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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참담했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부들부들 떠는 손의 감각이 느껴졌다. 유혈이 낭자한 역사의 현장에서 그들은 처참히 죽어 갔고 그렇게 사라져 갔다. 형언할 수 없는 비통한 심정에 젖은 영혼은 이승을 유유히 맴돌았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쥐락펴락한 국가는 그들에게 무엇이었을까?
30년도 훨씬 지난 오래전 사건을 뒤적였다. 1980년 5월의 광주.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일이다. 내심 부끄러웠다. 고통 속에 울부짖던 이의 한숨을 이제야 되돌아 보게 된 것이 그 이유에 대한 변명이었다.
이 소설이 출간되었을 당시를 기억한다. 주목받는 소설이었기에 이 책을 읽는 이가 상당히 많았다. 소설평을 몇 차례 읽으면서 이 소설을 읽어야겠다는 용기를 잃었다. 아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겠다. 섬뜩할 정도의 적나라한 묘사를 쉽사리 읽어 나갈 자신이 없었다. 그러기를 몇 년, 이제야 이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
전공 과제 때문이었지만, 소설을 몇 편 썼던 경험이 있다. 갑작스레 소설 쓰기를 언급하는 건 이 소설을 쓴 작가 한강이 소설 구상에서 퇴고에까지 심적으로 얼마나 힘겨웠을까라는 막연한 공감 때문이다. 소설을 읽는 독자도 이렇게 심장이 쿵쾅거리는데, 이 소설을 완성한 작가가 참 대단해 보인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잠시 묵념을 올렸다. 소년의 한 맺힌 혼이 부디 다른 세상에서는 편안히 잠들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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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손, 사람의 허리, 사람의 다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았다. 살려주시오. 헐떡이며 남자가 외쳤다. 경련하던 남자의 발이 잠잠해질 때까지 그들은 멈추지 않고 곤봉을 내리쳤다. 곁에서 쉬지 않고 비명을 지르다 머리채를 잡힌 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너는 모른다. 덜덜 턱을 떨며 천변 언덕을 기어올라 거리로, 더 낯선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거리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 p.25
하루하루의 불면과 악몽, 하루하루의 진통제와 수면유도제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젊지 않았습니다. 너 이상 누구도 우리를 위해 염려하거나 눈물 흘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자신조차 우리를 경멸했습니나. 우리들의 몸속에 그 여름의 조사실이 있었습니다. 검정색 모나미 볼펜이 있었습니다. 하얗게 드러난 손가락뼈가 있었습니다. 흐느끼며 애원하고 구걸하는 낯익은 음성이 있었습니다. - p.126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 p.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