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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를 만나면 경영이 즐겁다 - 개인의 행복과 조직의 성과를 이끄는 감사경영
이미영.김만석.김병욱 지음 / 프로방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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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원리로 설명하는 감사 실천의 효과 <감사를 만나면 경영이 즐겁다-김만석,이미영,김병욱>

 

 최근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시작으로, SNS를 통해 여러가지 릴레이들이 유행한 적이 있다. 그 중 하나엔 감사 릴레이도 있었다. 누군가 삶에서 감사한 점에 대해 5가지 정도를 적고 후발 주자를 지목하면, 그 주자 역시 감사한 점 5가지를 적고 다음 주자를 지목하는 식이다. 부담을 주는 일부 릴레이들과는 다르게, 감사 릴레이는 부담없이 작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삶에서 감사했던 일들을 돌아보고 행복한 감정을 갖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을 기꺼이 릴레이에 동참하게 하였다. 그런데 릴레이에 참여했던 그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무조건 삶을 긍정하라고 말하는 책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저명한 인사의 말일 경우 더욱 그렇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발생하는 삶의 어려움들을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시키려 한다는 인상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없다며 회의적인 자세로 삶에 임하는 것 역시 좋지 않다. 삶에 의욕을 생기게 하고, 사회에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희망이요, 희망의 근간에는 생에 대한 감사와, 변화에 대한 긍정의 에너지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내가 그러하듯, 누구나 감사하는 삶의 태도가 개인에게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삶을 활기차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감사하는 삶을 실천하기 어려운 것은, 이것이 피상적으로만 와닿았기 때문이며,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감사하는 것이 진짜 좋을까? 왜 좋을까?' 이 책은 그러한 의문에서 출발하였다. '감사 실천의 효과를 원리로 설명하고 입증해보자!' 

 

 이 책은 김만석, 이미영, 김병욱 저자 3인방의 실제 경험을 기반으로 쓰여졌다. '어떠한 방식으로 감사하는 것이 좋은 효과를 가지고 있을까?', '실천을 지속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까?' 이러한 고민들은 실제로 감사하는 삶을 실천해보지 않고는 갖기 힘든 고민들이다. 그래서 이 책은 여타의 긍정심리학 책들이나 자기계발서와는 다르다. 단순하게 하면 된다는 식이 아니라, 원리로 납득시키고, 다양한 사례로 입증하며, 개인과 회사 조직 내에서 지속적으로 실천 가능한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해준다. '선택의 원리''긍정해석의 원리', '파동의 원리' 등을 통해 감사의 효과를 설명하고, '습관의 원리''감사행동 4단계 원리'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준다. 또한 부록에서는 '행복나눔 125' 를 소개하고, '감사 경영 program'을 제시함으로써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경기 침체가 길어지면서, 많은 기업들과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책은 어려움 속에서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고민하고 있는 사람과 기업 모두에게 적합하다. 저자들은 말한다. 감사를 통해 개인이 행복해지면, 가정이 행복해지고, 조직과 회사 역시 행복해진다고. 그리고 진짜 그렇게 되었다고. '가화만사성'이라 하였다. 옛 선인들도, 개인으로부터의, 가정으로부터의 행복이, 직장과 사회에 영향을 미침을 인지하고 계셨다. SNS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감사 릴레이를 작성했듯, 부담없는 마음으로 저자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따라가다보자. 어느덧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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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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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본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이에게

 

 추리 소설 좋아하시나요? 범인이 누구일지 궁금해하며 나름의 추리를 해보고, 이 작가는 정말 천재라며 감탄하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에(->얘 범인)이런 낙서가 되어 있어 분노했던, 그런 기억들이 혹시 있으신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은 이러한 다른 추리 소설들에 비해, 범인이 누구인지 쉽게 던져 줘요. 소설은 피해자의 어머니인 여교사의 독백으로 시작돼요. 학생 중 범인이 있다며 말하는 그녀의 독백 속에는, 단 두명의 학생 이름만이 등장하죠. 집이 전파상을 하는 '와타나베'군과, 피해자 마나미에게 솜토끼를 사주는게 어떻겠냐고 이야기했던 '시모무라'군 말이에요. '고백'은 이처럼 누구나 추리 할 수 있을만한 힌트를 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바로 다음 장에서, 다른 학생의 입을 통해 범인이 이들이었다고 대놓고 말하죠. 범인이 누구인지 초반부터 알아버렸으니, 재미없어서 책을 덮게 되지 않냐구요? 아니요, '고백'은 마지막장까지 손에서 놓지 못할 만큼 흥미롭게 읽혀요. '고백'이 추구하는 추리는 범인이 누구인가를 찾는 추리가 아니에요. 그 추리는 가해자가 어떠한 심리로 가해를 하게 되었는지, 피해자의 복수 이후엔 또 어떠한 심리로 살아가게 되는지, 그 심리에 대한 추리죠. 말씀드렸다시피, 가해자는 두명, 와타나베 슈야와 시모무라 나오키에요. 슈야가 그가 발명한 전기충격 기구로 마나미를 기절시키고, 나오키는 기절한 마나미를 수영장에 빠뜨리죠. 어린 마나미는 결국 익사하게 돼요. 둘은 범행의 공모자이긴 하지만 상당히 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어요. 자라온 가정환경도, 범행에 이르기까지의 심리상태도, 복수를 당한 후의 태도변화도 모두 다르죠. 

 

 우선 슈야의 경우를 볼까요? 그의 어머니는 재능있는 과학자였어요. 연구가 벽에 부딪쳤던 어느날 교통사고까지 당한 그녀는, 평범한 전파상인 아버지와 결혼하여 슈야를 낳고, 일을 그만두었죠. 그러나 그녀의 내면에는 여전히 지적인 열망이 있었어요. 그녀는 슈야를 키우며 논문을 썼는데, 그것으로 교수직 제의까지 받게되죠. 하지만 아이를 버리고 떠날 수가 없다며 거절해요. 얼마전 보았던 최윤영 아나운서의 인터뷰가 떠오르네요. 그녀도 집에서 육아를 하다 보니 우울했다고 해요. 아이가 마냥 예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니까 나쁜 엄마가 된 것 같아 죄책감마저 들었대요. 결국 일과 육아를 함께하니 그제야 숨통이 조금 트인다는 내용이었어요. 슈야의 어머니도 그런 우울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문제는 그럴 때 그녀가 슈야를 학대했다는 것이죠. 그리곤 슈야에 대한 미안함과 자괴감에 목놓아 울어요. 어린 슈야가 자라온 가정환경은 이러했어요. 그러나 그는 어머니를 원망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그 스스로도 어머니의 발목을 잡은 것은 자신이라며 슬퍼하죠. 결국 학대 사실을 아버지가 알게 되자, 슈야의 어머니는 '슈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엄마는 규칙을 어기더라도 달려올 거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요. 그 이후 슈야의 모든 삶은 오직 어머니가 달려올 그날을 위한 여정이었어요. 그는 과학자인 어머니의 관심을 끌기 위해 발명품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멀리 있는 어머니에게까지 소문이 들리도록 파괴적인 것이어야 했죠. 전기충격기를 이용한 마나미의 살인 사건이 조용히 묻히자, 그는 새로운 계획을 하고, 결국엔 학교에 폭탄을 설치하기까지 해요. 복수를 당한 것은 아무 상관 없었어요. 오히려 그것으로 어머니의 관심을 끌 수 있다면 좋으니까요.

 

 나오키의 경우 오히려 어머니의 맹목적인 사랑을 받으며 자랐죠. 나오키의 어머니는 '내 자식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분이었어요. 항상 나오키를 자랑하고 칭찬했죠. 나오키가 성적이 좋지 못하자, '넌 착하다'라고 칭찬하며, 성적을 발표하는 학교에 편지를 쓰기까지 했던 분이에요. 그녀는 어쩌면 평범한 어머니일수도 있어요. 우리는 같은 마음으로 자식 교육에 힘쓰는 수많은 강남 학원가의 어머니들을 알고 있으니까요. 나오키의 슬픔은, 자신이 그러한 어머니의 기대에 못미친다는 것을 아는데 있어요. 그로인해 발생하는 괴리감은 스스로를 점점 더 보잘것없게 느껴지게 하죠. 똑똑한 와타나베가 접근하자 슈야는 기뻤어요. 그와 함께 있으면 자신도 비슷한 등급의 사람이 되는 것만 같았거든요. 와타나베가 발명품으로 나쁜놈들을 응징하자고 하자, 마치 영화 주인공이라도 된 양 들떴어요. 존재의 가치를 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계획한 일이 끝난 후, 슈야가 그를 이용했을 뿐이라며 친구로서의 가치를 부정했을 때, 그는 무너지고 말아요. 여린 자신을 부정하고 슈야보다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기절해있었을 뿐인 마나미를 수영장에 던지죠. 유코의 복수 이후 나오키는 등교를 거부했어요. 종국에 나오키가 어머니를 찌른 까닭은, 자신과 같이 공포에 떨고 있을거라 여겼던 슈야가 학교에 등교했다는 말을 들은 것과, 어머니가 자신에게 '실패'라는 말을 꺼낸 것 때문이었죠. 부여잡고 있던 자신의 가치라는 끈이 끊어져버리는 순간이었거든요. 어쩌면 나오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말'이라는 것은 사태를 돌이킬 수 없이 확정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곤 하죠.

 

 이처럼 다른 둘에게 공통점을 찾아본다면, 그건 '고독' 이라고 할 수 있을 거에요. 인간은 누구나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해요. 사람은 아무것도 주어진 것 없이 세상에 던져졌어요. 그리고 언젠간 다시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릴 운명이죠. 그렇기에 우린 존재의 불안감을 느끼고, 끊임없이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해요. 그렇기에 자신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확인받고 싶어하는데, 타인은 이러한 역할을 해줘요. 그런데, 그 누구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절대적인 고독감을 느끼게 되겠죠. 그러한 상황에서 누군가 자신의 쓰임을 알아준다고 여겨지면 집착하게 되고요. 슈야는 그 대상이 어머니였고, 나오키는 일시적이긴 했지만 슈야였던 것이죠. 슈야는 자신의 과학적 재능을 인정받고 싶어했어요. 하지만 아버지도, 친구들도, 마지막 객관적인 타인이라고 생각했던 유코선생님조차, 발명품의 가치를 칭찬해주지 않죠. 그래서 전국발명품대회에 출전에 수상하지만, 그것이 다른 사회적 사건의 그늘에 가려져 생각만큼의 주목을 받지 못하자 좌절하고 말아요. 나오키는 인정받고는 싶지만, 그럴만한 자신의 재능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데에 문제가 있었죠. 자유로운 환경에서 차분히 그가 재능을 찾을 수 있도록 지켜봐주었다면 좋았겠지만, 어머니의 지나친 관심과, 타인과 끊임없이 비교하는 학교의 환경은, 그를 빠르게 누군가의 관심을 받게하는 방향으로 내몰리게 했어요.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 받지 못한 그들은 절대적으로 고독했어요.

 

 이러한 사정을 생각하면 그저 고독하고 싶지 않았을 뿐인 두 가해자의 입장도 모두 이해가는 면이 있죠. 안타까운 마음에, 이들의 범죄에 대해 이를 참작 사유로 삼아달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네요. 그러나 그것은 제3자의 입장일 뿐, 죽은 마나미의 어머니인 유코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들의 범죄는 단순히 우발적인 것도 아니고 계획적인 것이었어요. 그리고 그 대상은 아무것도 모르고 연약한 어린아이를 향했죠. 인터넷과 미디어에 쉽게 노출되는 환경으로 인해 어린 학생들의 강력범죄가 늘고 있는 상황에서, 형사미성년자제도는 한계가 있죠. 유코는 자신의 손으로 복수를 하겠다고 결심하고, 에이즈환자인 자신의 남편의 혈액을 두 가해자의 우유 속에 집어넣어요. 그리고 그것은 여렸던 나오키에겐 효과적인 복수가 되죠. 그러나 그녀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원치 않았던 남편이 이를 몰래 저지한 것을 알자, 슈야를 향한 다른 복수를 준비하게 되요. 슈야가 학교에 설치했던 폭탄은 그녀에 의해 슈야의 어머니의 연구실로 향했어요. 

 

 자신의 손으로 꼭 복수하겠다는 유코의 입장은 이해가 되죠. 그러나 이러한 비극을 원천적으로 막고, 복수의 악순환을 막기 위해선 보다 근본적인 사회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육아와 일이 보다 병행하기 쉬운 환경이라면 어땠을까요? 교수직을 제의하며 슈야를 함께 데려가 이후 양육과 학업에도 도움을 준다고 했다면요. 슈야의 어머니는 학문적 성과를 올리면서도 슈야라는 가능성 있는 과학자를 키울 수 있었을 거에요. 또, 나오키의 어머니가 말한 적이 있듯, 학교에서 착한아이의 인품도 인정해 준다면요? 학교의 교육이 비단 인품만이 아니라, 개인의 다양한 가치를 존중하고, 비교하여 줄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도록 조용히 지켜봐주는 방향으로 이뤄진다면, 나오키와 같은 학생을 지킬 수 있었겠죠. 이러한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슈야와 나오키와 같은 아픔을 지닌 아이들은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어요. 여성의 사회진출은 늘어나지만 육아에 대한 제도적 지원이 아직은 미비한 까닭에, 아이를 부담으로 여기는 워킹맘들이 많이 있죠. 게다가 게임 속에선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 때문에, 컴퓨터 게임으로 내몰리는 많은 아이들이 있어요. 이러한 아이들을 모두 잠재적 범죄자로 본다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행복한 사회를 위해, 한방향으로 몰아가는 사회는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경제가 어려울수록, 발전에만 신경쓰느라, 교육에 대해서는 무뎌지기 쉬우니까요. 저도 머지않아 워킹맘이되고, 아이를 키우게 될테죠. '고백'을 읽고 받은 이러한 느낌을 잊지 않으려구요.

 

2013.2.15

청하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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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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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우린 삼청동을 걸었었죠. 먹쉬돈나에서 떡볶이를 먹고, 전통차를 마시고, 교육박물관에서 교복입고 사진을 찍으며 놀기도 했어요. 한옥 마을을 구경하고, 예쁜 새들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는 전시회도 구경했죠. 글구 길거리 뽑기에서 뽑은 우리의 커플링^^ 이 얘길 갑자기 왜하나면, 그날 봤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기억하세요?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고, 파리의 밤거리를 배회하던 주인공은 이상한 마차에 오르죠. 예술이 번성했다는 19세기 말의 벨에포크 시대로 돌아간 주인공은 한 바에 도착하는데요, 콜 포터가 피아노를 연주하며 let's do it, let's do it love 노래를 부르고 있었죠. 그리고 소개받는게 바로 피츠제럴드 부부였어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도 영화를 통해 유명해졌지만, 스콧 피츠제럴드의 대표작은 역시 '위대한 개츠비'라고 할 수 있죠. 당대에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린건 데뷔작인 '낙원의 이쪽'이었지만, 위대한 개츠비는 스콧의 사후, 그의 대표작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주목받게 되었다고 해요. 스콧은 아버지가 판사였던 명문가의 딸 젤다를 사랑했지만, 사회적 신분의 차이로 결혼을 거절당했어요. 그리고 발표한 '낙원의 이쪽'이 성공하게되자, 젤다에게 청혼하여 결혼에 이르죠.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던 젤다는 똑똑하고 발랄했지만, 부유한 집안의 딸 특유의 사치스러움이 있었나봐요. 스콧은 데뷔작의 성공으로 번 돈을 그녀와 금새 다 써버리고, 이후 출판사에 책 몇권을 내줄 것을 약속한 뒤 가불하는 방법으로 삶을 살아간대요.

 

 이러한 피츠제럴드 부부의 모습은, 위대한 개츠비에 개츠비와 데이지의 모습으로 투영되어 있어요. 소설속에서 데이지는 부유한 명문가의 딸인 반면, 개츠비는 소위 가난한 서민에 불과했죠. 개츠비는 신분의 벽과 1차대전의 참전으로 인해 사랑하는 데이지와 오랫동안 이별하게 되었고, 그 사이 데이지는 비슷한 명문가의 자제인 톰과 결혼하게 돼요. 개츠비의 이름은 사실 제임스 개츠. 그는 야심이 있는 청년이었죠. 희망찬 미래를 끊임없이 이미지화 하고, 그러기 위해 이름도 그럴듯하게 바꿔요. 데이지라는 상류층 여성과의 사랑 역시, 그의 이미지화의 결과인지도 몰라요. 그러나 그의 사랑이 순수하지 않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요? 데이지와 헤어진 뒤 개츠비는 사업을 통해 많은 돈을 벌었고, 매일 밤 화려한 파티를 벌이죠. 많은 돈이 투자된 파티의 비밀은, 그 목적이 실은 오가는 많은 사람들 중 누군가로부터 데이지를 만날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 였다는 거에요. 그는 평생을 오직 데이지와 만날 순간을 위해 살아왔고, 그의 사랑은 데이지의 살인을 대신 뒤집어써주고, 그녀를 위해 죽기에까지 이르러요.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었건, 그의 사랑은 소설의 제목처럼 위대하게 보이네요.

 

 소설의 배경인 이스트에그와 웨스트에그는 미국의 동부와 서부를 떠올리게 해요. 개츠비의 집은 웨스트에그에, 데이지와 톰의 집은 당연하게도 이스트에그에 있죠. 그녀의 집에서 개츠비의 집이 내려다보이지만, 매일밤 파티를 벌여도 그다지 큰 관심을 갖지 않아요. 아무리 개츠비가 부를 축적했어도, 그의 부가 예컨데 귀족인 아버지의 유산 상속과 같이, 그들이 생각하기에 고상한 방법으로 축적된 것이 아니기에, 데이지는 톰을 선택해요. 현대의 자기계발서들은 끊임없이 말하죠. 바라는 것이 있으면 간절히 이미지화하라, 그리하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우리는 계급이 없이 동일한 출발선상에 있다고 믿곤 하지만, 실은 자본은 갈수록 공고하게 세습되고 있고, 더이상 출발선은 같지 않죠. 현대사회에도 귀족은 있어요. 개츠비는 신흥부자라도 되었지, 이제 그런 신흥부자가 되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하죠. 자기계발서들은 부의 세습, 나아가 신분의 세습이라는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시선을 돌리고, 성공과 실패를 오직 개인에게 전가시키곤 해요. 멸시받는 것은 너의 탓이다, 그러니 계속 소망하고, 계속 노력해라. 하지만, 희망이라는 눈가리개 앞에, 개인을 지치지 않는 부품으로 쓰려는 사회의 못된 속셈이 보이는 건 저뿐일까요? 개츠비의 비극은 이러한 자기계발서의 반례가 되어 더욱 씁쓸하게 느껴지네요.

 

 위대한 개츠비라고 하면 '위대한 캣츠비'라는 강도하 작가의 만화가 떠오르기도 해요. 반전이 충격적이었던 이 웹툰은, 위대한 개츠비와 제목의 유사성에 비해선 그다지 닮은 점이 많진 않아요. 닮은 점이 있다면, 사랑과, 사랑의 비극에 대해 그렸다는 것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웹툰은 흥미로워요. 생각난김에, 개츠비나 데이지의 사랑과는 또 다른, 캣츠비, 하운두, 페르수, 선, 그리고 페르수의 남편의 각기 다른 형태의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재밌을거에요.

http://cartoon.media.daum.net/webtoon/view/cats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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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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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지난달 치뤄졌던 대선의 열기가 역대의 대선들과 비교해보아도 상당히 뜨거웠기에, 다들 정치 권력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볼 계기를 가지게 된 것 같아요. 조지오웰은 권력의 기능을 상당히 흥미롭게 소설화 시킨 작가에요. 1984는 전체주의 국가의 감시하에서 인간다움을 지키려고 했던 한 개인이, 결국 권력에 굴복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어요 소설이 아무리 흥미롭다고해도, 1949년에 씌어진 디스토피아 소설이 1984년도 훨씬 지나 2013년인 지금에도 의미 있게 읽히는 것은 무서운 일이죠. 누군가는 이 소설을 읽으며, 전체주의, 공산주의 나라에서 살고 있지 않음에 감사함을 느끼고, 우리나라의 현실에 만족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소설 속 빅브라더의 시선을, 자유 민주주의 국가인 우리나라에서도 느낄 수 있어요.

 

 1984를 읽으면 권력의 억압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의 도처에 산재해 있다는 미셸 푸코의 얘기를 떠올리게 돼요. 푸코는 우리의 자유를 길들이고 억압하는 권력이, 청와대나 국회과 같은 거시적 층위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도처의 미시적인 차원에서 교묘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말해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라고 말하죠. 미시적인 차원에서의 권력의 작용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나는데, 외적인 지배를 의식하기는 쉽지만, 내면에 각인되어 버린 억압적 기억은 스스로 인식하기 어렵기 때문이에요. 푸코는 감옥의 예시를 들어요. 처음 감옥에 수감된 죄수는 간수가 감시할때와, 간수가 없을 때에 행동을 달리할 수도 있죠. 하지만 점점 그 기간이 길어질수록, 이러한 복잡한 이중행각은 오래가지 않아요. 타인의 감시여부에 따라 일일이 신경쓰며 태도를 달리하기보단, 자체검열하여 요구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 실존적인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을 줄이기 때문이죠. 이렇게 푸코가 말하는 '자발적 복종' 혹은 '노예적 주체'가 탄생하게 되요.

 

 1984의 주인공 윈스턴도 이와 같은 과정을 겪었죠. 1984의 세계에서 반항하는 거의 유일한 인간이었다가, 끝내는 마음속으로부터 빅브라더를 사랑하게 되는 윈스턴의 변화 과정은, 일제 강점기 말기에 이르러 끝내 변절하고 말았던 우리나라의 많은 지식인을 생각하게 만들어요. 그런 지식인들은 윈스턴처럼 고문과 같은 외부적 압력에 굴복한 것일 수도 있죠. 그러나 1984속의 다른 사람들, 일제강점기의 다른 민중, 그리고 우리들은, 실은 그러한 외압 전에, 이미 자체 검열을 해버리는 사람들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신어가 우리의 사고방식을 한정시켜버렸듯, 자연스럽게 이중사고를 하게되듯 말이에요. 고문과 같은 외압은 너무나 티가나서 비판 받기 쉽죠. 이러한 것은 몇몇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필요하므로 자제하도록 하고, 다수의 사람들을 길들이는 것은 언론의 말, 유명인을 통한 담론의 생성, 교육 등을 통한 미시적인 차원에서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현대의 권력은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몰라요.

 

 푸코는 '광기'라는 말의 역사를 탐구했어요. '광기'는 중세시대 이전에는 일종의 예지적 재능을 일컫었대요. 하늘의 말을 들을 수 있는 특권이었죠.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에는 이성을 벗어난 사유를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했죠. 천재는 흔히 광기가 있곤 했어요. 그런데 근대로 넘어오며 광기를 윤리적 결함으로 간주하게 되었대요. 이 때부터 광기는 비정상으로 사유되고 사회에서 격리수용되기에 이르러요. 이는 어쩌면 그들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반사회적 천재를 배제시키고자 한 권력의 보이지 않은 지배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이처럼 지식의 규정이 변화하고, 마치 패러다임처럼 우리가 그 규정 내에서 사고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러한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으로 넘어가서 과거를 돌아보기 전에는 잘 인식하기 어렵죠. 대선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했으니, 민감한 소재이긴 하지만, '북한'이라는 단어의 규정은 어떻게 변화해 왔던가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감시당하고 있고, 권력에 의해 억압된 삶을 살고 있단 것은 무섭게 느껴져요. 푸코는 우리 삶 속의 훈육되지 않은채 불쑥 드러나고 하는 순간 순간들에 시선을 집중하라고 말하죠. 그러기 위해선, 특정 권력의 지배가 오래되어 자기도 모르게 훈육되더라도, 스스로에 대해 돌아보고 집중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겠죠. 에너지의 소모가 너무 많아 자꾸만 체념해 버리고 싶더라도 말이에요.

 

 아직 읽어보지 않으셨다면, 또 하나의 흥미로운 디스토피아 소설인 올덕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추천합니다. 전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를 읽어보려구요. 1Q84가 실제로 1984를 모티프로 해서 씌어진 소설이란건 오빠 덕분에 알게 되었네요. 아, 그전에 하루키의 대표작인 상실의 시대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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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5
스탕달 지음, 이동렬 옮김 / 민음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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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과 흑

 

 적과 흑이라는 제목을 듣고, 사회주의의 이념을 떠올렸던건, 사회주의 진영을 흔히 붉은색으로 표현하곤하는 한국 사회의 관념에 저도 모르게 익숙해졌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적과 흑은 그러한 이념대립이 주를 이루기 이전의 시대에 대해 다루고 있는 소설이에요. 소설의 배경은 1830년대의 프랑스로,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옛 귀족이 권력을 잡은 시대에요. 나폴레옹과 군인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와, 성직자와 귀족으로 대표되는 보수주의가 대립하고, 귀족층은 권력의 유지를 위해 자유주의자들을 배격하죠. 군인의 붉은 군복과, 성직자의 검은 사제복에서 적과 흑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을 거에요. 재미있는건, 주인공인 쥘리엥 소렐이 되고자 했던 두가지 신분이 바로 군인과 성직자라는 거에요. 쥘리엥은 굉장히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요. 귀족이 아닌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존심과 명예를 중시하죠. 야심은 그의 삶을 지탱해나가는 가장 큰 것이지만, 그렇다고하여 목적을 위해 자존심을 굽히진 않아요. 이러한 그의 성격에 비춰볼 때, 군인이 그의 이상이었다면, 성직자는 현실적인 범위에서의 타협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스스로와 타협하면서도 지켜나갔던 그의 야심을 무너뜨리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어요.

 

 사실 적과 흑은 전반적으로 연애소설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하층민인 쥘리엥이 상류사회의 여인들과 사랑을 나누다가 비극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죠. 목로주점의 작가 에밀 졸라는 '스탕달만큼 진실로 사랑을 그려내는 이는 이전에 없었다.'라며 극찬했다고 해요. 실제 적과 흑의 모티프는 신문에 났던 한건의 치정사건이라고 하는데요, 짤막한 치정사건을 하나의 소설로 당대의 사회상과 엮어나갔다는 것이 대단하게 여겨져요. 하지만 제가 가장 감탄한 부분은, 등장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하는 부분들이었어요. 등장인물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스스로를 바라볼 수 있다는건, 소설을 읽는 것의 매력이죠. 쥘리엥,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여인들인 레날부인과 마틸드는 저와 상당히 닮은 점들이 있어요. 그래서인지 그들의 대화나 독백을 통해, 제 자신에 대해 돌아볼 수 있었어요. 그들과 저의 공통점은 자존심이 강하다는 것, 그리고 사랑을 처음 경험해 본다는 것.

 

 쥘리엥에게 사랑의 시작은 야심의 일부였죠. 상류층의 숙녀를 연정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스스로의 자존감을 만족시키기 좋은, 영예로운 일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에요. 돈키호테가 둘시네아를 그러한 대상으로 삼았던 것처럼요. 하지만 이러한 방식의 사랑은 눈 앞에 놓여 있는 사랑의 감정 그 자체보다, 자신이 그리는 사랑이라는 이미지에 대상을 끼워넣게 되죠. 그건 레날부인이나 마틸드도 마찬가지에요. 비범한 하층민과의 사랑은 무미건조한 삶에 열정을 불어넣어주는 로망. 스스로 만들어낸 이미지를 사랑하는 것이기도 하죠.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이미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이미지를 넘어서는 범위의 일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거에요. 그러면 상대의 행동을 자기 멋대로 단정하거나, 상대를 비난하거나, 때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기도 하죠. 

 

 사랑이 깊어지고 오래되게되면, 이미지는 서서히 옅어지고 눈앞의 대상이 떠오르죠. 이 때 권태기가 온다고도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이때부터 시작되는게 아닌가 해요. 그렇지만 두렵죠. 처음 해보는 사랑이기에 자신을 어디로 이끌어갈지 모르거든요. 자신이 그다지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될까봐, 너무나 사랑에 빠져드는 순간은, 역으로 너무나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기도 해요.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그런데 이 과정은 때론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마음속에서 좋아하지 않는다며 합리화시키게도 돼요. 마틸드가 사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다, 무심하게 구는 혼란스러운 태도를 저는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세속적인 것과 고귀한 것의 차이는 뭘까요? 그런 것을 가르는 인류 보편의 기준이란 것이 있을까요? 사랑은요? 유학자 중에는 여인과의 사랑을 눈앞의 욕망에 흔들리는 세속적인 가치로 보고 멀리하기도 한걸요. 적과 흑을 읽고 저는, 사랑 자체의 고귀함에 대해 말한다기 보다는, 정열적인 것의 고귀함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파리의 사교계 사람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미소를 띄며 대화하지만, 모두 속으론 권태를 느끼고 있죠. 그런 무채색의 살롱에서 쥘리엥은 비록 단색의 옷을 입고 있을지언정 어떤 반짝임이 있어 보여요. 그것은 위험해보이더라도, 홀로 살아있다는 느낌이죠. 무채색으로 살아가기 싫다면 때때로 편안함을 경계해야 할거에요. 좋아하는 것을 위해선 가끔 두려움과 위험도 감수해보는 정열이 필요하겠죠. 세상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아요. 그만큼 부딪쳐 볼만한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는 거겠죠. 알 수 없는 타자와의 가장 강렬한 부딪침이 사랑아닐까요? 가장 보편적인 이런 마주침마저 회피해버린다면, 세상의 다른 많은 매력적인 것들과 마주칠 기회를 잃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러한 정열의 대상은 타인의 욕망이 아닌 자신의 욕망이어야 해요. 돈이나 지위와 관련한 정열이 고귀해 보이지 않는 것은, 네가 원하니깐 나도 원한다는, 혹은 너보다 잘나고 싶다는 마음이 바탕에 있기 때문이죠. 이러한 욕망은 타인의 관념에 매개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쥘리엥이 죽음을 앞두고 야심에 대해 초연해진 것도 이러한 맥락이었겠죠. 마지막의 그에게 남은건 사랑과 정열만 남은 순수한 평온이었어요. 마틸드의 사랑이 비극적이었던 까닭은, 그녀의 사랑은 아직 질투심에 머물러 있는 단계였기 때문 아닌가해요. 쥘리엥이 페르바크 부인에게 접근하자 그녀의 사랑이 자극받은 것은, 질투심 역시 타인의 욕망에 매개된 것이란 것을 보여줘요. 쥘리엥처럼 직접 지하감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을 갖지 않더라도, 간접적이나마 이러한 것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건, 적과 흑이 준 기회겠죠.

 

 소설이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선,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가 바탕이 되어야해요. 그러한 측면에서 사랑이야기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테마이기에 접근 장벽이 낮죠. 그러한 보편적인 이야기 속에 시대상이나 철학관처럼 많은 것을 담아낸다는 것은 너무나 매력적이에요. 저도 언젠간 그런 긴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요. 그때엔 우리의 이야기가 소재가 되려나요?

PS. 발터 벤야민이 말하길 '사랑에 빠진 남자는 자신이 읽은 모든 책에서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찾아보게 된다는데 진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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