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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루덴스 - 놀이하는 인간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놀이라는 것을 동물의 왕국에서는 '언젠가 자신을 지켜줄 기술을 습득하는 방법'이라고 정의 했었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 한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 집에 돌아온 아이들에게 종종 즐거운 하루였는지를 물어보곤 했다.
유치원은 거의 모든 수업을 놀이를 통해 진행하고 있다. 한복을 입고 예절교육을 할 때도, 에너지관리공단 같은 곳에 견학을 갈 때도 아이들은 즐거워한다.
어쩌면 그러한 모든 과정들이 하위징아가 말하는 [호모 루덴스]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집에서도 그랬어야만 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 아이들에게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든다. 아빠가 자녀교육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어 고생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하위징아의, 거의 모든 인간들의 행위 속에서 놀이적 요소를 찾으려는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우리는 흔히 노력하는 자보다 즐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때때로 현실에 지치고 인간관계에 있어서 피곤한 일상을 맞이하곤 한다. 하지만, 하위징아와 같이 놀이를 통한 깊이 있는 관심과 해석으로 우리에게 직면한 상황들을 즐겁게 바꾸어 낼 수 있었다면 그렇게 힘들어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에서 하위징아는 문화, 종교, 철학, 경쟁, 신화, 법률, 학습, 결투는 물론 전쟁에 있어서도 놀이적 요인을 찾아냈다. 이러한 놀이 요소들은 주위의 현상들에 대한 인식이나, 알아야 할 무언가에 대한 지식 습득의 수단으로서 놀이적 요소가 사용되어왔으며, 또한 지금도, 우리도 그러한 놀이 요소들을 개발하여 사용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 일과 놀이가 분리되고, 놀기 위한 놀이와 퇴폐적인 놀이로 변해가고 있는 상황을 아파하며 놀이 정신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내가 요즘 힘들어하는 것은 나의 일상을 즐기고 있지 못한 까닭일 것이다.
요즘의 세태에서도 이런 "유치한 놀이"를 통해, 정치인이 옳지 못한 정책을 진행하는 것을 국민이 방관하게 하거나, 언론인이 사실을 덮고 독자를 선동하는 방법에 사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현대의 사회 생활은 놀이와 비슷하여 놀이 요소인 것처럼 보이는 현상에 지배되고 있다. 걸프전 때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의 전쟁이라고 보더라도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방송사들의 행태로 인해 전쟁은 컴퓨터 게임과도 같아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이렇듯 우리는 놀이적 요소에 대한 관심으로 자신이 하고 있는, 또는 하고 싶은 무언가를 더 잘 해낼 수도 있고, 놀이적 요소를 결합하여 당신의 잘못된 결정을 유도하고, 옳지 못한 것을 옳은 것으로 믿도록 만들려는 의도에 대해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나도 앞으로는 "영원한 놀이 요소"를 찾아 끊임없는 탐구와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다.
대체로 고전은 그다지 읽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은 각각의 짤막한 글들로 구성되어 있는 이유도 있고, 옮긴이가 달아놓은 소제목이 고전을 고전으로 느끼지 않고 읽을 수 있도록 하는 큰 힘이 되어주었다고 말하고 싶다.
하위징아의 노력과 함께 옮긴이의 노력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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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의 김예슬이라는 학생이 대학을 거부하며 대자보를 붙였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40122
그 옛날 강의석이라는 고등학생이 학교의 종교 수업에 대한 거부로 시끄러웠던 때가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응원속에 그 학생의 의지는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강의석과 그 당시의 사건으로 국한하여 말하는 것이다.
김예슬의 글을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겠지만, 너무 일찍 이 사회의 잘못된 시스템에 대한 고민을 갖은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물론, 그것을 조금 늦게 알게 되었다면, 글에서도 표현되었던 것처럼 그렇고 그렇게 살아가게 되어, 역시 그들처럼 이 사회를 지탱하는 역할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자리가 자리를 만든다'는 말로 스스로의 비굴한 변화를 변호하려 한다. 안타깝다.
언제까지 생을 위한 삶을 강요 당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학습은 놀이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 헤르만 헷세의 유리알 유희에서 말하는 유희는 끊임없이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나가는 과정이었다.
돈은 쓸만큼만 벌어도 좋을텐데, 내일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돈은 많을수록 좋은 것이며, 삶은 생에 희생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보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긁어모으는 이런 개같은 놈들이 주도하는 나라가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김예슬의 앞날에 아름다운 삶이 펼쳐지기를 기원해 본다.
즐거운 삶이 기다리고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