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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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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지난달 치뤄졌던 대선의 열기가 역대의 대선들과 비교해보아도 상당히 뜨거웠기에, 다들 정치 권력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볼 계기를 가지게 된 것 같아요. 조지오웰은 권력의 기능을 상당히 흥미롭게 소설화 시킨 작가에요. 1984는 전체주의 국가의 감시하에서 인간다움을 지키려고 했던 한 개인이, 결국 권력에 굴복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어요 소설이 아무리 흥미롭다고해도, 1949년에 씌어진 디스토피아 소설이 1984년도 훨씬 지나 2013년인 지금에도 의미 있게 읽히는 것은 무서운 일이죠. 누군가는 이 소설을 읽으며, 전체주의, 공산주의 나라에서 살고 있지 않음에 감사함을 느끼고, 우리나라의 현실에 만족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소설 속 빅브라더의 시선을, 자유 민주주의 국가인 우리나라에서도 느낄 수 있어요.

 

 1984를 읽으면 권력의 억압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의 도처에 산재해 있다는 미셸 푸코의 얘기를 떠올리게 돼요. 푸코는 우리의 자유를 길들이고 억압하는 권력이, 청와대나 국회과 같은 거시적 층위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도처의 미시적인 차원에서 교묘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말해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라고 말하죠. 미시적인 차원에서의 권력의 작용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나는데, 외적인 지배를 의식하기는 쉽지만, 내면에 각인되어 버린 억압적 기억은 스스로 인식하기 어렵기 때문이에요. 푸코는 감옥의 예시를 들어요. 처음 감옥에 수감된 죄수는 간수가 감시할때와, 간수가 없을 때에 행동을 달리할 수도 있죠. 하지만 점점 그 기간이 길어질수록, 이러한 복잡한 이중행각은 오래가지 않아요. 타인의 감시여부에 따라 일일이 신경쓰며 태도를 달리하기보단, 자체검열하여 요구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 실존적인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을 줄이기 때문이죠. 이렇게 푸코가 말하는 '자발적 복종' 혹은 '노예적 주체'가 탄생하게 되요.

 

 1984의 주인공 윈스턴도 이와 같은 과정을 겪었죠. 1984의 세계에서 반항하는 거의 유일한 인간이었다가, 끝내는 마음속으로부터 빅브라더를 사랑하게 되는 윈스턴의 변화 과정은, 일제 강점기 말기에 이르러 끝내 변절하고 말았던 우리나라의 많은 지식인을 생각하게 만들어요. 그런 지식인들은 윈스턴처럼 고문과 같은 외부적 압력에 굴복한 것일 수도 있죠. 그러나 1984속의 다른 사람들, 일제강점기의 다른 민중, 그리고 우리들은, 실은 그러한 외압 전에, 이미 자체 검열을 해버리는 사람들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신어가 우리의 사고방식을 한정시켜버렸듯, 자연스럽게 이중사고를 하게되듯 말이에요. 고문과 같은 외압은 너무나 티가나서 비판 받기 쉽죠. 이러한 것은 몇몇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필요하므로 자제하도록 하고, 다수의 사람들을 길들이는 것은 언론의 말, 유명인을 통한 담론의 생성, 교육 등을 통한 미시적인 차원에서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현대의 권력은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몰라요.

 

 푸코는 '광기'라는 말의 역사를 탐구했어요. '광기'는 중세시대 이전에는 일종의 예지적 재능을 일컫었대요. 하늘의 말을 들을 수 있는 특권이었죠.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에는 이성을 벗어난 사유를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했죠. 천재는 흔히 광기가 있곤 했어요. 그런데 근대로 넘어오며 광기를 윤리적 결함으로 간주하게 되었대요. 이 때부터 광기는 비정상으로 사유되고 사회에서 격리수용되기에 이르러요. 이는 어쩌면 그들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반사회적 천재를 배제시키고자 한 권력의 보이지 않은 지배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이처럼 지식의 규정이 변화하고, 마치 패러다임처럼 우리가 그 규정 내에서 사고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러한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으로 넘어가서 과거를 돌아보기 전에는 잘 인식하기 어렵죠. 대선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했으니, 민감한 소재이긴 하지만, '북한'이라는 단어의 규정은 어떻게 변화해 왔던가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감시당하고 있고, 권력에 의해 억압된 삶을 살고 있단 것은 무섭게 느껴져요. 푸코는 우리 삶 속의 훈육되지 않은채 불쑥 드러나고 하는 순간 순간들에 시선을 집중하라고 말하죠. 그러기 위해선, 특정 권력의 지배가 오래되어 자기도 모르게 훈육되더라도, 스스로에 대해 돌아보고 집중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겠죠. 에너지의 소모가 너무 많아 자꾸만 체념해 버리고 싶더라도 말이에요.

 

 아직 읽어보지 않으셨다면, 또 하나의 흥미로운 디스토피아 소설인 올덕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추천합니다. 전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를 읽어보려구요. 1Q84가 실제로 1984를 모티프로 해서 씌어진 소설이란건 오빠 덕분에 알게 되었네요. 아, 그전에 하루키의 대표작인 상실의 시대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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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5
스탕달 지음, 이동렬 옮김 / 민음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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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과 흑

 

 적과 흑이라는 제목을 듣고, 사회주의의 이념을 떠올렸던건, 사회주의 진영을 흔히 붉은색으로 표현하곤하는 한국 사회의 관념에 저도 모르게 익숙해졌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적과 흑은 그러한 이념대립이 주를 이루기 이전의 시대에 대해 다루고 있는 소설이에요. 소설의 배경은 1830년대의 프랑스로,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옛 귀족이 권력을 잡은 시대에요. 나폴레옹과 군인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와, 성직자와 귀족으로 대표되는 보수주의가 대립하고, 귀족층은 권력의 유지를 위해 자유주의자들을 배격하죠. 군인의 붉은 군복과, 성직자의 검은 사제복에서 적과 흑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을 거에요. 재미있는건, 주인공인 쥘리엥 소렐이 되고자 했던 두가지 신분이 바로 군인과 성직자라는 거에요. 쥘리엥은 굉장히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요. 귀족이 아닌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존심과 명예를 중시하죠. 야심은 그의 삶을 지탱해나가는 가장 큰 것이지만, 그렇다고하여 목적을 위해 자존심을 굽히진 않아요. 이러한 그의 성격에 비춰볼 때, 군인이 그의 이상이었다면, 성직자는 현실적인 범위에서의 타협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스스로와 타협하면서도 지켜나갔던 그의 야심을 무너뜨리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어요.

 

 사실 적과 흑은 전반적으로 연애소설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층민인 쥘리엥이 상류사회의 여인들과 사랑을 나누다가 비극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죠. 목로주점의 작가 에밀 졸라는 '스탕달만큼 진실로 사랑을 그려내는 이는 이전에 없었다.'라며 극찬했다고 해요. 실제 적과 흑의 모티프는 신문에 났던 한건의 치정사건이라고 하는데요, 짤막한 치정사건을 하나의 소설로 당대의 사회상과 엮어나갔다는 것이 대단하게 여겨져요. 하지만 제가 가장 감탄한 부분은,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는 부분들이었어요. 등장인물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다는건, 소설을 읽는 것의 매력이죠. 쥘리엥,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여인들인 레날부인과 마틸드는 저와 상당히 닮은 점들이 있어요. 그래서인지 그들의 대화나 독백을 통해, 제 자신에 대해 돌아볼 수 있었어요. 그들과 저의 공통점은 자존심이 강하다는 것, 그리고 사랑을 처음 경험해 본다는 것.

 

 쥘리엥에게 사랑의 시작은 야심의 일부였죠. 상류층의 숙녀를 연정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스스로의 자존감을 만족시키기 좋은, 영예로운 일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에요. 돈키호테가 둘시네아를 그러한 대상으로 삼았던 것처럼요. 하지만 이러한 방식의 사랑은 눈 앞에 놓여 있는 사랑의 감정 그 자체보다, 자신이 그리는 사랑이라는 이미지에 대상을 끼워넣게 되죠. 그건 레날부인이나 마틸드도 마찬가지에요. 비범한 하층민과의 사랑은 무미건조한 삶에 열정을 불어넣어주는 로망. 스스로 만들어낸 이미지를 사랑하는 것이기도 하죠.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이미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이미지를 넘어서는 범위의 일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러면 상대의 행동을 자기 멋대로 단정하거나, 상대를 비난하거나, 때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기도 하죠. 

 

 사랑이 깊어지고 오래되게되면, 이미지는 서서히 옅어지고 눈앞의 대상이 떠오르죠. 이 때 권태기가 온다고도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이때부터 시작되는게 아닌가 해요. 그렇지만 두렵죠. 처음 해보는 사랑이기에 자신을 어디로 이끌어갈지 모르거든요. 자신이 그다지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될까봐, 너무나 사랑에 빠져드는 순간은, 역으로 너무나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기도 해요.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그런데 이 과정은 때론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마음속에서 좋아하지 않는다며 합리화시키게도 돼요. 마틸드가 사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다, 무심하게 구는 혼란스러운 태도를 저는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세속적인 것과 고귀한 것의 차이는 뭘까요? 그런 것을 가르는 인류 보편의 기준이란 것이 있을까요? 사랑은요? 유학자 중에는 여인과의 사랑을 눈앞의 욕망에 흔들리는 세속적인 가치로 보고 멀리하기도 한걸요. 적과 흑을 읽고 저는, 사랑 자체의 고귀함에 대해 말한다기 보다는, 정열적인 것의 고귀함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파리의 사교계 사람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미소를 띄며 대화하지만, 모두 속으론 권태를 느끼고 있죠. 그런 무채색의 살롱에서 쥘리엥은 비록 단색의 옷을 입고 있을지언정 어떤 반짝임이 있어 보여요. 그것은 위험해보이더라도, 홀로 살아있다는 느낌이죠. 무채색으로 살아가기 싫다면 때때로 편안함을 경계해야 할거에요. 좋아하는 것을 위해선 가끔 두려움과 위험도 감수해보는 정열이 필요하겠죠. 세상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아요. 그만큼 부딪쳐 볼만한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는 거겠죠. 알 수 없는 타자와의 가장 강렬한 부딪침이 사랑아닐까요? 가장 보편적인 이런 마주침마저 회피해버린다면, 세상의 다른 많은 매력적인 것들과 마주칠 기회를 잃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러한 정열의 대상은 타인의 욕망이 아닌 자신의 욕망이어야 해요. 돈이나 지위와 관련한 정열이 고귀해 보이지 않는 것은, 네가 원하니깐 나도 원한다는, 혹은 너보다 잘나고 싶다는 마음이 바탕에 있기 때문이죠. 이러한 욕망은 타인의 관념에 매개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쥘리엥이 죽음을 앞두고 야심에 대해 초연해진 것도 이러한 맥락이었겠죠. 마지막의 그에게 남은건 사랑과 정열만 남은 순수한 평온이었어요. 마틸드의 사랑이 비극적이었던 까닭은, 그녀의 사랑은 아직 질투심에 머물러 있는 단계였기 때문 아닌가해요. 쥘리엥이 페르바크 부인에게 접근하자 그녀의 사랑이 자극받은 것은, 질투심 역시 타인의 욕망에 매개된 것이란 것을 보여줘요. 쥘리엥처럼 직접 지하감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을 갖지 않더라도, 간접적이나마 이러한 것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건, 적과 흑이 준 기회겠죠.

 

 소설이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선,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가 바탕이 되어야해요. 그러한 측면에서 사랑이야기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테마이기에 접근 장벽이 낮죠. 그러한 보편적인 이야기 속에 시대상이나 철학관처럼 많은 것을 담아낸다는 것은 너무나 매력적이에요. 저도 언젠간 그런 긴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요. 그때엔 우리의 이야기가 소재가 되려나요?

PS. 발터 벤야민이 말하길 '사랑에 빠진 남자는 자신이 읽은 모든 책에서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찾아보게 된다는데 진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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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뱀이 잠든 섬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2
미우라 시온 지음, 김주영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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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뱀이 잠든 섬

 

 흰 뱀이 잠들어 있는 섬이라니, 모험의 냄새가 물씬 나지 않나요? 일본의 외딴 섬 오가미에서는 13년만에 대축제가 벌어져요. 대축제는 신사의 차기 주인이 대를 이어받고, 섬에 흐르는 기운을 안정시키는 의식이죠. 흰 뱀이 잠든 섬은 이러한 대축제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환상적이고 기묘한 일들과, 그것을 풀어나가는 소년들의 우정에 대해 그리고 있어요. 대축제를 앞두고 섬에 '그것'이 나타났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아요. '그것'은 바다와 산을 드나든다는 전설 속의 괴물. 금빛 눈을 가진 이 괴물은, 눈을 마주친 사람의 눈 속으로 들어가 몸속을 먹어치운다고 전해져요. 이름없이,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회피하며 '그것'이라고 대리칭해지는 이 괴물은, 우리에게 친숙한 한 판타지 소설을 생각나게 하죠. 해리포터 시리즈 말이에요. 해리포터의 최대 적인 볼드모트경 역시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며,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자'로 일컫어지곤 했죠. 볼드모트도 뱀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치에요.

 

 그러나 오가미 섬의 괴물은 뱀은 아니에요. 오히려 뱀은 마을의 신으로, 오가미의 신사에서는 백사 또는 황신이라고 불리는 존재를 모시고 있죠. 영물과, 그것을 모셔둔 신사라는 것은 상당히 일본적인 색채를 느끼게 해요. 하지만, 어쩌면 이러한 것은 비단 일본의 색채가 아니라, 인류 보편적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나라도 신령이라하여 명산이나 영물을 모시는 사당을 두곤 했었죠. 우리나라도 남해의 수많은 섬중 어떤 곳에서는 아직까지 그러한 신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을지도 몰라요. 아프리카의 수많은 부족들도 마찬가지죠. 오가미섬은 이러한 신의 기운이 단순한 믿음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도 보여지는 곳이에요. 비록 선택받은 몇사람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하지만요. 대축제의 비극은 그 선택받은 자가 신사를 모시는 신구가의 장남이 아닌 차남이라는데서 시작되어요. 신력이 없는 장남 신이치와, 선택받은 자의 비늘을 지니고 태어난 차남 아라타. 이들 두 형제간의 갈등은 장남은 남고, 차남은 떠나야 하며, 외부인의 이주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폐쇄적인 섬의 전통과 결부되어, 이를 지키고 싶어하는 무리와, 바꾸고 싶어하는 무리의 간의 갈등으로 확산되어요.

 

 해리포터가 볼드모트경을 물리친 것이 론과 헤르미온느라는 친구들과의 우정에서 가능했듯, 오가미 섬도 두친구의 우정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게 돼요. 사토시와 고이치, 둘은 지념 형제죠. 오가미 섬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두 장남을 지념 형제로 엮어주는 풍습이 있어요. 가질 지(持)에 생각 념(念). 생각 념 자를 풀어 보면, 이제 금(今)과 마음 심(心)으로 나눌 수 있죠. 결국 지념이란 지금, 마음을, 함께 나누어 가지는 사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인지 사토시가 섬 외부에 있는 고등학교를 가는 바람에 서로 오래 만나지 못했어도, 둘은 만나면 매일 보았던 사이처럼 친밀함을 느껴요. 하지만, 언뜻 사토시와 고이치는 다른 점이 너무 많아 보여요. 사토시는 섬에 오면 자꾸만 이상한 것들이 보여요. 게다가 배를 타는 것을 무서워하죠. 섬은 그에게 이질적인 공간이에요. 반면 고이치는 어린나이부터 어른들과 고기잡이를 나가고, 섬에 편안함을 느끼는, 전형적인 섬의 사람이죠. 사토시가 보는 이상한 것들도 그에겐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이런 둘의 다른 모습은 오히려 긍정적인 시너지 작용을 하여 마을의 위기를 극복하는 힘이 되죠. 사토시의 신력은 섬을 안정시키는 방향으로 길을 안내해요. 고이치는 이런 사토시가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편안함을 주고, 보이는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구분해주며 용기를 주죠. 평생 한명이라도 이러한 친구가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 일거에요. 이런 친구가 있으신가요? 저는 딱 한명, 너, 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몇몇 친구들의 얼굴이 눈앞에 스쳐가네요. 오빠는 어떻냐구요? 우정이랑 사랑은 다른거잖아요^^

 

 섬이 위기를 극복하고 안정되자, 사람들은 하나 둘 일상으로 돌아가죠. 신력이 있는 아라타와, 섬의 장남인 사토시는, 어쩌면 섬에 남아야 하는 사람들이지만, 섬에서 벗어나 자신을 길을 찾아가게 돼요. 뱀이라고 하면 사실 썩 좋은 느낌을 주진 않는게 사실이에요. 팔다리도 없이 미끄덩하게 생긴데다, 비늘로 덮여 있는 이 생물의 생김새는, 사람과 닮은 면이 너무 없어서인지 호감을 갖기 어렵죠. 하지만 오가미 섬의 백사는 오히려 황신과 함께 '그것'의 검은 기운으로부터 섬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였어요. 이러한 점을 상기하며 우리도 뱀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에서 벗어나보면 어떨까요? 아라타와 사토시가 섬의 관념들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찾아가듯, 우리도 관념에 얽메일 필요는 없지 않겠어요? 인습을 벗어나 섬 밖으로 나온 그들의 선택은, 앞으로 그들 자신은 물론, 오가미 섬을 발전시켜주는 계기가 될거라고 믿어요. 우리도 혹시 또 모르죠. 뱀을 긍정적인 영물로 대하다보면, 올 한해 뱀의 가호가 우리와 함께할지.

 

 계사년 뱀띠 해도 어느덧 한달이 되어가요. 어떻게, 잘 보내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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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꾸는 책 읽기 - 세상 모든 책을 삶의 재료로 쓰는 법
정혜윤 지음 / 민음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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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삶을 바꾸는 책읽기

 

먹고 살기도 바쁜데 언제 책을 읽나요?

책 읽는 능력이 없는데 어떡하나요?

삶이 불안한데도 책을 읽어야 하나요?

책이 정말 위로가 될까요?

책이 쓸모가 있나요?

책의 진짜 쓸모는 뭐죠?

읽은 책을 오래 기억하는 법이 있나요?

어떤 책부터 읽으면 좋을까요?

+

a

 

삶을 바꾸는 책읽기는 책읽기에 대해 갖게 되는 위의 8가지 질문, 그리고 숨겨진 한가지 질문(+a)에 대해 답하는 책이다.

 

그러나,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준다고 하여, 여타의 자기계발서와 같지는 않다.

오히려 저자는, 자기계발서와 긍정 심리학 책들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긍정심리학 책들은 사실상 마법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간절히 원한다 원한다, 수리수리 마수리 주문을 외면 원하는 것을 갖게 되지요. 이러한 방식은 우리를 안심시킵니다. 지금 당장 뭔가를 해보게 하니까요.(주문을 걸게 하는 것 자체로)

자기계발서를 읽고 컴퓨터 앞에 앉아 당장 고쳐야 할 것, 과감히 포기해야 할 것의 목록을 만듭니다. 그런 목록을 만드는 과정에서 우리는 위로를 받습니다.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빽빽한 시간 계획표를 만들고 보람찬 방학을 보낼 것 가은 환상에 젖는 아이처럼.

경쟁적인 삶의 불안 속에서, 우리는 당장 쓸모없어 보이는 일에는 무관심하게 됩니다. 깊이 가라앉아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구하는 내면이 우리에게 있었다는 것조차 잊게 됩니다’

 

결국 저자가 말하는 삶은 바꾸는 책읽기 라는 것은, 인문학적 책읽기라고 할 수 있다. 다시말해, 이 책은 인문학적 책읽기에 대한 강한 권유이다. 인문학은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갖게 한다. 스스로를 돌아보며 상처를 직시하고, 그 과정에서 그러한 상처를 극복해나갈 힘을 얻게한다. 저자가 말하듯, 내면에서 해답을 구하게 되는 것이다. 삶을 바꾸는 책읽기는 8가지 질문에 천천히 답을 해준다. 즉문즉답이 아니라, 다양한 책들의 사례들을 통해, 질문과 답을 곱씹어보게 한다.

 

그래서,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류시화 시인의 시처럼,

이 책을 읽는 동안, 책을 읽고 있어도 책이 읽고 싶어진다.

다양한 책들의 사례를 보며, 저자의 방대한 독서량에 감탄하다가,

‘아, 이책은 다음에 읽어봐야지’라며 포스트잇으로 체크해 놓은 것이 한가득.

어떤 책부터 읽으면 좋겠냐는 8번째의 질문에서 제시한 저자의 대답 중 하나가, 책 속의 책을 따라가는 방법이다. 삶을 바꾸는 책읽기를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나만의 책리스트가 만들어 진다.

 

나의 삶을 바꾸는 책읽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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