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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나 아렌트의 행위이론과 시민 정치
이인미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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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지은이입니다^^ 솔직히 저도 ˝해나˝가 낯섭니다. 국립국어원 외래어 규범표기를 따라, 출판사와 합의하긴 했는데..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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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의 위기 - 정치에서의 거짓말.시민불복종.폭력론 한길그레이트북스 117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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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운동기간은 물론 투표도 개표도 다 끝났는데 아직도 와글와글 시끌시끌, 소란스럽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 소란스러움은 굳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현 정부 들어 특히 더 두드러진 현상인데, ‘아님 말고식으로 떠들어도, 아무도 방해받지 않는다. 국민을 운운하고 시민을 들먹이며 허구한날 반정부적 정견(?)을 발표해도, 아무도 제지당하지 않는다. 전투경찰이나 사복경찰, 백골단들은 종적을 감추었다. 물대포도, 명박산성 같은 바리케이트도 설치되지 않는다.

정부를 반대하는 자들을 색출해 잡아들여 고문하고 살해하는 비밀경찰을 갖춘 전체주의 정권이라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이 자아내는 요란함을 그냥 놔뒀을 리 만무하다. 특히 반정부 의견은 가능한 한 빠르게 진압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유신시대(박정희정권)를 기억해보라. 공공장소는 언감생심이고, 친구들끼리 모였는데도 현 정부는 독재정권이야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각자 입단속을 철저히 해야 했었다.

그러나 현 정부가 시작되고 나서 사람들의 입은 봇물 터진 듯 몹시 활발해져서, 유신시대를 포함해 이전 정권들을 상기해보면 가히 격세지감(隔世之感), 상전벽해(桑田碧海) 격이다. 품격 높은 발언을 이전보다 더 자주 더 많이 접할 수 있으니, 그건 다행스럽다. 반면 막말과 가짜뉴스도 못지않게 폭증해 피로감을 더하는 것은, 확실히 아쉽다. 하지만, 와글와글 시끌시끌 소란스러운 게 민주주의의 특징이니 견뎌내야 한다.

여성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한 술 더 떠, 이 같은 소란스러움을 평화로 개념정의한다. 아렌트는 시끌시끌 터져나오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평화의 소리로 감상하고, 평화의 현상으로 관람할 것을 제안한다. , 그런가! 우리는 지금 태평성대를 살고 있는 건가!

아렌트에 따르면, 사람들의 말소리를 죽여 고요함을 달성하는 것은 폭력이고, 명백히 평화의 반대말이다. 사람들은 폭력이 무서워 입을 다문다. 입을 다무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고요해진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가 성취된 것이다. 폭력은 고요하다. “Violence is mute.”



위와 같은 메시지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있다. 아렌트가 1969년에 펴낸 <On Violence>. 우리나라엔 1999년에 <폭력의 세기>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나왔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우리가 일상에서 대략 의 의미로 이해하며 지내는 다섯 개 단어들(force, authority, strength, power, violence)을 예시하고, 섬세하게 구별한다. 순서대로 한국어(漢字 포함)로 옮기면 각각 , 권위, 강성, 권력, 폭력이다(참고, 김선욱 교수의 번역). 이제 본격적으로, 폭력 아닌 다른 것들과 폭력이 어느 만큼 다른지 하나하나 따져보기로 한다.

먼저 힘(force)과 권위(authority)를 구별해보자. 힘과 권위는 인간관계 안에서 복종을 부른다. 힘은 복종을 압박하지만 권위는 압박 없이 복종을 일으킨다. 예컨대 교회와 대학은 힘이 아니라 권위로써 복종을 야기한다.

한편 압박함으로써 복종을 끄집어내는 힘(force)은 일상에서 폭력과 유사하게 인식된다. 압박이라는 요인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폭력이라 단정짓지 않는다. 그루밍(Grooming) 성폭력의 경우, 명백히 폭력이지만 가해자가 힘을 행사하지 않아도 그 범죄행위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때는 폭력이 말하자면 권위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는 것 같다.

다음으로 강성(strength)과 권력(power). 아렌트는, 강성이 개인에게 귀속되는 한편 권력은 집단(공동체)에 귀속된다면서, 둘의 본질적 차이점을 설명한다. 강성은 개인의 속성으로서 자산(property) 같은 것이며, 개체로서 그()를 강하게 만들어준다. 그렇지만 강성은 개인을 권력자가 되게 해주지는 않는다.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원더우먼 등은 강하나,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대통령이나 수상 같은 권력자가 되는 건 아니다.

권력자는 집단(공동체)의 지지와 지원이 약해지면 위태로움을 느낀다. 권력의 본질이 소통인 까닭이다. 권력자는 지지와 지원을 호소하고, 보호하겠다 약속하는 등 타인들과 소통한다. 반면 폭력은 모든 종류의 소통을 말소하려 한다. 나치 정권은 정권 초기보다 말기로 갈수록 폭력을 더 많이 더 악랄하게 사용했다. 권력을 잃어갈수록, 즉 소통을 포기할수록 폭력이 더 필요해졌다. 폭력을 쓸수록 소통은 더 불가능해졌다. 그리하여 폭력론의 말미, 아렌트는 엄중히 경고한다.

권력을 쥐고 있으며 그 권력이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간다고 느끼는 자들이 정부이건 지배를 받는 자들이건 간에 그들은 권력을 폭력으로 대체하려는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 우리는 (...) 모든 권력의 감소가 폭력에 대한 공개적인 초대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 알아야만 한다.


<공화국의 위기> '폭력론' 242쪽


모쪼록 우리의 현 정권이 권력을 폭력으로 대체하려는 유혹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잘 뿌리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도 그 유혹을 잘 뿌리칠 수 있기를 바란다. 어느 경우에도 타인과 소통하려는 의지를 놓지 않고, 아무리 번거롭고 성가시더라도 소통절차를 기꺼이 밟겠노라 결정하기를···.

(덧붙임) <폭력의 세기>를 읽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이 품절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야겠다. 그러나, 미국에서 폭력론은 따로 출간되었을 뿐 아니라 <공화국의 위기(Crises of the Republic)> 안에도 들어있는데, 한국어 번역서 <공화국의 위기(2016)>는 품절되지 않았다. ‘폭력론을 접할 기회가 살아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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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밥상 - 농장에서 식탁까지, 그 길고 잔인한 여정에 대한 논쟁적 탐험
피터 싱어.짐 메이슨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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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의 살’을 먹기 전에…
                피터 싱어·짐 메이슨, 『죽음의 밥상』

                                      
초등학생 때 나는 문득 귀찮길래 해피라는 강아지의 배를 힘껏 걷어찬 적이 있었다. 저만치 나동그라진 해피가 죽을 만큼 아파하는 바람에 나는 “미안해, 해피”하며 그 앞에 무릎을 꿇기까지 했더랬다. 고등학생 때는 낮잠을 자다가 무심코 고양이 아롱이를 깔아뭉갠 적도 있었다. 압사당할 뻔했던 아롱이가 서럽게 울부짖으며 실내를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그날 나는 “아롱아, 아롱아, 모르고 그랬어”하고 몇 번이고 사과를 해야 했었다.

강아지 해피도 고양이 아롱이도 고통이나 행복을 느낄 줄 아는 생명체다. 그러면 ‘고기’로 키워지는 닭, 돼지, 소는 고통이나 행복에 대해 어떨까? 정답은 그들도 고통이나 행복을 느낄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8324번 닭은 닭고기로, 513번 돼지는 돼지고기로, 그리고 A열 96번 송아지는 쇠고기로 알려지다 보니, 고통이나 행복을 느낄 줄 아는 동물로 선뜻 인지되지가 않는다. 쫀득쫀득하거나 통통한 육질 좋은 고기, 가정에서부터 고급식당에까지 잘 공급되어야 할 식재료일 뿐이다. 그래서 광우병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광우병 쇠고기의 문제이며, 조류인플루엔자(AI) 발병은 우선 닭고기의 안정적 공급을 저해하는 사건사고로 인지된다. 누구도, 광우병에 걸린 소 한 마리, 조류인플루엔자에 걸린 닭 한 마리의 입장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 이들이 해피도 아니고 아롱이도 아닌 까닭이다. 그러나 『죽음의 밥상』을 읽어보라. 바로 그 한 마리 한 마리의 입장이 저절로 감지된다.

『죽음의 밥상』은 학자 피터 싱어와 농부 짐 메이슨이 한 팀이 되어 발로 뛰며 미국의 공장식 축산업현황을 조사해 써낸 책이다. 미국의 공장식 생산구조에서, 풀 먹는 동물인 소는 풀을 못 먹는다. 곡식(옥수수)을 주식으로 먹고 심지어 고기류와 어패류가 무차별적으로 섞여있는 레스토랑 접시쓰레기와, 닭털과 닭똥 등 닭장쓰레기까지도 처분할 겸 먹어주던 끝에 결국 미쳐가고 있다. 닭은 평생을 인구밀도 아니 조류밀도가 높은 닭장에서 스트레스 잔뜩 받으며 살다가 의식이 있는 채로 목이 잘리거나 산 채로 능지처참(몸이 여러 토막으로 찢김)되어 생을 마감한다. 또, 호기심 많은 돼지는 자기 체구에 꼭 맞게 제작된 비좁은 이 상자 저 상자를 전전하며 옴짝달싹도 한 번 햇볕 구경도 한 번 못 해보고 지내다가 도살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좁은 울타리 안에 감금되는 그들은 흙은커녕 아무 바닥에서도 걸어다니지 못하기 때문에 관절염 등 만성적 뼈질환에 시달리는 게 다반사고, 죽음에 임박해서는 물건처럼 인정사정 없이 해치워진다.

이런 사정은 물고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물에 잡혀올라오는 물고기들 중 인기없는 ‘생선’들은 상처입은 그대로 다시 내던져지며, 내장이 파열되고 몸통이 너덜너덜해져도 눈알이 기압의 변화로 튀어나와 덜렁거려도, 아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양식되는 물고기의 경우 넓은 바다 놔두고 밀집된 공간에 갇혀지내야 하기 때문에 짜증과 스트레스가 많다. 그래서 탈옥(?)을 감행하는 물고기가 많은데 호르몬제와 항생제에 찌들어 살던 이 탈옥수들은 건강하고 자유롭게 살고 있는 야생물고기에게 다가가 전염병을 옮기거나 유전자변이를 일으키게 하는 등 또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그리고 탈옥에 실패한 물고기들은 맛 좋은 살코기가 될 때까지 죽거나 병에 걸리면 안 되므로 엄청난 화학약품을 투여받으며 하루하루를 그저 연명해간다.

딴에는, 그 동물들이 어차피 고기가 될 처지이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곧 고기가 될 처지라고 해서 그런 식으로 무심히 ‘재배’되다가 때가 되어 무참히 ‘처치’되는 게 괜찮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사실, 공포나 고통으로 그들이 소리소리 비명을 질러도 도살담당자들은 소나 돼지, 닭들이 편안하게 죽도록 배려할 수가 없다. 비용 때문이다.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동물들을 기절시켜 무의식상태가 되게 한 후, 이를테면 ‘윤리적으로 동물들을 도살’하려면 추가비용이 들어가는데, 그 순간 고깃값은 뛰게 된다. 그런데 소비자들은 가격상승을 용납하기 어려워한다. 오히려 같은 무게의 고기일 때 조금이라도 싼 쪽을 선택한다. 도살담당자들이 자행하는 잔인하고 비윤리적인 도살방법을 비난할 사람들은 많지만, 그 동물들이 윤리적으로 도살될 수 있도록 비용을 지불할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요즘 전세계적으로 비용지불을 감수하겠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긴 하나 여전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니, 동물들의 비참한 일생·처참한 죽음은, 누구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를 내려는 경제원칙 하에 모든 사람들이 손에 손을 맞잡고 있는 데에서 기인된 총체적인 부도덕 같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 28)”고 명령하셨다. 그런데 비윤리적으로 키우고 잔인하게 도살해도 된다는 뜻, 거대한 그물로 물고기들을 싹싹 다 거두어 씨를 말리라는 뜻까지 ‘다스리라’에 들어있을까. 지역개발이다 대운하다 해서 동식물들이 멸종해버리고 나면 다스리고 싶어도 다스릴 수가 없을 텐데….

저자들은 미국인들로서 『죽음의 밥상』을 통해 미국소비자들에게, 자신이 무엇을 먹느냐에 대해 보다 양심적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방법들이 영국을 포함한 유럽에서보다 미국에서 훨씬 더 실천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20쪽). 도대체 어떤 방법들이길래 그럴까? 한국은 미국보다 나을까? 이런 질문들을 해보며 저자들이 제시하는 방법들을 검토해보면 좋겠다 싶어 몇 가지만 옮겨적어본다.

동물성식품을 살 때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반드시 그 식품이 나온 농장을 방문해본 경우에만 산다. 동물학대에 전적으로 동참하지 않으려면 그 어떤 ‘남의 살’도 먹지 않는 완전한 채식주의자(베건, vegan)가 된다. 제철농산물이자 로컬푸드(이 달 주제글, 20∼21쪽 참조)를 산다. 한편 때로는 가난한 나라 농장노동자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수입산을 직접 구매하는 편이 더 윤리적인 선택일 수 있음을 감안한다. 물론 가난한 나라의 농장노동자들이 식품공급을 위해 착취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필히 조사해보아야 한다. 식품소비자의 돈이 실제로 식품을 만드는 사람들의 손에 더 많이 들어가는지 알아본다. 그래야만 지속가능한 농업이 힘을 얻는다. 이밖에 더 많은 실천사항들을 알고 싶다면 『죽음의 밥상』을 직접 읽기 바란다.

     우리는 모두 식품의 소비자들이며,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식품업체들이 유발하는 공
     해와 연관이 있다. 60억 명의 인구에 미치는 영향 말고도, 식품산업은 매년 500억 이상
     의, 인간이 아닌 육지동물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그들 중 다수는
     전생애를 구속받고 있으며, 계획에 따라 태어나 공장의 부품과 같이 살다가 살육되는
     길을 가고 있다. 여기에 더해 수십억 마리의 물고기가, 그리고 다른 해양생물들이
     바다에서 떠내어져,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토막나고 있다. 화학물질과 호르몬제는
     강과 바다에 흐르고, 조류독감과 같은 병이 번진다. 농업은 거의 모든 생명에
     손을 뻗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내린 먹을거리 선택으로 빚어진
     일이다. 더 나은 선택은 가능하다. 3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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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이 1
토리 헤이든 지음 / 아름드리미디어 / 199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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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어느 날, 이웃집 아이를 유괴한 여섯 살짜리 여자아이는 세 살 난 남자아이를 숲으로 끌고 가 나무에 묶은 채로 불을 질렀다. 병원에 실려 간 남자아이는 현재 생명이 위독한 상태였고, 소녀는 수감되었다. - 11쪽

<한 아이>의 첫대목에 인용된 신문기사다. 특수교육교사 토리 헤이든(Torey L. Hayden, 이 책의 저자)은 이 신문기사를 읽었을 때 말세가 따로 없다며 역겨움을 느꼈지만 그 일이 자신과 관계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못했다고 털어놓는다(12쪽).

며칠 전, 나는 '버지니아 텍 총기난사 사건'과 '조 군'에 대한 숱한 신문기사(사건의 정황을 보도하는 기사로부터 관련분야 전문가들의 분석기사까지)들을 열심히 찾아 읽을 때 말세가 따로 없다며 역겨움을 느꼈지만 그 일이 나와 관계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못했다.

굳이 따지자면 '버지니아 텍 총기난사 사건'과 나는 실제적으로도 직접적으로도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사실상 관계가 없다. 아들이 자기엄마를 칼로 찌르고, 아버지가 친딸을 성폭행하고, 어떤 여자가 다른 여자의 미모를 시기해 그녀의 얼굴에 황산을 들이붓고, 군대의 상사가 자신의 부하를 구타하는, 요즘도 날마다 보도되는 사건기사들이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지는 않은 것처럼···.

그러나 <한 아이>를 읽으며, 나는 이 세상의 모든 불행한 사연들이 나와 어떻게든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 아이>의 헤이든처럼 쉴라를 직접 대면하게 되는 방식은 아닐지라도, 그런 불행한 사연을 지닌 이들이 저지른 사건의 피해자가 되거나 그 사건의 내막을 접하는 방식으로써라도 나는 그들과 언제든 연결되는 것이다.

분노와 두려움을 쌓아두고 살아가는 사람들

▲ <한 아이> 겉그림.
ⓒ 아름드리미디어

헤이든은 특수교육이 필요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헤이든의 반에는 악성신경질환을 앓고 있는 피터(8), 두 번째로 자살하기 위해 마신 하수구 세척제로 인해 식도가 녹아버려 목에 인공튜브를 단 타일러(8), 유아자폐증을 앓고 있는 맥스(6), 자폐인지 정신지체인지 확실히 알 수 없는 증세를 보이는 거대몸집의 프레디(7), 얻어맞으면서 성적 노리개가 되어 살아온 사라(7), 소아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수잔나 조이(6), 물과 어둠과 자동차와 진공청소기 그리고 침대 밑의 먼지를 끔찍이 무서워하는 윌리엄(9),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아 길모어(9) 등이 공부하고 있었다.

헤이든을 돕는 보조교사로는, 학교측이 배정해준 멕시코계 미국인 안톤과 무서운 엄마 밑에서 자라고 있는 여중생 휘트니가 있다. 특별하고 어수선한 이 반에 저 신문기사의 여자아이, 유괴범이자 방화살인 미수범인 6살짜리 꼬맹이 쉴라가 신입생으로 오게 된다. 주립병원에 들어갈 자리가 나서 수용되기 전까지 한시적으로 '관리요청'된 것이었다.

쉴라는 분노에 가득 차 있었고,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쉴라는 더 이상 거부당하지 않기 위해 사랑받을 만한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반대로 모두의 시선을 끌 만큼 나쁜 짓만을 골라서 저지른다. 사랑을 받지 않는 한 거절도 당하지 않을 테니까….

금붕어들의 눈알을 연필로 파내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계속해서 비명을 질러대고, 다른 어린이들을 넘어뜨리거나 때리고, 오줌을 싸고, 악취가 진동하도록 목욕을 하지 않고, 시험지를 끝도 없이 찢는다. 쉴라의 말에 의하면, 엄마는 고속도로에 자기를 버렸고 알코올중독자인 아빠는 '나쁜 아이인 자기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구타를 일삼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쉴라의 집에 한 번 다녀온 사회복지사는 쉴라의 몸에 학대받은 흔적이 하나도 없다고 알려준다. 물론 헤이든은 다르게 생각한다.

그런 흔적이 하나도 없다고? 그럼 그 아이가 왜 우리 반에 들어왔는가 말이다. 그게 흔적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걸 흔적이라고 해야 하는가. - 103쪽

'그런 흔적'이란 건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다. 사실 우리 주변에도 분노나 두려움을 마음속에 쌓아두고 있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쌓아두고 싶어서 쌓아둔 게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어린이시기를 그나마 생존해올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생존전략이라는 게 눈에 보일 리 없다.

사건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콜럼바인 고등학교의 에릭과 딜런, 버지니아 공과대학 조승희, 과잉 '얼차려'에 목매다는 몇몇 군인이나 체육대학의 일부 선배들, 신체폭력을 포함한 기자교육에 열을 올리는 어떤 경력기자들, 그리고 우리들이 매일 읽게 되는 인터넷 댓글 중 언어폭력을 행사하는 어떤 글쓴이들, 어쩌면 분노나 두려움을 마음속에 쌓으며 살아온(내지는 살아가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해본다.

가장 큰 문제는 분노를 표현하지 못하는 것

물론 사람인 이상 살아가면서 분노할 수 있다. 두려워할 수도 있고, 화낼 수도 있다. 아니, 때때로 분노하고 화낼 수밖에 없다. 너무 당연하다. 분노와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않고 전혀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귀신'이거나 '시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분노나 두려움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할 때가 문제다. 조용조용한 말로 표현될 시기를 이미 놓친 폭력적 에너지가 문제다. 마음속에 들어있는 분노나 두려움이 출구를 못 찾고 마음속에서 응어리가 되어있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한편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 분노나 두려움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무의식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 자신의 내면에 있는 정당한 분노와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며 인식하지도 못한다('이유 없이' 화가 난다고 말한다든지…).

그러면 느끼지 못하며 인식하지 못하는 것들이 어떻게 있다고 확신하는가? 나는, 부정적 감정들이 일단 사람의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의 내면에서 그냥 자동으로 소멸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입구로 들어간 것은 출구를 통해 바깥으로 나와야 하는데, 입구만 열어놓고 출구는 꼭 막아놓은 채 살아왔다면 어디선가 엉뚱한 데에서 구멍이 뚫려 그것이 출구노릇을 하게 될 것 같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해일 수도 있고, 자살일 수도 있으며, 신체폭력이나 언어폭력, 성폭력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떻든 잔혹하고 폭력적인 문제를 일으킨 이들은 가해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하다. 헤이든은 자신의 페니스가 잘 삽입되지 않는다고 쉴라의 성기에 칼을 댄 쉴라의 삼촌 제리를 생각하면서, 또 쉴라의 아버지를 관찰하면서 '가해자·피해자'의 판가름이 간단치 않음을 깊이 고민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중략) 나는 다른 사람의 인생 한 부분을 떠안고 있었다. 찻숟가락만한 그 작은 핏자국은 나에게 황금보다도 소중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인생이란 얼마나 허물어지기 쉬운 것인가, 나라는 인간은 얼마나 무력한가, 새삼 허탈감에 젖었다. 학교에 도착하니 열한 시였다. 시간이 겨우 요것밖에 안 지났다는 사실에 놀랐다. 쉴라를 무릎에 앉히고 산수문제를 풀다가 피를 발견한 것이 불과 한 시간 전의 일이었던 것이다. - 242쪽

다섯 달 전만 해도 쉴라가 가해자였고, 다른 아이는 피해자였다. 지금 채드(헤이든의 남자친구)가 제리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격분)을 틀림없이 소년의 부모도 가졌을 것이다. 사건의 흉폭성은 묵과할 수 없는 것이지만, 나는 쉴라한테서 내가 찾아낸 상흔을 제리한테서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 다 결백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악으로만 똘똘 뭉친 인간은 아니었다. 제리도 쉴라처럼 분명히 희생자일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했고 문제가 한층 꼬이는 느낌이 들었다. - 244~245쪽

쉴라만 희생자가 아니었다. 쉴라의 아버지도 누군가가 보살피지 않으면 안 될 사람이었다. 일찍이 한 소년의 아픔과 괴로움을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는 이제 어른이 되었다. - 277쪽


제리 삼촌, 아빠 등 피해자들의 폭력성 안에서 피해자이자, 동시에 다른 아이를 유괴하고 살해하려 했던 가해자로서의 쉴라는 사실상 천재소녀였다(모든 지능검사에서 최우수점수를 받음, 일반인의 지능지수를 훨씬 뛰어넘음). 헤이든은 쉴라의 천재성을 알아본다. <어린 왕자>를 좋아하는 쉴라의 표현대로 두 사람이 서로에게 '길들여지면서' 헤이든은 쉴라의 행동들을 하나하나 이해해가기 시작한다. 일례로 쉴라의 시험지를 찢는 행동이 오답을 두려워하는 데서 기인하는 행동임을 알아챈다(오답이 종이에 기록되니까).

나쁜 일과 좋은 일, 모두엔 끝이 있음을 믿으며...

그렇게 둘이 잘 지내던 차, 장애학생들이 비장애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도록 하는 교육지침이 내려졌다. 이제 특수아동들만을 모아서 따로 교육하던 헤이든의 반은 해체되어야 했다. 헤이든은 대학원에 진학하고, 난생 처음으로 사랑받은 공간이었던 '우리 반'의 해체를 슬프게 거부하던 쉴라는 마침내 헤이든의 사려 깊은 친구가 담임으로 있는 학교로 이동된다.

그렇게 하여 <한 아이>의 결말은 기분 좋은 해피엔딩을 이루는 것 같다. 그런 다음, 7년 뒤, 헤이든은 쉴라를 찾아간다. 그 내용은 <한 아이2>에 실려 있다고 한다. 나는 아직 <한 아이2>를 읽지는 못했는데 꼭 읽어볼 생각이다. 그런데 책 소개를 보니, 해피엔딩의 속편치고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것 같다. 좋은 일엔 끝이 없길 바랐는데….

쉴라가 고개를 들었다.
"왜 좋은 일에는 항상 끝이 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모든 일이 다 그래."
"나쁜 일은 안 그렇잖아요. 나쁜 일은 사라지지 않아요."
"사라져. 네가 거기에 매달리지 않으면 사라져." - 291쪽


나쁜 일은 늘 사라지지 않고, 좋은 일은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것 같은 현실, 그게 진짜 우리의 현실일지라도 나는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는 헤이든 선생의 말을 믿어야겠다. 왜냐고? 믿고 싶으니까! 그리고 믿을 만하니까! 그리고, 그런 믿음이 있어야 '한 아이'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기니까….

 

(오마이뉴스에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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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기적이다 - 현대의 미신에 대한 반박
웬델 베리 지음, 박경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삶은 기적이다. "Life is a miracle." 삶 중에서 기이한 일, 특별한 일, 초자연적인 일이 아니고 '그냥 삶'이 기적이다. 먹고 자고 씻고, 출근하거나 등교하거나 집안일하거나 공부하거나 일터에서 일하거나 놀거나 하는 것, 그런 일상이 바로 기적이다. 그럴 만도 하다. 자동차는 쌩쌩 달리지, 범죄자들은 수두룩하지….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이 풍진 세상, 별 탈 없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 아니면 달리 무엇이 기적이랴.


그런데, 그런 것 모두를 기적이라고 부르자니, (솔직히 말해) 기적이 좀 시시해지는 느낌도 없지 않다. '까'놓고 말해, 일상사를 기적이라고 부르면 '기적'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신비스러움이 어쩐지 반감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어째서 그럴까?


우리는 일상의 삶을 '다 안다'고 생각하고, 또 일상사를 신비롭다고 여기지 않는다. 먹고 마시고 울고 웃고 다투고…, 이런 일들이 신비롭다? 어떻든지 간에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게 사실이다.


헌데, 지금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한 번 깊이 생각해보자. '과연 나는 일상의 삶에 대해 다 알고 있는가?' 웬델 베리는 우리가 삶에 대해 '안다'고 착각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기적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그리하여 그의 책 <삶은 기적이다>는 '알지 못함(1장의 제목)'으로 시작한다.


삶을 경험한다는 것은 뭔가를 "알아내거나"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고통 받는 것이며, 동시에 있는 그대로 삶을 기뻐하는 것이다. 고통 받으면서, 또 있는 그대로 기뻐하면서 우리는 삶을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18쪽


베리의 책 <삶은 기적이다>는 에드워드 윌슨의 책 <통섭>이 바탕하고 있는 환원주의적 세계관에 대항한다. <통섭>을 다 읽어보지 못한 내가 이해하기로 환원주의적 세계관은, 모든 것을 기계로 보고 이해가능·설명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일컫는다고 할 수 있다. 베리는 <통섭>의 저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물론 나는 윌슨의 과학적 지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아마도 그의 지식은 인간이 알아낸 지식으로서 위대하고 경탄할 만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그가 보여주는 태도이다. - 42쪽




우리는 삶을 알려고 하고 그 알아낸 지식으로 기대하고 예측하며 유형화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해서 삶을 더 쉽게 살고자 하고 덜 힘들게 살고자 한다. 그런데 삶을 대상화하여 알아내도 우리의 투덜거림은 변함이 없다.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든 거야!"


우리는 신비 안에서, 기적에 의해 살아있다. 에르빈 샤르가프는 "삶은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71쪽


삶을 기적으로 보면 우리는 죽음도 기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죽음은 단지 건강함의 종착역이자 불건강함의 표지가 아닌 것이다. 암환자가 건강하지 않아서(암세포 때문에) 죽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녀)가 죽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베리는, 죽음을 건강의 일부분으로만이 아니라 '신비'로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212쪽)고 역설한다. 베리의 말처럼, 죽음에 대한 과학적 영웅주의의 표현으로 의료산업이 발달했겠지만,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삶은 기적이다. 그리고 죽음도 기적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맛보는 삶과 죽음 안에 있는 우리는 기적 안에 있다. 그런데 이 말, 가만히 묵상해보니, 참 신비롭다. 기적은 인간이 아닌 신의 작용이므로 '우리가 신 안에서 살고 있다'는 고백을 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 월간<새가정>, 오마이뉴스, 에큐메니안 등에도 같은 글이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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