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스터디 - 미국대학 교양교육 핵심과정과 한국에서의 인문학 공부안내
마크 C. 헨리 지음, 강유원 외 편역 / 라티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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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듣보잡 이론들과 학자들이 많아서인지, 인문학 공부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내가 전혀 모르는 또 다른 분야는 편협되지 않게 어떻게 접목시켜야 할지 인문학도로서 늘 고민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인문학의 본령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든다. 얇지만 인문학 공부의 正道와 기본에 충실한 안내서라고나 할까. 무엇보다 오랫동안 인문학 커리큘럼을 고민해 온 미국대학들의 대학 과정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를 토대로 했고, 이에 더하여 한국 편역자들의 제한된 노고에 믿음이 간다. 물론 페미니즘 등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그렇지만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래된 고전들을 이런 좁은 렌즈로 들여다 보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담겨 있지만, 이 책은 고전이라 이름 부를 만한 것은 무엇인지, 인문학이란 것이 본래 인류에게 어떤 의미이고 그 목적은 무엇인지에 대해 핵심적으로 짚어주는 부분이 많았다.

원저자의 말대로 "시간의 편협함"에 시달려 최근 동향에만 치중해서 공부하다 보면 최근 이론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조차 제대로 갖기 어려울 것이다. 최근 이론이라 하더라도 그 뿌리는 최소한 19세기 이전 사상들에 근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에서 제시하는 길이 유일하거나 만만한 길은 아니다. 그러나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으로서, 지금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와 저서들을 지적 균형 감각을 가지고 바라보기 위해서라도,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 인문학의 굵은 줄기부터 잡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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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연대기 세트 (반양장) - 전3권 비잔티움 연대기
존 J. 노리치 지음, 남경태 옮김 / 바다출판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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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비잔티움 연대기
존 줄리어스 노리치(지음), 남경태(옮김), <<비잔티움 연대기>> 1-3, 바다출판사, 2007.

1.
19세기 아일랜드의 역사가였던 W.E.H.래키는 <<유럽도덕의 역사>>라는 책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를 “성직자, 환관, 여인들의 음모와 독살, 반역, 배신과 친족살해 등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는 단조로운 이야기들의 연속”이라고 평했다. 래키의 이러한 평가는 어느 정도는 진실이다. 실제로 비잔티움 제국은 최고권력을 둘러싼 막후정치로 너무나도 유명해 오늘날의 영어에서 ‘비잔틴적인Byzantine’이란 낱말은 고도의 지능적인 막후공작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될 정도이다. 더욱이 이러한 권력쟁탈전은 비잔티움 궁정내부에서의 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종종 외부세력과의 결탁을 통해서도 이뤄지곤 했던 까닭에 주변국들에게 침략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심대한 외적 위협과 내적 취약성에서 비롯된 혼란과 소요가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였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고대 로마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저술하려 했던 18세기의 에드워드 기번과 같은 역사가에게 비잔티움의 역사는 한낱 “허약함과 불행의 지루하고 단조로운 이야기”로 폄하되었던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것은 이러한 내적•외적 위협에도 불구하고 비잔티움 제국이 그토록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는 점이다. 비잔티움 제국은 무려 1123년(330-1453)동안 존속했다. 그리고 단순히 명맥을 유지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상당한 기간 동안 번영을 구가했으며, 당시 흥기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서유럽 문명을 보호했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유산을 보존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12세기의 투델라의 벤자민은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을 여행하고는 “막대한 재화가 여러 섬들로부터 들어오며, 그와 같은 부유함은 이 세상의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간단히 말해서 비잔티움 제국은 세계 역사상 가장 지속적이었고 영향력 있었던 제국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래키와 기번의 비잔티움 묘사는 틀린 것은 아니었으나 지극히 편협한 것이었다. 그들은 비잔티움 제국의 어느 한 단면만을 의도적으로 부각시켰고 그것을 준거로 삼아 “비잔티움 제국을 고대 그리스와 로마가 간직했던 모든 미덕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그것은 후대인들의 평가일 뿐이다. 비잔티움의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 자처했으며 당대인들 역시 스스로를 로마인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서로마 제국의 멸망이 로마 제국의 멸망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서방과 달리 동방제국은 건재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처음에 제국의 발전은 더뎠다. 그러나 제국은 점차 탄력을 받으며, 특유의 동방적인 개성을 체득하기 시작한다. 라틴적 요소는 그리스적 요소로, 지성의 세계는 종교의 세계로 변모하지만 고전적 전통은 보존된다. 비잔티움 제국은 고대세계를 계승했다기보다는 연장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고대세계 자체는 사라졌다.”

2.
로마는 하루아침에 건설된 것도 아니었지만 하루아침에 붕괴한 것도 아니었다. 로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죽음(180년) 이후 서서히 위기가 고조되다가 235년에 일어난 내란을 기점으로 완연한 몰락의 경로를 걷는다. 이 혼란은 284년에 용맹스런 군인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245-316)가 황위에 오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약 50년 동안 계속된 혼란의 내적 요인은 세 가지로 추려볼 수 있다. 첫째, 정치적인 요인으로서 명시적인 황위계승법이 없었던 탓에 황제의 자리를 두고 내란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 기간 동안에 무려 26명의 군인황제들이 등장했으며 그 중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폭력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둘째, 경제적인 요인으로서 정복활동의 종식으로 인해 노예공급이 중단됨으로써 제국의 물질생산을 책임지고 있던 노예제가 쇠퇴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로마경제는 극심한 인력난에 빠졌으며 농업생산량은 현저하게 감소하여 경제적 위기를 초래했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핵심적인 위기는 로마사회의 시민공동체의 붕괴였다. “피라미드는 굉장하지만 단 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사람의 것을 만든다”라는 말에서도 짐직할 수 있듯이 공공의 이익을 중시하던 시민공동체의 이상은 로마 말기에 이르러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것이 되어 있었다. 제국의 판도가 확대됨으로써 지역간의 차이는 심각한 사회문제로서 대두되었지만 이를 조정해줄 사회제도는 마련되지 않았고, 점점 늘어가는 사회계층간의 빈부격차는 통일된 공공정신을 형성하는데 장애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바깥에서는 강대해진 이민족들이 제국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요컨대 3세기의 로마는 총체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었던 것이다.

비잔티움 제국의 성립은 로마가 직면한 위기에 대한 철저한 대응이었다. 확실히 로마의 위기는 단기간의 처방으로 극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위기는 근본적이었으며 로마를 둘러싼 주변환경도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총체적인 위기에는 총체적인 대응이 필요했다. 이는 ‘신이 보낸 자’ 콘스탄티누스 대제(274-337)에 의해 실행되었다. 그의 목적은 간단했다. 그는 직접 작성하여 제국전역에 배부한 기도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온 세상과 모든 인류의 전체적인 이익을 위해 제가 바라는 것은 백성들이 평화롭고 조화로운 삶을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콘스탄티누스의 방침은 크게 보아 세 가지였다. 첫째는 동방적 전제군주제(dominatus)의 확립이었고, 둘째는 비잔티움으로의 천도였으며, 셋째는 다신교를 기본으로 하는 종교전통을 폐기하고 일신교인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채택한 것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제국의 중심, 즉 문명세계의 중심이 완전히 동방으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는 이제 오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비잔티움 제국이 성립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대응은 성공적이었다. 실상 이후 1123년 동안 비잔티움 제국을 존속시킨 힘은 그로부터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동방적 전제군주제의 확립과 그와 연동되었던 관료제의 성장은, 유능한 황제의 등장 시에는 보다 강력한 황제 아래 통일된 제국운영을 도왔고, 권력투쟁으로 인한 정국혼란 시에도 제국을 유지시키는 데 공헌했다. 이러한 효과적인 관료기구의 운영은 비잔티움 통치체계의 핵심이었는데, 이는 속인교육을 장려함으로써 고급인력을 꾸준히 보급받을 수 있었던 데서 가능했다. 또한 비잔티움으로의 천도는 제국의 경제기반을 튼실하게 만들었다. 로마제국 시절에도 정치적 중심은 로마였을지언정 경제적 중심은 늘 동부 지중해 세계 즉 레반트 지역에 있었다. 특히 서유럽과 오리엔트의 중간에 자리잡은 비잔티움 제국의 지리적 위치는 중계무역에 탁월한 입지였다. 비잔티움 제국은 서유럽과 오리엔트 사이의 중계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거둬들였으며, 이는 제국의 거대한 관료기구를 지탱하는 물질적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비잔티움 제국을 비잔티움 제국답게 특징짓는 것은 종교였다. 종교없는 비잔티움 제국은 생각할 수 없다. 비잔티움 인들은 종교적 교리문제를 둘러싼 논쟁에 활발히 참여하곤 했다. 비잔티움 인들의 종교에 대한 집착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니사의 그레고리우스(335-394)가 남긴 글에서 잘 드러난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에게 변화를 요구한다면 그는 태어나지 않은 자와 태어난 자에 관한 철학 한 토막을 말해 줄 것이다. 빵 한 덩이의 값이 얼마냐고 묻는다면 그는 ‘성부가 더 위대하고 성자가 더 열등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또 목욕 준비가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성자는 무에서 생겨났다는 대답을 들을 것이다.” 이와 같은 종교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양날의 칼이었다. 즉 종교적 갈등이 팽배한 시기에는 그 분열로 말미암아 국가에 위해를 가할 수 있었던 반면에, 종교적으로 화합된 시기에는 오히려 강한 확신과 사명감을 부여함으로써 제국을 하나로 결집시켰던 것이다.

3.
한 국가의 통치체제의 견실함과 건강함을 판단하는 잣대로서 전쟁만한 것도 없을 것이다. 전쟁이야말로 한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계기이며, 그러니만큼 전쟁수행자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도의 능력을 모든 차원에서 결집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잣대가 비잔티움 제국만큼 적절하게 맞아떨어지는 경우도 없는 것 같다. 사실 비잔티움 제국은 그 성립시기부터 외부세력의 견제와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서쪽과 북쪽으로는 게르만족과 훈족을 비롯한 여러 강대한 이민족들의 침략을 막아내야 했으며, 동쪽과 남쪽으로는 전통적으로 로마의 적대국이었던 페르시아와 이제 막 흥기를 맞고 있던 사라센 세력의 연속적인 침입에 대항해야 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외부세력의 침공과 그에 대한 항거는 성립초기부터 1071년의 만지케르트 전투에 이르기까지 비잔티움 제국을 특징지었다. 그런 까닭에 비잔티움 제국의 전환점이라 부를 수 있는 사건들도 대부분 전쟁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크게 보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하나는 7세기 초부터 개시되어 결국은 비잔티움 제국의 승리로 귀결된 717년의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이며, 다른 하나는 비잔티움 제국 군대의 전멸로 끝이 난 1071년의 만지케르트 전투이다. 이 두 사건은 비잔티움 통치체제의 강점과 취약점을 요약해서 보여준다. 이 책의 저자인 노리치의 편제에 따른다면 전자는 비잔티움 제국의 ‘번영과 절정’을 가져왔고 후자는 ‘쇠퇴와 멸망’을 초래한 것이다.

먼저 콘스탄티노플 방어전에 이르기까지의 전사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주지하듯이 비잔티움 제국은 성립초기부터 소아시아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페르시아와의 힘겨운 싸움에 들어가야 했다. 이 싸움은 비록 힘겨운 것이었지만 헤라클리우스(575-641)라는 걸출한 황제의 지도력에 힘입어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이 페르시아와의 전쟁으로 기력이 쇠진한 틈을 타 신흥종교인 이슬람 교의 기치 아래 결집했던 사라센 인들이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장악했고 677년부터는 마침내 콘스탄티노플까지 정복하려 했던 것이다. 이 시도가 실패하자 사라센은 717년에는 수륙양면으로 대규모의 공세를 취한다. 717년의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은 비잔티움 최대의 위기상황 속에서 벌어졌다. 비잔티움 궁정내부의 권력투쟁으로 인해 20년 동안 황제가 무려 6번이나 무력에 의해 교체되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이 창건된 이래 그토록 불안한 무정부 상태가 오래 지속된 시기는 없었다.” 그러나 이 위기는 결단력 있는 황제 레오 3세(675-741)에 의해 극복되었다. 그는 ‘그리스 화약’이라는 병기와 강력한 정예군의 도움을 받아 사라센 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사라센의 유럽진출은 좌절되었으며 기독교 세계는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이후 벌어진 이른바 ‘성상 파괴 논쟁’은 제국전체를 소모적인 종교논쟁으로 몰아넣었으며, 이는 결국 동서교회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암살과 쿠데타로 이어지는 지속적인 정국불안으로 인해 관료기구는 과대하게 팽창했다. 게다가 관료기구는 명목상으로는 황제의 지휘를 따랐으나 실질적으로는 몇몇 유력가문에게 사집단화 되었다. 한편 군대의 권한과 재정은 줄어들었으며 민병대는 용병대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정책들은 세 가지 점에서 문제점을 가졌다. “첫째, 그런 조치들은 결국 쿠데타의 가능성을 더욱 높일 따름이었다. 둘째, 용병은 급료를 주는 고용주에게 충성을 바치며, 언제든 더 많은 돈을 주는 주인을 찾아가게 마련이므로 그 본성상 믿을 수 없는 집단이었다. 셋째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당시는 지난 400년 동안 비잔티움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적이 문턱에까지 와 있는 위기상황이었다.” 그 적은 바로 셀주크 투르크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입장에서 셀주크 투르크와의 전쟁은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전쟁이었다. “양측이 정치적 견해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지역은 서로에게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지니는 아르메니아 뿐이었다. 따라서… 아르메니아의 영토를 서로 납득할 수 있는 선에서 분할할 수만 있다면, 양측은 굳이 싸울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비잔티움 내부의 정치적 사정은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궁정 내부의 정치적 입지가 취약했던 황제의 입장에서 전쟁의 회피는 제위는 물론 목숨까지도 위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양자는 소아시아의 만지케르트 요새 부근의 평원에서 맞붙는다. 만지케르트 전투는 변변찮은 전투 한 번 없이 비잔티움 군 내부의 배반으로 인해 셀주크 투르크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다. 황제는 사로잡혔으며 군대는 전멸되었다. “만지케르트 전투는 그때까지 750년에 달하는 제국의 역사상 최대의 재앙이었다… 하지만 진짜 비극은 전투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전투 이후에 적절한 외교적 조치가 뒤따랐다면 장기적인 피해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잔티움의 권력자들은 당시 절실하게 필요한 조치들을 취하지 않았고 당장의 권력암투에 총력을 쏟은 나머지 주어진 모든 기회를 날려 버렸다. 그 결과로써 “제국은 단 한 번의 전투에서 패배한 대가로 주요한 곡창 지대와 절반 이상의 인구를 잃은 것이었다. 더구나 그것도 셀주크 투르크의 탁월한 전투력 때문에 빼앗긴 게 아니라 비효율적이고 근시안적인 제국의 정책이 스스로 초래한 결과였다.”

만지케르트 전투의 패배와 그 결과로 비잔티움 제국은 다시는 애초의 활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이후의 비잔티움의 역사는 그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에 불과했다. 제국의 판도는 콘스탄티노플과 그 주변으로 졸아들었고, 투르크의 외침은 점점 더 거세어 졌다. 제국을 보존하기 위해 불러들인 십자군은 도리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심지어는 비잔티움은 서유럽에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멸망의 길로 들어선 제국을 되돌릴 순 없었다. 마침내 1453년 셀주크 투르크의 뒤를 이은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제국은 멸망한다.

4.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역사학에서 정치사는 따분하기 그지없는 분야로 치부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사가 갖고 있는 재미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더구나 권력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날 것 그대로 살아 꿈틀거리는 궁정내부의 암투만큼 인간의 관심을 끄는 주제는 많지 않을 것이다. 노리치의 이 책은 바로 이 점에 기여한다.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했으나 죽기 직전에야 세례를 받은 콘스탄티누스의 이야기나, 매춘부에서 황후의 자리에 까지 오른 테오도라의 출세기나, 반역자들에게 코를 베이는 형벌을 받고 유배되었으나 다시 제위를 되찾음으로써 신체를 손상한 사람은 황제가 될 수 없다는 전통을 깬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이야기나, 자신을 폐위시킨 자식의 두 눈을 뽑아내 죽인 비정한 어머니 이레네의 이야기나 모두 흥미롭기 그지없다. 다루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총 2200 페이지에 이르는 결코 만만치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경쾌하고 재미있게 읽히는 건 이야기를 풀어 내는 노리치의 막힘없는 서술에서 기인하는 바도 크다. 덧붙이자면, 옮긴이의 상세하고 친절한 역주를 읽어나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정치사 이외의 비잔티움 제국의 사회, 경제, 문화에 대한 서술이 부족한 것이 아쉽기는 하나 이는 다른 책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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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리즈먼: 이단의 역사
그레이엄 핸콕.로버트 보발 지음, 오성환 옮김 / 까치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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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파는 가톨릭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존중했다. 카타리파 교도들이 스스로 "선한 기독교도"라고 부른 까닭이 여기 있었다. 그러나 예수가 그들의 종교에서 차지한 위치는 극적으로 달랐다. 가톨릭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 사는 육신이 된 말씀"이었다. 카타리파 교도들은 이를 철저히 거부했고 예수를 순수한 성령으로 숭배했다. "선한 신"의 방사(放射)인 투사체 혹은 환영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우리 가운데 살기" 위해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물질적 현신을 철저히 부인했다. 그들은 또한 예수가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처형되었다는 가톨릭의 가르침도 강력하게 거부했다. 그들은 예수가 물리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십자가에 처형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중요한 영적 상징인 십자가도 카타리파는 존경은 고사하고 의미도 부인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로마 교회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오도하여 숭배하도록 만든 우상이자 혐오스러운 고문 도구였다.-pp.44-45쪽

기독교도들이 믿는 전능하고 지선한 유일신과 달리 카타리파 교도들은 선한 신과 악한 신의 두 가지 신성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이원론"을 믿었다는 사실이 문제의 근원이었다. 두 신은 각자의 영역에서만 권능을 발휘했으며, 상대방의 영역에서는 거의 무력했다. 선한 신의 영역은 전적으로 정신적이고 비물질적이며 빛으로 충만해 있으며, 선한 신의 창조물인 인간의 영혼이 유래한 곳이었다. 악한 신의 영역은 지구 자체이며, 그 위의 물질세계와 모든 육체적 생활이었다. 즉 암흑과 재앙으로 가득하고 고통과 벌이 존재하는 지옥 같은 곳이었다. … 다시 말해 교황은 선한 신의 종이 아니라 악마의 대리자로서 지상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목적은 우리의 영혼을 사후(死後)에 정신적이고 빛으로 충만한 천국의 영역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속여 인간의 몸으로 거듭 태어나게 하여 물질세계의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오직 카타리파 신앙의 최고 경지에 입문할 때 얻는 특별한 그노시스(즉 영적인 지식)에서 절정을 이루는 일생 동안의 자기 부정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p.45쪽

교회는 몇 세기 동안 지옥의 공포를 이용해 중세 유럽 인들의 사고를 마비시키고 마음을 닫도록 만들었다. 사실 카타리파의 이원론으로 개종함에 따라 그러한 해방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카타리파의 이원론은 지구 자체보다 더 낮은 지옥은 거론하지 않았다. 지구는 "인간이 빠지는 의식의 가장 낮은 차원"이었다. 즉 지구는 우리의 영혼이 이미 심한 고생을 겪었고, 과거의 수많은 인간 환생의 함정에 빠져든 시련과 고통의 장소였다. 다시 말해 지옥은 가톨릭 교회가 정의한 적때문에 보내지는 미지의 행선지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와 있지만 언젠가 탈출할 운명인 이미 알려진 장소였다.

이러한 교리에 의해서 카타리파는 신도들의 죽음에 대한 모든 공포를 일거에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암흑시대 내내 서유럽 문명의 발전을 막았던 미신과 귀신학의 굴레도 깨뜨렸다. 습관적인 종교행위의 모든 측면으로부터 거미줄을 제거하려고 시도했던 카타리파 신도들은 교회의 찬송이 "순진한 사람들을 속인다"고 말하면서, 연옥의 영혼들을 위해서 바치는 가톨릭의 헌금은 비합리적인 돈의 낭비라고 비웃었다. -pp.58-59쪽

그들(카타리파)에게 야훼는 숭배의 대상과는 거리가 멀며, 물질세계를 만든 것으로 알려진 악한 신의 수많은 호칭 가운데 하나인 악마-사탄-루시퍼와 동의어로 간주된다. 그들은 널리 알려진 독선적이고 보복적이고 폭력적이고 항상 잔인한 행위를 통해서 그 신을 판단했다. 이러한 행위들을 설명한 구약성서는 가차없이 사악한 야훼의 속성을 찬양한 노래였다. 카타리파와 보고밀파 신도들은 이 성서를 구제불능의 사악한 경전으로 생각했다. 구약은 이 사악한 신에게 아부하기 위해서 집필되었으므로 기성 기독교들이 채택한 것처럼 구약을 성서로 채택한 것은 악마에 대한 완전한 굴복이었다. 그러므로 카타리파와 보고밀파는 구약성서를 배척했고 구약성서의 권위에 입각한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신약성서에 의존했고 극단적인 일부 분파의 경우에는 신약 가운데서도 몇몇 특정한 부분에만 의존했다.-p.83쪽

마니교와 보고밀파 및 카타리파가 인간의 곤경에 관해서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그 근저에는 공통적인 불변의 주제가 보인다. 신자와 완덕자, 모든 청취자와 선택자가 볼 때, 그 모든 주제의 중심에는 정신적인 오염을 극소화하고 영혼을 향상시키고 강화하고 정화하고 궁극적으로 (커다란 투쟁 후) 해방시키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자 하는 욕구가 자리잡고 있다. 이것은 세 가지 종교에서 하나의 체제를 받아들여 따르며, 하나의 틀 안에서 노력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체제와 틀은 3세기의 마니교 초창기부터 1,000년도 더 지난 후대의 유럽에서 중세 이원론 종교가 마지막으로 파괴될 때가지 놀라울 정도로 동일했다.-p.115쪽

물질적 생활이 사악하다는 확신에도 불구하고 카타리파와 보고밀파, 마니교는 모두 생명을 극도로 존중했고, 같은 생물인 인간과 동물에게 모든 형태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주는 것에 반대했다. 세 종파는 모두 환생을 믿었다. 모두 우상을 금지했고, 오직 기도와 찬송을 통해서 예배를 드렸다. 카타리파와 보고밀파가 구약성서를 두려움에 찬 눈으로 보았고, 구약성서의 하느님인 야훼를 악마로 간주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p.117쪽

팔레스타인과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이후 지중해 연안과 메소포타미아, 이란 전역을 지배했던 보편적 헬레니즘 문화를 공유하고 있었다. 상당 기간 지속된 이 시대는 사회 활동과 지적 활동이 이례적으로 활발했고, 창의적 정신과 합리주의 정신 및 강력한 정신 운동이 꽃핀 시기였다. 이 시기에 고대 이집트의 신관들과 이란 마기의 이원론자들, 비교(秘敎), 미트라교의 신비주의 추종자들, 그리스의 플라톤 학파 철학자들, 유대 신비주의자들, 불교 포교자들 및 주변 각지의 여러 가지 영향이 하나의 거대한 헬레니즘의 용광로 속에 합쳐졌다. "사물의 진정한 성격에 관한 지식을 의미하는 영지의 종교, 즉 그노시스주의가 탄생한 것"은 그처럼 "혼란스러웠으나 감격적인 사상적 합류가 이루어진" 그 시대의 어느 시점이었다고 역사학자 조슬린 고트윈은 지적한다.-p.128쪽

그노시스주의와 카타리파 및 보고밀파는 모두 영혼을 악마의 물질세계에 갇힌 포로로 간주했다. 영혼은 물질세계 속으로 더욱 깊이 끌려들어가 더욱 단단히 갇힐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다. 세 집단은 모두 자신들의 신앙체계에 입문하여 그들이 가르치는 영지 습득방법을 통해서, 달리는 벗어날 수 없는 영원한 감금 상태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p.128쪽

그노시스파와 후대의 보고밀파 및 카타리파는 상호 공통점이 많을 뿐만 아니라, 기성 기독교와 두드러진 특징을 한 가지 공유하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 "구원"의 신앙이다. 즉 그들은 모두 하나의 신앙 체계를 제시하고 그 체계를 따를 경우 믿는 사람의 영혼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약속한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서조차도 카타리파, 보고밀파, 그노시스파가 선의 한쪽에 함께 서 있는 반면, 기성 기독교의 수호자들은 그 선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의 교리를 "오로지 신앙만을 통한 구원"으로 압축하는 것이 최선일 수 있다는 데 그 이유가 있다. 즉 맹신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이단 종파들은 모두 지식을 통한 구원을 제시했다. 즉 계시된 지식, 영감으로 얻은 지식, 구원의 지식을 입문자가 직접 체험한다는 것이다.-p.132쪽

"이단의 존재는 교회 자체의 존재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고 조에 올당부르는 주장한다. 교회와 이단은 "병존한다." 교의에는 항상 이단이 수반된다. 처음부터 기독교회의 역사는 다양한 이단들에 맞서는 전투의 긴 목록이었다.-p.139쪽

1208년 3월 10일 인노켄티우스는 십자군 파견을 선언했다. 이것은 "십자군(Crusade)"이라는 용어가 동료 기독교도들에게 대항하는 전쟁에 최초로 사용된 경우였다. 오래 전 로마의 기독교 황제들처럼 인노켄티우스는 분명히 이단 근절에 가장 높은 우선권을 두었는데, 이는 성지 탈환을 위한 전쟁보다 우선순위가 높았다. -p.155쪽

십자군 참가자는 종군 기간 동안 모든 채무상환의 의무가 자동적으로 연기되고 채권자로부터 재산을 되찾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최하위 천민들도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p.156쪽

"지상에는 좋은 물체가 없고 천국에는 나쁜 물체가 없으며, 천국의 물체는 얽매인 것이 없고 지상의 물체는 자유로운 것이 없기 때문에" 지상의 "복제"는 지금이나 미래에, 모범으로 삼은 천국의 원형보다 항상 열등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것보다는 열등한 결과를 낳을지라도 천국의 완벽함을 지상에서 복제하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이 헤르메스 문서의 분명한 논리이다.-p.239쪽

프랜시스 베이컨을 "미신에 얽매인 과거에서 출현한 현대적인 과학자 및 관찰자 겸 실험자로 간주하는 것은 더 이상 합당하지 않다." … "베이컨은 헤르메스적인 전통에서 출현했다. 그는 자연 마법사들을 통해서 그에게 전달된 르네상스 시대의 마기 철학 및 카발라에서 출현했다 … 베이컨의 과학은 부분적으로 여전히 비교(秘敎)의 과학이다."-p.352쪽

이원주의 종교의 공통적인 중심 개념은 방사(放射)이다. 가능한 가장 단순할 말로 표현한다면, 방사는 현신한 신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인 창조적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 신은 영적이며 순수하고 불가침이다. 이러한 신의 현신은 독립적인 존재를 추구한다. 기원후 처음 4세기 동안 그노시스주의는 이러한 방사 현상들을 이언(eon)이라고 불렀다. 여러 가지 이언은 자기 지식의 등급에 따라 서열이 정해졌으며, 종종 "침묵", "지성", "진리", "지혜" 등 추상적인 특성이 부여되었다.

신 및 이언들은 함께 플레로마(Pleroma)를 이루었다. 플레로마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충만함" 혹은 완전한 집단이다. 세계 창조로 이어지는 과정은, 일반적으로 여러 이언들 가운데 하나의 호기심 혹은 욕망에 의해서 초래되는 플레로마 내에서 타락한 결과였다. 일부 그노시스주의의 구도 속에서는 구약성서의 하느님인 야훼가 타락하여 "방사의 방사" 지위로 전락한 이언으로 묘사되었다. 다른 경우의 야훼는 그보다 훨씬 못한 존재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야훼는 물질세계를 창조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총명하지만 자신이 온 곳이 어디이며 사물의 구도 속에서 자신의 작은 역할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존재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카타리파는 예수를 기독교가 생각하듯이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신의 방사로 본다.-p.4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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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리즈먼: 이단의 역사
그레이엄 핸콕.로버트 보발 지음, 오성환 옮김 / 까치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탤리즈먼: 이단의 역사
그레이엄 핸콕/로버트 보발(지음), 오성환(옮김), <<탤리즈먼: 이단의 역사>>, 까치, 2006.

 

저자들이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크게 보아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르네상스와 과학적 합리주의 탄생, 그리고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을 비롯한 서양근대사에 있어서의 역사적 사건들이 프리메이슨의 거대한 마스터플랜에 의거하여 기획되고 실행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프리메이슨의 사상적 뿌리가, 고대 헬레니즘 시대에 크게 유행했던 그노시스파에서 출발하여, 중세의 주류 기독교 진영이었던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의 교리에 반기를 들고 경건한 신앙생활을 견지했던 카타리파와 보고밀파, 그리고 십자군 전쟁에서 크게 활약했으나 교황에 의해 이단으로 판정되어 해체되었던 템플기사단 등 일련의 기독교 이단의 계보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을 입증하기 위한 저자들의 방법은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는 다소 생소한 것인데, 그것은 ‘의미’가 담긴 물체 혹은 기호라고 할 수 있는 탤리즈먼Telisman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감정, 행동, 신념 등에 놀랄만한 영향력을 가진 물체나 영험이 뚜렷한 물체이다. 그것은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의 남자들과 여자들의 상상력과 감정에 불을 붙일 수 있는 상징이나 부호이다. 그것은 부적이나 반지, 깃발, 조상, 기념건축물 혹은 도시 전체일 수도 있다.” 저자들에 의하면 프리메이슨을 비롯한 기독교 이단들의 특징은 자신들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의 나라인 천국의 완벽함을 지상에 구현하고자 하는 것인데, 그러한 계획을 실행에 옮긴 것이 프랑스와 미국에서 일어난 일련의 혁명들이며, 그 혁명의 주체들이 건립한 파리와 워싱턴DC와 같은 도시에서 우리는 프리메이슨들이 서로의 연결표식으로써 남겨놓은 탤리즈먼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견 굉장히 흥미로워 보이는 저자들의 주장은, 그러나 구체적인 근거와 정황에 토대를 둔 실증적인 연구라기 보다는 대개의 경우 일말의 ‘가능성의 유혹’에 이끌린 추측과 가설에 의존하고 있는 픽션이나 팩션faction에 가깝다. 이는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저자들이 자백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다음의 인용문을 보자. - 강조는 내가 한 것이다. -  

 

“프랜시스 베이컨의 <<뉴 아틀란티스>>는 물론 선언서에 제시된 장미십자회의 구상에서 영감을 얻었거나 모범으로 삼았다는 것을 실증해 주지는 않을지라도 그 가능성을 시사한다.”

 

“루퍼트와 카를-루이스의 불운한 아버지인 팔츠의 프리드리히 5세가 독일의 장미십자회 운동에 간접적으로 연루되었고 또한 보이지 않는 단체 창설회원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다수의 장미십자회 관련 인맥을 기억할 때 렌이 장미십자회의 여러가지 이념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고려해 보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것이다.”

 

저자들의 이러한 “가능성을 고려해 보고 싶은 유혹”의 경향은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빈번해지고 그에 따라 서술방식 역시 굉장히 과감해지고 있는데, 이를테면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해리 트루먼이 이스라엘의 건국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까닭은 그들이 프리메이슨의 단원이었기 때문이며, 급기야 미국의 이라크 침공도 프리메이슨의 배후조종에 의한 것이라는 상당히 황당한 결론을 내놓는데 까지 이른다. 이쯤되면 거의 한편의 공상과학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부제에 쓰여있는 대로 “이단의 역사”로써 읽는 것은,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김진명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만큼이나 굉장히 위험천만한 짓일 것이다.

 

정리하자면, 프리메이슨을 비롯한 기독교 이단들과 연관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 책을 권할 수 있겠다. 그러나 보다 체계적이고 실증적인 기독교 이단의 역사에 관한 지식을 얻고자 한다면 다른 책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서평단 모집에 뽑혀 공짜책을 받아 읽고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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