도 죽고 답을 적어도 죽는다. 무조건 죽는다. 어느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섬뜩한 대사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고 한다. 오호 깨소금이다. 오늘날에도 적용되었으면 참된 공무원들이 많이 배출되었지 않을까하는 일말의 기대마저 생긴다. 짝짝.


동아줄은 하나고, 사람은 천 명이다. 살기 힘들어질수록, 밥그릇 수가 적어질수록 사람은 각박해지고 더 치열해지기 마련이다. 과거는 사람들의 과열된 경쟁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지표였다. 그 날의 그들이 소나 돼지가 잘 것 같은 우리 속에 쳐박혀 시험을 치뤘듯, 오늘날의 우리도 닭장 만큼 작은 독서실에서 합격이라는 목표 하나만으로 달리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중국만의 역사는 아니다. 또한 멍청한 역사를 반복하고 있는 현 시점을 논하자는 의미로 보자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삶은 변치않게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같은 길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딱한 처지일지라도, 그것이 내 삶의 유일한 길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이 수천, 수만명이 모이는 자리가 바로 과거시험장이다. 온기 대신 눈물 열 방울, 땀 스무 방울로 만들었을 그 자리에 대해 궁금하다면 중국역사를 담은 <과거, 중국의 시험지옥>을 읽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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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큰 그레이스
E. C. 디스킨 지음, 송은혜 옮김 / 앤티러스트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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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달린다. 누가보면 가젤인 줄. 그레이스는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다. 어딘가에 도움을 청할 목적으로 그레이스는 미친듯이 차를 운전했다. 경찰서, 경찰서, 아 이 나라는 왜 경찰서가 근처에 없어! 그레이스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레이스는 누군가의 추격을 피하려고 노력해보지만 행운은 그녀의 편이 아니다. 그리고 공포영화의 전개 방식에서 알려주는 교훈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나쁜 일은 연달아 일어난다는 진리말이다. 그레이스는 갑자기 뛰어든 사슴을 피하지 못하고 정면충돌 사고를 내고 정신을 잃는다. 자신이 죽어간다는 걸 깨닫고 열심히 복식호흡을 하는 그레이스는 이런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이 나라는 병원도 멀어>



신의 가호가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었는지 그레이스는 멀쩡히 깨어났다. 사고로 인해 기억을 온통 잃어버렸지만 살아 남았다. 그러나 눈을 뜬 그레이스를 기다리는 건 사랑하는 사람의 살해 소식이었다. 그 사건의 제 1용의자는 그 날 행적이 묘연하다 사고를 당한 그레이스 자신이었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그레이스를 보며 사건을 맡은 비숍 형사는 촉이 온다. 왠지 얘일 것 같아. 예전에 제 1용의자가 어리단 이유로 배제했다 큰코 다친 비숍은 그레이스가 애인 마이클을 죽였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같이 사건을 맡은 헤켓은 반대였다. 제발 그녀가 아니기를. 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 운명처럼 만난 여성이 자신이 담당하는 살인 사건의 용의자라니. 저 아름다운 천사가 살인자일 리 없다. 헤켓은 비숍에게 차마 말하지 못한 채 그레이스를 도와주려고 물심양면 노력한다.



갈 곳을 잃은 그레이스는 언니 리사의 집에 머물며 온갖 의혹의 시선과 싸운다. 언니 리사는 계속 말한다. 그레이스. 넌 절대 범인이 아니야. 범인은 따로 있을 거야. 그 날 네가 마이클의 집에 가겠다고 말했었지만 그게 어때서. 리사는 또 말한다. 그레이스. 날 믿어. 넌 범인이 아니야.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가족, 리사. 그레이스는 왜 리사의 말에 점점 더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 걸까. 그녀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거 아세요? 경관님과 제가 하는 일이 비슷하다는 사실이요. 저도 마치 탐정이 된 것 같아요. 물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이 집과 집 안의 물건들을 뒤져보면서 가끔씩 되살아나는 기억들을 모으는 것 뿐이지만, 그래도 매일 아침 일어나면 해답을 찾아 열심히 찾아보고 있어요."


"이렇게나 기억나는 게 없다는 걸 믿을 수가 없어요. 이 집에 살았던 건 분명하고, 여기저기 조금씩 기억나는 부분들은 있지만 과거에 대해 알면 알수록 무슨 막장 드라마처럼 느껴져요."


지하실, 숲. 그레이스는 자신이 살던 집을 둘러싼 거대한 악몽같은 기억을 조금씩 되찾아 간다. 계속해서 들려오는 소녀의 흐느낌과 싸우던 그레이스와 달리 사건은 점점 더 그레이스가 용의자일 수밖에 없는 증거들만 나온다. 비숍과 헤켓은 결국 충돌하고 비숍은 헤켓과 그레이스 사이를 알게 되고 그를 직무해제 시킨다. 헤켓은 결국 독자적으로 그레이스 사건을 파헤치게 되고 그레이스와 비슷한 시기에 진실에 한걸음 다가서게 된다.


누구도 설명하지 못했던 과거의 일이 그레이스의 기억으로부터 눈 떴을 때 그녀는 온전한 자신이 아닌 '깨져버린 그레이스'를 만나게 된다. 그녀를 추적하던 인물의 베일이 벗겨지고 사건이 물 흐르듯 폭발적으로 진행될 때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마지막 장까지 뒤흔드는 서스펜스라더니 시체를 파헤치는 장면까지도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순간 시체 파헤치던 헤켓보고 손 씻으라고 외쳤다.(책을 향해...) 묘사가 쫄깃해서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부분은 아직도 온 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렇지. 스릴러 소설은 이런 맛이 있어야 읽는 법이지.



아.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표지 뒤에 [절대 속지마, 절대 믿지마, 절대 죽지마]란 글귀가 강렬하게 쓰여져 있길래 믿고 절대 속지 않았다.

...미안해요 디스킨 씨. 너무 절대적으로 안 속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진짜 안 속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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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사게 할 것인가 - 시간이 지나도 살아남을 마케팅 핵심 키워드 25
이치원 지음 / 로고폴리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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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한 조합이었다. 영화 속 소재를 통해 광고의 실마리를 찾는다는 전개가 자연스러웠다. 마케팅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유용한 책이라고 소개했지만 사실 잘 모르는 사람도 술술 읽을만한 책이었다. 모르는 용어가 나온다고 해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니까.


광고는 사람들의 심리를 잘 읽어야 하는 분야다. 그건 관객을 한순간에 휘어잡아야 하는 영화의 특성과도 일맥상통한다. <어떻게 사게 할 것인가>는 광고와 관련된 일화들을 통해 소비자의 반응을 보여주고자 한다. 결론은? 생각보다 소비자는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 만약 어떤 제품이 있다고 가정할 때, 소비자가 그 제품을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1. 내게 꼭 필요한 제품이어서 2. 기능이 참신해서 3. 제품 중에 가장 우수해서. 사람들에게 설문조사를 한다면 꽤 많은 이들이 1,2,3번의 항목을 높은 순위로 체크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좀 더 세련되지 못한 이유들로 즐비하다.


밝히기 부끄럽지만 난 편의점에 가서 물건을 살 때면 꼭 1+1, 2+1을 확인한다. 계획에 없던 소비였음에도 1+1 물건을 사게 되면 왠지 득본 기분이다. 돈을 주고 돈 번 기분이다. 그러나 막상 나중에 가계부를 확인해 보면 달라진다. 그냥 내가 쓴 돈의 일부일 뿐. 벌기는 개뿔이다. 돈을 도대체 어디에 쓴 걸까 막 뒤져보면 안 사도 되는 품목에 눈이 돌아간다. 그 때는 득본 기분이었던 마음이 후회로 가득하게 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다. 아, 내 돈.


<어떻게 사게 할 것인가>는 편의점에서 1+1을 사는 내 행태를 꼬집어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합리적인 소비를 하고 있다고 믿는' 착각에 빠져 산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 그걸 안다고 해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애써 우겨보기도 한다. "가끔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된다고!" 라고 열심히 외치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면 <어떻게 사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많은 이들에게 보람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어려운 광고 용어가 빼곡하게 적힌 책이 질렸다면, 좋아하는 영화와 결부시켜 나 자신의 소비행태와 광고의 매력에 홀딱 빠져보는 <어떻게 사게 할 것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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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엔지니어들
구루 마드하반 지음, 유정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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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엔지니어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만큼 그들은 엄청난 성과를 올리는 직종에 종사한다.

엔지니어들은 새로운 기회의 탐험가이자 경제의 프로펠러이며 물질적 삶의 설계자다.

모든 대화에 끼어드는 침묵의 소리이고 우리의 경험을 다채롭게 해주는 숨은 브로커다.

 

-<맨발의 엔지니어> 본문 中-

 

 

 

 

 

 

최초의 철학자라 불리는 탈레스의 일화를 아는가?

 

 

어느 날 탈레스는 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걷다가 우물에 빠졌다. 그 광경을 지켜본 하녀가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려다 한 치 발 앞에 있는 것도 보지 못하는군요!" 라는 답을 해 탈레스를 우습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가지에 너무 깊게 파묻힌 나머지 제 갈길조차 못 보는 탈레스의 어리석음을 비웃은 말이었지만 난 어쩐지 그 한가지에 미친 듯이 파묻힐 수 있는 탈레스의 열정이 부럽게 느껴졌던 이야기였다. 그만큼 한 가지에 집중하며 살기도 어려워진 시대가 되었다. '성공'을 해야한다는 확신으로 살아야 하는 불확실한 시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열정가가 있다. 바로 엔지니어들이다.

 

 

 

 

 

 

 

알프레드 히치콕에 대한 일화가 나온 다기에 샅샅이 살펴봤으나 히치콕의 일화는 에피소드로 따로 뺐다. 사실 이미 다른 이야기가 날 사로잡고 있어서 굳이 히치콕에 연연해할 필요는 없었다. 나를 매료시킨 주제는 아이러니하게도 'GPS와 공공안전의 결합'이었다. 삼성에서 만드는 폰은 위치추적이 가능하다 하여 사생활 침해 논란이 떴던 적도 있었건만, 공공안전을 지키는 시초가 GPS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게 놀라웠다. 세상의 모든 물건은 사용자가 어떤 식으로 사용하냐에 따라서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다. 폰의 중요 정보를 담고 있어 폰을 바꿔도 갈아 끼우기만 하면 예전 처럼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진 유심칩이 <킹스맨>의 발렌타인같은 악독한 놈을 만나면 내 머리를 터지게 할 수 있다는 것과 같달까.

 

 

 

 

 

 

미국에 제니퍼 쿤이란 여자가 살았다. 165센티미터에 아름다운 18살 여성이었다. 그녀는 시내에 있는 심리 클리닉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언젠가 심리학 의사가 되어 사람들의 정신을 치유해주겠다는 꿈을 안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 날 일이 끝나고 마트에 들렀고, 식료품을 샀다. 식료품을 사고 돌아가는 그녀의 뒤에는 수상한 20대 남성이 뒤따라 붙었다. 그리고 그녀는 납치를 당해 자신의 차 안에서 끔찍한 성폭행을 당했다. 어찌어찌 마지막 힘을 다해 911 전화를 눌렀고 동시에 그녀는 성폭행범의 총에 맞아 폐를 손상당하고 팔을 다쳤다. 911 직원은 제니퍼가 다시 어디론가 끌려가 머리에 총을 맞고 시체로 남을 때까지 그녀가 어디있는지 몰랐다.

 

 

 

 

 

그 일이 있고 나서 그녀의 아버지이자 공학가인 데이비드 쿤은 그 일에 대해 조사했다. 어떻게 대낮에 사람들이 오가는 마트 한 복판에서 여성을 납치하는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그는 곧 공공안전이 미흡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개개인 상점에 대한 관리는 엄격했으나 마트 전체를 관리하는 경비 시스템은 취약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데이비드는 공공안전에 GPS가 도입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모두가 GPS의 필요성에 대해 중요하게 인지하지 못했다. 데이비드는 말의 힘을 얻기 위해 몇번이나 국회의원에 도전했다. 긴 싸움이었지만 그의 노력은 뉴욕에서 벌어진 10대 아이들의 뱃놀이 사고를 통해 다시금 조명받았고 결국 GPS를 공공안전시스템에 도입하는 데 성공했다.

 

 

 

 

 

 

새로운 기술의 발전은 호기심을 근본으로 발생한다. 그러나 사람의 감성에서도 발전은 꽃피운다. 단순한 감성으로 딸을 잃은 것에 분노하지 않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했던 데이비드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나라에도 필요한 것이다. 세월호같은 끔찍한 참상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보다 근본적인 해결 시스템을 도입하도록 모두가 노력해야 하지 않았을까. 정치적으로 이용해먹으려는 사람들에게 실망했던 데이비드의 마음을 왜 나 역시 느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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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션 일레븐 스토리콜렉터 45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지음, 한정아 옮김 / 북로드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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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 응급구조사 지반은 여자친구와 <리어왕> 연극을 보러 가게 된다. 그는 연극 상영 중에 심장마비로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 아서의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그를 살리려고 노력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이 때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 통화 상대는 절친인 후아였다. 그녀는 토론토 종합 병원의 의사로 일하고 있었고, 전화하자마자 그녀는 뜻밖의 소식을 전한다.


--


"뉴스 봤어?"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입원한 독감 환자가 200명도 넘어."

"지난 세 시간 동안 입원한 환자만 160명이야. 벌써 열 다섯명이 사망했고, 응급실은 새로 들어오는 환자들로

북새통이야. 복도에까지 침상을 늘어놨어. 연방보건부가 곧 성명을 발표할 거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나도 모르겠어. 독감이야, 지반, 그것만큼은 확실해.

근데 이런 건 처음 봤어. 너무 빨라. 전파력이 너무 빨라서....."


"내 말 잘 들어."


"너, 빨리 여기서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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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친인 후아가 알려준 사실은 치사율 99.9%를 자랑하는 조지아 독감이었다. 사람들이 손을 써보기도 전에 감염되었고, 인구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줄어든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아났다는 것에 안도할 틈도 없이 더 거대한 장애물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문명의 몰락이었다.

 

 


 

<스테이션 일레븐>은 문명이 몰락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로, 각자의 인물들이 어떻게 삶을 살아가는 가를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나 문명 몰락 전과 후에 <리어왕>의 주인공 아서의 삶과 그의 주변 인물들의 삶의 연결고리를 차근차근 풀어 보여준다. 몰락 전에 살던 사람들은 몰락 후에도 전과 같은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몰락 후의 사람들은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문명'에 대한 동경과 그에 대한 욕구를 간접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살아간다. <스테이션 일레븐>은 인물들의 삶을 하나하나 조명하느라 전체 이야기를 구성하는 힘은 약하다. 하나의 퍼즐에 신경쓰다보면 전체를 이해하는 힘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물들의 인생을 조금 더 면밀하고 세세하게 살피는 작가의 온정어린 시선이 인물의 생동력을 더 강하게 만들어주게 되었다. <스테이션 일레븐>에는 조연이 없다.

 

 

세상이 혼탁해지면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게 사이비종교집단이다. <스테이션 일레븐>에도 사골마냥 이 집단이 등장한다. 가장 어리숙하고 연민을 구걸하는 신도들을 양성해 자신의 노예로 삼는 금발의 한 남자가 자신을 '재림예수'라고 소개하며 마을을 하나둘씩 장악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들에게 있어서 윤리와 법, 정신, 삶은 모두 그 '남자'에게서 나온다. 그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겐 고작 어린 여자아이에게 성적 관심이나 질질 흘리는 롤리타 남자일 뿐이지만 어쨌든 그들에게 있어 그 남자는 중요하다. 그가 지배하는 마을 중 한 곳에 머문 떠돌이 연극단은 그 미친 마을을 벗어나는 데 성공하지만 마을부터 따라온 소녀 한 명이 연극단 차에 숨어든 것을 알게 된다. 아이는 그 남자의 열몇번째 아내로 지목된 소녀였다. 차마 어린 아이를 사지로 내몰 수 없어 소녀를 데리고 떠나는 연극단은 알 수 없는 일을 겪게 된다. 연극단의 인물들이 차례로 한명씩 사라지는 것이다.

 

 

<스테이션 일레븐>이 그려내는 놀라움 중 하나는, 인간은 어떻게든 생존한다는 것이다. 종말 이후의 삶은 피폐하고 무엇하나 풍요로움이 없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자신이 같이 멸망하지 않을 거란 희망이 있다. 오늘에 거창한 목표를 세우고 가치있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오늘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내 생활은 여전히 존재하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 주는 기분이다. 또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가 공존하는 이웃이라는 걸 알려준다는 메세지가 내포한다는 점에서 영화 <투모로우>를 인상시킨다.


 

 

상실이 가져다 주는 정신적 파괴조차도 끝끝내 인간에 대한 연민과 윤리 앞에서 굴욕해버리듯사그라드는 결말이 다시 문명에 대해, 매일의 삶에 대해, 안락함에 대해 깨우쳐주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게 만드는 <스테이션 일레븐>이었다.

 

 

전체 흐름을 이끄는 이야기는 이 연극단의 여정과 문명 전의 인간관계를 다루는 식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여차하면 길을 잃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남의 리뷰를 읽고 해석하려 하지 말고 몇번이고 부딪쳐가며 정독하기를 바란다. 길 잃은 히치하이커는 지도 없이 책여정을 떠나지 말란 법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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