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 - 심리여성학
진 시노다 볼린 지음, 조주현.조명덕 옮김 / 또하나의문화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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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은 독자들에게 묻는다. “당신 속에는 어떤 여신이 계십니까?”라고. 무슨 ‘신내림’사건에 대한 자각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다. ‘당신 속 여신 운운’은, 말하자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그럼 달은 무어냐고? 그건 제각각 독특한 ‘개별의 개인’이다.

그런데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을 읽다 보면, 자기자신의 성격과 특성을 구성하는 요인들 하나하나에다가 ‘이름을 붙이는(命名)’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를 수 있다. 그런데 그 재미에 푹 빠져 거기 멈춰버리면 이 책은 ‘고만고만한’ 일반화의 오류와 한계를 지닌 성격유형이야기 중 한 편이 될 것이다.

실제로 몇십 억 여성인구를 단 일곱 여신들로 유형화하는 특징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여성들이, 조각조각 흩어져있는 자기자신의 경험들을 구분하고, 또 분류하여 이해하도록 이끄는 실마리가 되어준다. “난 왜 이 모양일까?”가 아니라 “아! 바로 그래서였구나!”하는 ‘자기이해’의 감동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다.

물론 볼린은 여성들에게 내재되어있는 여신들로, 희랍여신 일곱을 확정해서 거명한다. 아르테미스, 아테나, 헤스티아, 헤라, 데메테르, 페르세포네, 아프로디테. 희랍신화를 통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 누구는 독립적이고 누구는 매우 수동적이며 또 누구는 상당히 질투가 많다. 그런데 이 일곱 여신들은 한 여성 안에 들어가 살면서 그녀를 짓누르거나, 또는 여‘신’의 의지로 그녀를 좌지우지하는 존재들이 아니다.

이 여신들은 한 여성 속에 모두 다 잠재적으로 존재하는데, 그 중 어떤 여신원형은 활성화되고 어떤 여신원형은 퇴화된다는 것이 볼린의 핵심주장이다. 볼린은 책 뒷부분에 가서 독자들에게 질문한다. 여신들의 활성화와 퇴화를, 자기 아닌 딴 사람에게 결정하도록 내어줄 것인가? 아니면, 자기자신이 결정할 것인가? ‘황금사과’는, (여신들의 손이 아닌) 자기결정권을 발휘하고자 하는 ‘한 여성’이 쥐고 있다.

볼린은 책의 맨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적는다. 그녀 자신의 책이 “여러분 자신의 여행에서 결정권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었기를 바란다”고…. 즉, 이제까지 살펴본 일곱 여신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여성이 ‘내가 내 인생에서 주인공이고 결정권자다’라는 것을 확인하도록 이끄는 ‘도움말’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의 장치였고, 상징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원형상징.’ 우리는 상징 자체에 얽매이면 안되리라.

자신이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기뻐하는 여성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이 책의 서문에서 일찌감치 약간의 우려를 표명한다. 그녀는 여성들이 원형 안으로 흡수되어버릴까 봐 걱정하였다. 이를테면, 상징 자체에만 주의를 기울일까 봐.

요컨대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우리는 (손가락 아닌) 달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이 책은, 특별히 맨마지막 문장까지 정독할 것을 요구한다. 가령 ‘내 속에는 아테나 여신이 들어있는걸!’하면서 아테나 관련부분만 ‘발췌독’한다면, 볼린의 의도로부터 (아마도) 멀어지는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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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의 선물
Irvin D. Yalom 지음, 최웅용 옮김 / 시그마프레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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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위는 어둡다. 당신의 사무실에 왔는데 당신은 보이질 않는다. 사무실은 비어있고, 들어가서 둘러보니 있는 것이라곤 당신의 파나마모자뿐이다. 그 모자도 온통 거미줄로 덮여있다.”


  심리학자이자 소설가인 어빈 얄롬(Irvin D. Yalom)의 책, 『치료의 선물(The Gift of Therapy)』 서두이다. 심리학 서적인지 소설책인지 아리송할 만큼 친근한 문장이다. 환자(내담자)의 꿈 이야기로 책을 연 얄롬은 두 편의 소설을 펴낸 이야기꾼답게 자신의 심리치료 경험을 시종일관 편안한 말투로 이야기해준다. 얄롬은 실존주의 심리치료의 입장에서 ‘치료자와 내담자가 (치료라는) 여행의 동반자’라는 관점을 갖고 있다. 심리치료사는 실존적 문제를 안고 찾아오는 내담자(환자)를 치료해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내담자와 상호작용하는 동안) 자신의 실존적 문제를 치유해간다는 것이다.

  인간은 수많은 인간관계 안에서 문제를 감지한다. 그 문제들이 심각해져서 삶을 지속해가는 것이 힘겨워지면 사람들은, 심리치료사를 찾게 된다. 얄롬은, 관계 안에서 일어난 문제는 관계 안에서 풀어야 한다고 말한다. 눈도 맞추지 않고, 충분히 이야기를 듣지도 않고, 그저 겉으로 드러난 증세만을 관찰한 뒤 약을 처방하는 식은 ‘관계’가 아니다.

  얄롬은 치료자와 내담자(환자)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치료자가 내담자와 관계맺음에 머뭇거려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좋은 관계가 형성되어야 두 사람은 명실공히 ‘동반자’로서 각자의 삶을 함께(나름대로) 치유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치료자는 치료의 과정에서 내담자를 치료해준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내담자 스스로 치료한 것이기도 하다는 게 얄롬의 주장이다. 한없이 겸허한 심리치료사 얄롬의 이 책은, 앉은 자리에서 쭉 일독하고도(그만큼 쉽게 읽힌다), 두고두고 옆에 두어 곱씹어가며 읽고 싶은 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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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만의 나라
샬롯 퍼킨스 길먼 지음, 손영미 옮김 / 한국문화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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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만의 나라>는 페미니즘 유토피아 소설의 고전이다. 토마스 모어 경이 자신의 소설 <유토피아(1516)>에서 쓴 ‘유토피아’라는 말은 그리스어의 아니다(οu')와 장소(τóπos―topos)를 합성해 만든 것으로 ‘아무 데도 없는(nowhere)’이라는 의미였다. 따라서, 어쩌면 여자만 사는 나라, 그런 곳은 아직은 ‘아무 데도 없는’지도 모르겠다.


전쟁과 지진, 화산폭발로 남자들이 다 죽고, 여자들만 살아가던 한 나라에서 한 여자가 아기를 낳았다. 나라 전체를 다 뒤졌지만 (생식‘사건’에 참여한) 남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결국 여자들은, 그 아기를 신이 보낸 선물이라 결론내리고, 그 축복받은 엄마를 신전에 모셨다. 그 엄마는 이 신전에서 딸을 내리, 다섯 낳았다. 그 다섯 딸들은 스물다섯 살이 되자 또 아기를 낳았다. 각각 다섯씩 낳았다. 이렇게 하여 그 나라에 스물다섯 명의 새로운 여성들이 생겨났다. ‘처녀생식’은 여자만의 나라에서 계속 이어졌다.


여자만의 나라 백성들은 온 나라가 일사불란하게 ‘최고의 환경’을 추구한다. 고양이는 쥐나 두더지 등 해로운 동물만 잡을 뿐, 새를 잡지 않는다. 여자만의 나라에 사는 고양이는 품종개량된 고양이이며 다들 건강하다. 우유(소젖)는 송아지에게만 먹이고, 어머니의 젖은 아기들에게 먹인다. 인구가 점점 늘어나자 여자만의 나라에 사는 초식동물들은 모두 제거되었고, 숲의 나무들은 모두 과일나무로 대체되었다. 처녀생식의 결과 30년마다 인구가 다섯 배로 늘어나자 여자들은 출산제한을 위한 회의를 열었다. 그 회의의 결정사항은 이런 것이었다. “우리는 이만큼의 국민만 만.들.어.내.겠.다.” 이후 어떤 여자들은 나라를 위해 아이 낳는 걸 포기하였다.   


여자만의 나라에서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게 사람됨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데, 이들에게는 소위 ‘여자다운’ 구석이 없다. 남자들의 선호를 반영하는 ‘여자다움’ 말이다.


이러한 여자만의 나라는 이방인 남자들 세 명(밴, 테리, 제프)에 의해 관찰된다. 세 명의 남자들과 여자만의 나라 사람들의 토론은 참으로 흥미롭다. 개, 임신중절, 종교 등, 그들은 사회 모든 분야를 토론주제로 삼는다. 종교에 관하여 토론하는 중에 영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대목을 인용해보겠다.


  “그건, 영원히 끝나지 않는 거에요.”

  그러자 그녀(엘라도어)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영원히 안 끝나는 거라구요?”

  “네, 영원한 생명이죠.”

  “아, 그건 우리도 물론 알아요. 어디를 둘러봐도 삶은 계속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기독교의 영생은 죽지 않고 계속 산다는 뜻이죠.:

  “한 사람이요?”

  “그래요. 같은 사람이 죽지 않고 계속 사는 겁니다. (중략) 당신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아요?”

  “난 후손들이 영원히 대를 이어가기를 바라지만 내가 계속 살기를 바라진 않아요.”(182-184쪽)


샬롯 퍼킨스 길먼(Charotte Perkins Gilman, 1860~1935)은 미국 코네티컷 주의 하트포드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보스턴 공립도서관장을 역임한 학자요 유명한 신학자였으나 샬롯의 출생 직후 가출하였다. 샬롯은 성장하여 미술교사와 보모로 일하며 집안을 이끌었는데, 스물다섯 살에 동료화가인 월터 스텟슨과 결혼해서 딸 캐더린을 낳았다. 그러나 산후우울증을 심하게 겪으며, 자신이 전통적 의미의 혼인생활이나 육아에 걸맞지 않음을 깨닫고는 이혼했다. 그녀의, 이러한 특별한 인생역사가 <여자만의 나라>를 구상하게 하였을지도 모르겠다.   


<여자만의 나라>는, 지금 여자들로 하여금 ‘여자 남자 같이 사는 우리들의 나라’가 혹시 ‘남자만의 나라’는 아닌가 하는 의문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여자만의 나라, 여자 중심의 나라는 ‘아무 데도 없는’ 나라인 데 반해서 ‘남자만의 나라, 남자중심의 나라’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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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조금 다른 여성으로
문은희 지음 / 산해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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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여자 아니면 남자다. 아니다. 트랜스젠더를 감안하여 다시 말하자. 우리는 대체로 여자, 또는 남자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보다 더 정밀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지구상의 인구수만큼이나) 다양한 개성을 지닌 한 개인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먼저(!)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그런 우리가 가끔 (아니 수시로) 여자로, 또는 남자로 분류되고 묶인다고 덧붙이는 게 좋을 듯.

여성 또는 남성인 우리가 모두 나름의 독자성을 지닌 하나하나의 인간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여성주의적 사고의 출발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그리하여 여성주의는 곧 휴머니즘이라고…. 그래서, 여성운동은 남성 집단을 대항해 일어섰다기보다는, 인간 즉 여성을 인간취급하지 않는 '비인간'들을 향해 일어선 운동이라고.

인류를 크게 반으로 나눈 여성 집단 안에는 실로 다양한 여성들이 속해있다. 그 여성들의 삶과 경험에서 나온 여성주의는 그러므로,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할당제를 주장할 수도 있고, 지금 현재 땅바닥에 내팽개쳐져있는 여성의 인권을 보듬어안아 부추길 수도 있으며, 남성과 동등함(아니 어떤 면에서는 더 우월함)을 수시로 증명해낼 수도 있겠다. 또, 여성에게 이러이러한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는 한편, 여성이 자기존재와 자기의 일을 독자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존재란 것을 선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여러 여성주의 안에서 문은희 박사의 존재는 과연 어디쯤일까?

"우리 주변에는 스스로 피해자의 자리를 찾아들어가 거기에다 자신을 붙들어맨 채 평생을 억울해하면서 그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눈에 띕니다.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하겠지만 실제로는 놀랍게도 많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 하나하나가 모두 자기보다 힘있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좌우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에 피해자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 여자들의 경우 그 힘있는 사람이 시어머니일 수도 있고 남편일 수도 있습니다." pp. 168-9

문은희 박사는, 수많은 여성 내담자들과의 상담장면에서 여성 스스로가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겠다'고 고백하는 소리를 많이 들어왔음을 털어놓는다. 이에 문 박사는, 원하지 않았는데도 이제까지 어쩔 수 없이 피해자 노릇을 하며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면 지금이라도 그 피해자 노릇을 그만둬보자고 속삭인다. 그만둬도 괜찮다고 부추긴다. 또, 그만둘 힘과 용기가 우리 인간에겐(당연히 여성에게도!) 있다고 말한다. 문 박사는 또 제안한다. 이제 '진정한 여성해방을 이야기하자'고.

"밤늦게까지 술 마시고 춤추고 마음대로 다닐 수 있으니 옛 여인네보다 요즘 여성들이 자유롭습니까? 남성들처럼 교육받고 바깥활동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옛날보다 더 존중받고 평등한 삶입니까? 부모님이 짝 지어주신 대로 얼굴도 모르고 혼인하는 것은 끔찍하고, 남자들이 좋아하는 치장을 하고 미팅에 나가서 선택받기를 기대하며 내숭 떠는 것은 남녀평등입니까? 옛날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성을 성의 대상으로만 대하는 남성의 기준에 여성들 자신도 스스로 맞추려 한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pp. 125-6

여성이 자기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여 독자적이고도 주체적인 여성, 스스로 자기를 존중하는 여성이 된다면, 그렇게 조금 다른 여성으로 나아간다면, 세상도 조금은 달라질지 모른다. (모든 생물학적 여성이 전부 그렇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여성의 안에는 어쩌면, 아직은, 비인간화의 거센 물결을 막을 수 있는 생명의 힘이 남아있는 것 같으니….

 

* <오마이뉴스> 책동네 기사로도 게재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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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의 아름다움
필립 시먼스 지음, 김석희 옮김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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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의 아름다움>은 임박한(!) 죽음을 바라보는 필립 시먼스의 생각과 느낌을 담은 책이다. 한 마디로 '죽음의 아름다움.'

죽음이 어디가 아름다우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기름기와 물기가 다 빠져나간 시신은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아름다울 리가 없다. 어떤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도 만질 수도 없게 된 사건을 두고 '아름답다'고 표현할 만한 여유가 우리에겐 사실상 없는 것 같다.

장례 예식은 안타깝거나 혹은 서럽거나, 한없이 길거나 지루하다. 장지로 떠나가기 전 관이 놓여있는 곳으로 조문하러 온 문상객들은 서로의 먹거리를 챙겨주는 데에 온 신경을 다 써버리기 일쑤다.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말할 수 있는 느긋함이 우리에게 과연 있을까?

시먼스는 '사건사고'로서의 죽음을 얘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죽음을 얘기하지도 않는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바로 '나 자신의 죽음'을 얘기하고 있다. 나 자신의 죽음을 성찰하는 바로 그 순간 곧 나의 삶을 통찰하게 되는 그 역설적인 진리가 <소멸의 아름다움>에 스며들어있는 것이다.

시먼스는 서른다섯 살에 루게릭 병에 걸렸다. 야구선수 루게릭이 걸렸다는 불치의 병,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에서 화요일마다 제자를 만나던 모리 교수가 걸렸던 그 병, '근위축성측색경화증'이라는 병이다. 차례차례 근육의 마비가 오면서 마지막에는 온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그렇게 나무토막 같이 되어서 죽는 병.

"한 번에 찻숟가락으로 하나씩 생명력을 덜어내는" 듯한 고통, 날마다 그 "느리고 성가신 폭력"을 겪어나가는 시먼스. 꼼짝없이 죽음의 덫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는 그는 기어코(!), 자신의 불완전한 삶이 곧 축복이라는 생각을 발설하고야 만다.

불완전한 삶이 곧 축복이다…? '이 빠진 동그라미' 이야기가 떠오른다. 자기에게서 떨어져나간 조각을 찾아서 그렇게 산지사방을 헤매더니만, 애써 찾은 그 한 조각을 찾으니까 정작 그것을 내려놓고 길을 떠나는 '이 빠진 동그라미.' 불완전한 삶의 축복. 비슷한 얘기일까….

시먼스는 늘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기에 <소멸의 아름다움>을 쓰는 순간 '생기 있게' 존재하고 있었다. 생존.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은, 한국에 그의 책이 발간된 이 시점에도 그가 살아있을까 하는 것. 그리고, 지금은…?

"우리는 모두 떨어지고 있다. 지금 이순간, 우리는 모두 높은 곳에서 떨어져 깊은 곳을 향해 한창 하강하고 있는 중이다. 그 높은 곳은 이제 어렴풋한 기억으로만 남아있고, 어른거리는 수면 아래에 언뜻 보이는 심연이 어떤 곳인지는 그저 상상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신의 은총으로부터 추락하고 있다면, 은총과 '함께' 은총을 '향해서'도 추락하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자. 우리가 고통과 나약함을 향해 떨어지고 있다면, 즐거움과 강력함을 향해서도 떨어지자. 우리가 죽음을 향해 떨어지고 있다면, 삶을 향해서도 떨어지자.<소멸의 아름다움> p. 41."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너나 할 것 없이 다 죽는다. 죽지 않고 버틴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므로 죽음을 적극적으로 내 안에 받아들이자. 막상 받아들이고 나면 무섭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고, 이상스럽지도 않다. 왜냐고? 죽음을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삶이 강렬하게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의 다른 별칭인지도 모르겠다. 어째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단지, 내가 하나 알 수 있는 게 있다면, <소멸의 아름다움>이 그렇게, 죽음을 즐겁게 명상하고 느끼려는 독자에게 조용히 그러나 힘있게 다가갈 것이라는 것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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