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인생을 ‘행복한 것’으로 일컬을 수 있으리만큼 인생이 우리 뜻대로 되어가건 말건 간에, 어쨌든 인생은 그 자체로서 이미 좋은 것 아닌가? 요하네스 프리데만은 이렇게 느꼈으며 인생을 사랑했다. 인생이 우리들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을 단념한 그가 자신에게 허여된 기쁨을 얼마나 열성을 다하여 곰곰이 즐길 중 아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교외의 녹지대에서 바깥의 봄을 즐기는 산보라든지 어떤 꽃 한 송이의 향내, 또는 어떤 새의 지저귐- 이런 일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감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교양이 향락 능력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 즉, 교양이란 언제나 향락 능력일 뿐이라는 사실-그는 이 사실도 역시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교양을 쌓았다. 그는 음악을 사랑했으며, 그 도시에서 개최되는 연주회에는 거의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자신도, 연주할 때에[ 아주 이상야릇한 자세가 눈에 띄어서 탈이긴 했지만, 점차로 바이올린을 곧잘 연주하게 되었으며, 자신이 켜내는 데에 성공한 아름답고 부드러운 음조 하나하나에 기쁨을 느꼈다. 또한 그는 많은 독서를 통하여 점차 문학적 취미를 길렀으며, 문학적 취미라면 그 도시에서 그와 겨룰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국내외의 최근 간행물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고, 한 편의 시가 지니고 있는 운율적 매력을 음미할 줄 알았으며, 잘 씌여진 한 편의 세련된 소설이 지니고 있는 은밀한 분위기에 심취할 줄도 알았으며---아! 사람들이 그를 일종의 도락가라고 말한다 해도 아주 지나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즐길 수 있는 것이며, 행복한 체험과 불행한 체험을 구별한다는 것이 거의 허무맹랑한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터득해서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감정과 기분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것이 구슬픈 것이든 명랑한 것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충족되지 않은 소망들, 즉 동경까지도 역시-잘 가꾸었다. 그는 동경을 사랑하되 동경 그 자체 때문에 사랑했으며 자기자신에게 이르기를, 충족이 되면 이미 최선의 것은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했다. 고요한 봄날 저녁의 감미로운, 괴로운 막연한 고통과 희망이 여름과 더불어 주어지는 모든 충족보다도 더 즐거운 것은 아닐까? -정말이지 그는 일종의 도락가였다. 그 키 작은 프리데만 씨는!>

 

 

<키 작은 프리데만씨>, 토마스만 단편선, 민음사세계문학전집

 

  8권, 안삼환외 옮김, 267-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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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를 위해 창조한 저 고요하고 안온한 행복이 세상에 대한 냉소와 다른 게 무엇인가? 열정을 통과함으로써 얻어진 관조가 아니라면. 열정이 빠진 삶, 깊은 감정의 교류가 없는 표피만 만지는 삶, 기쁨과 고통의 현실에 몰입하지 않고 삶의 오욕을 견뎌내지 않는 삶, 인생에 사람이 빠진 삶...그런 삶을 프리데만은 산 게 아닌가.

 

'거리두기'와 냉소를 넘어서 현실의 삶을 따뜻하게 껴안을 수 있을 때, 저 정신의 빛들이 현실의 프리즘을 통과해 다듬어질 때 프리데만은 진짜 행복을 맛볼 것이다. 한쪽으로 치우친 영혼은 오히려 부패하기 쉽다. 프리데만과 조르바는 본질상 같다.

 

통렬한 자아비판! 그리고 내가 여기저기서 만나는 프리데만들에게 보내는 조언. '딜레탕트' 바로 도락가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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