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의 위기 - 정치에서의 거짓말.시민불복종.폭력론 한길그레이트북스 117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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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운동기간은 물론 투표도 개표도 다 끝났는데 아직도 와글와글 시끌시끌, 소란스럽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 소란스러움은 굳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현 정부 들어 특히 더 두드러진 현상인데, ‘아님 말고식으로 떠들어도, 아무도 방해받지 않는다. 국민을 운운하고 시민을 들먹이며 허구한날 반정부적 정견(?)을 발표해도, 아무도 제지당하지 않는다. 전투경찰이나 사복경찰, 백골단들은 종적을 감추었다. 물대포도, 명박산성 같은 바리케이트도 설치되지 않는다.

정부를 반대하는 자들을 색출해 잡아들여 고문하고 살해하는 비밀경찰을 갖춘 전체주의 정권이라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이 자아내는 요란함을 그냥 놔뒀을 리 만무하다. 특히 반정부 의견은 가능한 한 빠르게 진압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유신시대(박정희정권)를 기억해보라. 공공장소는 언감생심이고, 친구들끼리 모였는데도 현 정부는 독재정권이야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각자 입단속을 철저히 해야 했었다.

그러나 현 정부가 시작되고 나서 사람들의 입은 봇물 터진 듯 몹시 활발해져서, 유신시대를 포함해 이전 정권들을 상기해보면 가히 격세지감(隔世之感), 상전벽해(桑田碧海) 격이다. 품격 높은 발언을 이전보다 더 자주 더 많이 접할 수 있으니, 그건 다행스럽다. 반면 막말과 가짜뉴스도 못지않게 폭증해 피로감을 더하는 것은, 확실히 아쉽다. 하지만, 와글와글 시끌시끌 소란스러운 게 민주주의의 특징이니 견뎌내야 한다.

여성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한 술 더 떠, 이 같은 소란스러움을 평화로 개념정의한다. 아렌트는 시끌시끌 터져나오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평화의 소리로 감상하고, 평화의 현상으로 관람할 것을 제안한다. , 그런가! 우리는 지금 태평성대를 살고 있는 건가!

아렌트에 따르면, 사람들의 말소리를 죽여 고요함을 달성하는 것은 폭력이고, 명백히 평화의 반대말이다. 사람들은 폭력이 무서워 입을 다문다. 입을 다무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고요해진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가 성취된 것이다. 폭력은 고요하다. “Violence is mute.”



위와 같은 메시지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있다. 아렌트가 1969년에 펴낸 <On Violence>. 우리나라엔 1999년에 <폭력의 세기>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나왔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우리가 일상에서 대략 의 의미로 이해하며 지내는 다섯 개 단어들(force, authority, strength, power, violence)을 예시하고, 섬세하게 구별한다. 순서대로 한국어(漢字 포함)로 옮기면 각각 , 권위, 강성, 권력, 폭력이다(참고, 김선욱 교수의 번역). 이제 본격적으로, 폭력 아닌 다른 것들과 폭력이 어느 만큼 다른지 하나하나 따져보기로 한다.

먼저 힘(force)과 권위(authority)를 구별해보자. 힘과 권위는 인간관계 안에서 복종을 부른다. 힘은 복종을 압박하지만 권위는 압박 없이 복종을 일으킨다. 예컨대 교회와 대학은 힘이 아니라 권위로써 복종을 야기한다.

한편 압박함으로써 복종을 끄집어내는 힘(force)은 일상에서 폭력과 유사하게 인식된다. 압박이라는 요인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폭력이라 단정짓지 않는다. 그루밍(Grooming) 성폭력의 경우, 명백히 폭력이지만 가해자가 힘을 행사하지 않아도 그 범죄행위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때는 폭력이 말하자면 권위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는 것 같다.

다음으로 강성(strength)과 권력(power). 아렌트는, 강성이 개인에게 귀속되는 한편 권력은 집단(공동체)에 귀속된다면서, 둘의 본질적 차이점을 설명한다. 강성은 개인의 속성으로서 자산(property) 같은 것이며, 개체로서 그()를 강하게 만들어준다. 그렇지만 강성은 개인을 권력자가 되게 해주지는 않는다.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원더우먼 등은 강하나,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대통령이나 수상 같은 권력자가 되는 건 아니다.

권력자는 집단(공동체)의 지지와 지원이 약해지면 위태로움을 느낀다. 권력의 본질이 소통인 까닭이다. 권력자는 지지와 지원을 호소하고, 보호하겠다 약속하는 등 타인들과 소통한다. 반면 폭력은 모든 종류의 소통을 말소하려 한다. 나치 정권은 정권 초기보다 말기로 갈수록 폭력을 더 많이 더 악랄하게 사용했다. 권력을 잃어갈수록, 즉 소통을 포기할수록 폭력이 더 필요해졌다. 폭력을 쓸수록 소통은 더 불가능해졌다. 그리하여 폭력론의 말미, 아렌트는 엄중히 경고한다.

권력을 쥐고 있으며 그 권력이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간다고 느끼는 자들이 정부이건 지배를 받는 자들이건 간에 그들은 권력을 폭력으로 대체하려는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 우리는 (...) 모든 권력의 감소가 폭력에 대한 공개적인 초대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 알아야만 한다.


<공화국의 위기> '폭력론' 242쪽


모쪼록 우리의 현 정권이 권력을 폭력으로 대체하려는 유혹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잘 뿌리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도 그 유혹을 잘 뿌리칠 수 있기를 바란다. 어느 경우에도 타인과 소통하려는 의지를 놓지 않고, 아무리 번거롭고 성가시더라도 소통절차를 기꺼이 밟겠노라 결정하기를···.

(덧붙임) <폭력의 세기>를 읽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이 품절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야겠다. 그러나, 미국에서 폭력론은 따로 출간되었을 뿐 아니라 <공화국의 위기(Crises of the Republic)> 안에도 들어있는데, 한국어 번역서 <공화국의 위기(2016)>는 품절되지 않았다. ‘폭력론을 접할 기회가 살아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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