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철학 현대의 지성 13
박이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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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무엇인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예술 전반의 포괄적 핵심이라면, 예술 작품(미술, 음악, 문학)을 바라봄에 있어 드러나는 표상을 파악하는 일은 더없이 중요하다. 그 잣대는 앞서 말한 것처럼 철학의 논리로 접근하여 작품, 해석, 평가에 준거한다면 그 미지의 세계, 그 가능성의 영역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 제3절 가능 유일 세계로서의 예술 작품
'예술 작품은 어떤 사물, 현상 혹은 행위가 문화적 맥락 속에서 제도적으로 가능 유일 세계라고 정해진 것'이라고 우리는 정의한다. 그렇다면 예술 작품이 제도적으로 정해진 것이라는 게 앞서 본 디키의 이론에서 이해되었음을 전제할 때 그 밖의 다른 것들 역시 제도적으로 정해지는 다른 것들과 구별되어 그것을 예술 작품이게 하는 특질로서의 가능 유일 세계가 설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world라는 개념과 가능possible이라는 개념, 그리고 유일unique 이라는 개념에 대한 개별적 정의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세계란 말은 흔히 애매하게 사용되지만 원래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지구상 때로는 그 이상의 태양계까지를 가리켜 그것을 총괄적으로 말할 때 쓰인다. 이런 경우 세계란 말은 물리적 존재 일반을 뜻한다. 그러나 세계란 말은 한 사람, 한 사회 혹은 인간 전체가 갖고 있는 의식 구조를 뜻하기도 한다. '한국인의 세계' '이상(李箱)의 세계' '카프카의 세계' 혹은 '나의 세계'라는 경우가 그러한 의미로 세계라는 말이 쓰인 예가 될 수 있겠다. 그것은 '세계관world-view'이란 말과도 거의 같은 뜻이다. 이런 경우에 세계는 객관적 사물 현상으로서의 대상 그대로가 아니라 그러한 객관적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그러한 것을 표상한 것이라는 뜻도 된다. 그것은 한 대상과 그 대상에 대한 의식의 관계를 나타낸 것으로 본다. 그러나 여기서 의식과 대상의 관계, 다시 말해서 표상된 대상으로서의 세계는 기계적이거나 단편적인 의미를 갖지 않고 총체적인 유기적 표상을 의미한다. 예술 작품을 '가능 유일 세계'라고 할 때의 세계란 말은 이와 같은 의미의 ‘세계'로서 의미를 갖는 유기적 총체를 뜻하며 그것만 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표상을 뜻한다. 예술 작품이란 이런 뜻에서 '세계'이다.

덧붙임 : 데리다, 들뢰즈의 제자이기도 한 박이문 선생님. 국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뛰어난 철학자, 석학임에도 현학적인 어투 없이 글이 참 친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지식을 뽐내기보다 어떻게 쉽게 전달할까에 핵심을 두시고 오래 고민하신 흔적이 역력했다.
기본적인 개념부터 조곤조곤 설명해 주시는 느낌. 지루해 보이는 이 책을 나름 재미있게 읽었다. 30년도 넘은 '예술철학'이 20쇄 넘게 찍었다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리라. 이분의 저서는 만인에게 추천할 만하다. 집에 2권 더 도착. 앞으로도 박이문 선생님이 풀어놓는 사상의 뿌리를 쭈욱 따라 올라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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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이문의 문학과 철학 이야기 살림지식총서 181
박이문 지음 / 살림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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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철학은 뗄 수 없는 유기적 상관관계에 놓여 있다. 인식론적, 방법론적 측면에서 각각의 작가와 철학자가 전달하려는 세계관은 차이를 보이지만, 인간 이해 중심에서 살펴보면 그 공통 분모는 맥락을 함께 한다. 인간의 사유 능력은 선험적 논리로 그 그루터기를 이룰 수밖에 없기 때문에 철학적 바탕을 잘 이해해야 문학 작품의 진리를 식별할 수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문학 속에 철학이 있고 철학 속에 문학이 있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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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fi 문학과지성 시인선 511
강성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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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내면의 언어이며, 내적 소리의 발화이다. 이러한 발화적 능력은 시인에게 있어 입밖으로 끄집어내는 단순함에 그치지 않는다. 시인은 타인의 세계가 자신의 '시 세계'로 맞닿을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낯섦'을 '익숙함'으로 연결시키는 일종의 유기체적 요소를 제공한다. 그 드러냄과 관계의 방식은 사람들이 알고 있음에도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일상적인 현상을 기반으로 한다.

일상적 공간을 무대로 삼았음에도 내면의 언어가 그 사유적 한계를 뛰어넘는 시인이 바로 강성은이다. 그녀는 '동료들이 뽑은 올해의 젊은 시인상'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는데 "과도한 수사 없이도 환상적인 공간을 그려낼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시집"을 낸 시인으로도 평가받으며 시인으로서 위치를 공고히 한다. 최근 <Lo-fi>가 시인에게 대산문학상이라는 영예를 안겨 주었다는 사실이 이를 다시 한번 뒷받침한다.

어느 시인이 신춘문예 수상자들을 보여 시어가 갇혀 있음 지적한 바가 있다. 시어가 갇혀 있다는 것은 시의 기저에 가장 중요하게 흐르는 독자와의 소통의 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말한다. 그와 반대로 강성은의 시는 열린 공간으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독자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녀의 언어는 특별한 기교가 없어 더욱 빛난다. 시인의 시어는 한 마리 새가 되어 훨훨 날고 있는 것이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모를 새는 생각보다 멀리, 높이 날고 있다. 어느 순간 새는 시를 읽는 독자의 곁에까지 날아온다. 비상하는 새는 화자가 되고, 독자가 되고, 시인이 되기도 하며 삼각관계의 순환 구도를 이룬다. 이 변주곡의 형식은 읽는 자의 눈, 그 깊이에 따라 무한 확장된다.

시인의 아픔은 날카로운 언어로 타인을 찌르지 않는다. 화자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평온하고, 그 뒤에 이미 뭉뚝해진 슬픔의 어조를 갖고 있다. 그래서 더 크게 다가오는 깊은 슬픔의 얼굴을 내비친다. 그것을 읽어 내는 독자에게 표현의 형식은 아름다움에 그치는 형식이 아니며, 사유적 확대라는 일깨운다. 시는 얼마나 많이 읽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읽어 내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가능성은 전적으로 독자 자신에게 달려 있다.

덧붙임 : 그녀의 시는 읽을 때마다 새롭다. 개인적으로 <Lo-fi>를 더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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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520
이제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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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하다'는 술어가 주는 막연한 느낌을 가만히 떠올려 봤다. 손끝에 닿을 수 없는 무언가. 한없이 멀어져 가닿을 수 없는 이상향. 희뿌연 안개에 휩싸여 형태가 불분명한 무언가. 의미는 모호해도 공통적인 점은 그리움의 대상에 다다르기를 바라는 누군가의 간절한 마음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마음이자 독자의 마음이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화자를 자신의 분신으로 내세움으로써 여러 형태의 목소리로 변주하여 시 속의 정서로 녹여 낸다. 그 마술적 감각으로 언어와 언어의 연쇄 작용을 쉼 없이 혹은 거침없이 내보이는 시인 중 한 명이 바로 이제니 시인이다.

이제니 시인의 특징적인 면모는 시어가 고여 있지 않고 끝없이 흘러감에 있다. 의미 없음으로 귀결되는 언어의 조합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생동하며 끌어올려지고 발화되는 형태로써 자신을 찾기를 갈망한다. 시인들은 결국 말해지지 않는 것을 자신만의 시 세계에 표출하고, 그것을 정제된 언어를 통해 드러내는 사람인 것이다

아마 시인 자신은 '그리하여 그녀가 흘려 쓴 것들'이 독자에게까지 흘러들어 그들 자신이 흘려 썼을, 흘려 쓸 시어로 삶의 잔해 속에서도 밝게 빛나길 바랄 것이다.


나무 식별하기

그 나무의 이름을 들었을 때 나무는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일평생 제 뿌리를 보지 못하는 나무의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 눈과 그 귀와 그 입에 대해서.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에도 나무는 자라고 있었다. 나무의 이름은 잘 모르지만 밤에 관해서라면 할 말이 있다. 나는 밤의 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너도 밤의 나무 아래 앉아 있었다. 밤과 나무는 같은 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늘과 그늘 사이로 밤이 스며들고 있었다. 너는 너와 내가 나아갈 길이 다르다고 말했다. 잎과 잎이 다르듯이. 줄기와 줄기가 다르듯이. 보이지 않는 너와 보이지 않는 내가 마주보고 있었다.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꿈에서 본 나뭇잎이었다. 내가 나로 사라진다면 나는 바스락거리는 나뭇잎이라고 생각했다. 참나무와 호두나무 사이에서. 전나무와 가문비나무 사이에서. 가지는 점점 휘어지고 있었다. 나무는 점점 내려앉고 있었다. 밤은 어두워 뿌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침묵과 침묵 사이에서. 어스름과 어스름 사이에서. 너도밤나무의 이름은 참 쓸쓸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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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방랑자의 집에서 기거하는 백여 권의 문학과지성시인선은 나에게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시원은 하나이지만 뻗어 나가는 뿌리의 형태는 제각각이다. 비로소 시는 시 자체로서의 충일함, 숭고한 정신의 미학을 갖는다. 어느 시가, 어느 시인이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시는 시로서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시인들의 행간, 그 들숨과 날숨의 간격을 읽으며 스스로 유폐시킨 나 자신을 찾았다. 그리고 그 야누스의 얼굴을 시 안에서 보았다. 문학과지성사에 경의를 표함. (문학과시인선을 등잔불 삼았던 과거의 독백을 반추하며) 나에게 함께 있으면 즐거운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에게 이해받는 삶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지만 타인의 슬픔과 근심을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다. 어쩌면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등에 짊어진 거대한 빙하를 바라볼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삶에도 정답이 없듯 개개인의 인생에도 정답은 없다. 그것이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삶이라는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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