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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션 일레븐 ㅣ 스토리콜렉터 45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지음, 한정아 옮김 / 북로드 / 2016년 7월
평점 :
일시품절
겨울밤, 응급구조사 지반은 여자친구와 <리어왕> 연극을 보러 가게 된다. 그는 연극 상영 중에 심장마비로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
아서의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그를 살리려고 노력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이 때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전화 통화 상대는 절친인
후아였다. 그녀는 토론토 종합 병원의 의사로 일하고 있었고, 전화하자마자 그녀는 뜻밖의 소식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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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봤어?"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입원한 독감 환자가 200명도 넘어."
"지난 세
시간 동안 입원한 환자만 160명이야. 벌써 열 다섯명이 사망했고, 응급실은 새로
들어오는 환자들로
북새통이야.
복도에까지 침상을 늘어놨어. 연방보건부가 곧 성명을 발표할 거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나도 모르겠어. 독감이야, 지반, 그것만큼은 확실해.
근데 이런 건
처음 봤어. 너무 빨라. 전파력이 너무 빨라서....."
"내 말 잘 들어."
"너, 빨리 여기서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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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친인 후아가 알려준 사실은 치사율 99.9%를 자랑하는 조지아
독감이었다. 사람들이 손을 써보기도 전에 감염되었고, 인구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줄어든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아났다는 것에 안도할 틈도 없이 더
거대한 장애물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문명의 몰락이었다.
<스테이션 일레븐>은 문명이 몰락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로, 각자의 인물들이 어떻게 삶을 살아가는 가를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나 문명 몰락 전과 후에 <리어왕>의 주인공
아서의 삶과 그의 주변 인물들의 삶의 연결고리를 차근차근 풀어 보여준다. 몰락 전에 살던 사람들은 몰락 후에도 전과 같은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몰락 후의 사람들은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문명'에 대한 동경과 그에 대한 욕구를 간접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살아간다.
<스테이션 일레븐>은 인물들의 삶을 하나하나 조명하느라 전체 이야기를 구성하는 힘은 약하다. 하나의 퍼즐에 신경쓰다보면 전체를
이해하는 힘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물들의 인생을 조금 더 면밀하고 세세하게 살피는 작가의 온정어린 시선이 인물의 생동력을 더 강하게
만들어주게 되었다. <스테이션 일레븐>에는 조연이 없다.
세상이 혼탁해지면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게 사이비종교집단이다.
<스테이션 일레븐>에도 사골마냥 이 집단이 등장한다. 가장 어리숙하고 연민을 구걸하는 신도들을 양성해 자신의 노예로 삼는 금발의 한
남자가 자신을 '재림예수'라고 소개하며 마을을 하나둘씩 장악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들에게 있어서 윤리와 법, 정신, 삶은 모두 그 '남자'에게서
나온다. 그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겐 고작 어린 여자아이에게 성적 관심이나 질질 흘리는 롤리타 남자일 뿐이지만 어쨌든 그들에게 있어 그 남자는
중요하다. 그가 지배하는 마을 중 한 곳에 머문 떠돌이 연극단은 그 미친 마을을 벗어나는 데 성공하지만 마을부터 따라온 소녀 한 명이 연극단
차에 숨어든 것을 알게 된다. 아이는 그 남자의 열몇번째 아내로 지목된 소녀였다. 차마 어린 아이를 사지로 내몰 수 없어 소녀를 데리고 떠나는
연극단은 알 수 없는 일을 겪게 된다. 연극단의 인물들이 차례로 한명씩 사라지는 것이다.
<스테이션 일레븐>이 그려내는 놀라움 중 하나는, 인간은
어떻게든 생존한다는 것이다. 종말 이후의 삶은 피폐하고 무엇하나 풍요로움이 없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자신이 같이 멸망하지 않을 거란 희망이
있다. 오늘에 거창한 목표를 세우고 가치있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오늘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내 생활은 여전히 존재하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 주는 기분이다. 또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가 공존하는 이웃이라는 걸 알려준다는 메세지가 내포한다는 점에서 영화
<투모로우>를 인상시킨다.
상실이 가져다 주는 정신적 파괴조차도 끝끝내 인간에 대한 연민과 윤리
앞에서 굴욕해버리듯사그라드는 결말이 다시 문명에 대해, 매일의 삶에 대해, 안락함에 대해 깨우쳐주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게 만드는
<스테이션 일레븐>이었다.
전체 흐름을 이끄는 이야기는 이 연극단의 여정과 문명 전의 인간관계를
다루는 식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여차하면 길을 잃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남의 리뷰를 읽고 해석하려 하지 말고 몇번이고 부딪쳐가며 정독하기를
바란다. 길 잃은 히치하이커는 지도 없이 책여정을 떠나지 말란 법이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