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징조들 그리폰 북스 2
테리 프래쳇.닐 게이먼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어렸을 때 세상의 종말과 휴거는 나에게 말도 못할 공포감을 안겨 주었다. 그때는 신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또 나를 하나님이 버리실 리 없다고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종말이 두려울 것이 없어야 했겠지만... 나 외에 믿지 않는 자들(오 주여!)을 뜨거운 불 속에 남겨두고 나만 천국으로 올라가야 한다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무섭고 슬펐겠는가. 사실은 어쩌면 나도 하늘로 들려 올라가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또한 있었다.

<멋진 징조들>은 종말에 관한 그 모든 엄숙하고 경건하고 두려움을 자아내는 이야기를 비웃어버린다. 그 옛날 천지가 창조된 후 아담과 이브가 에덴의 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어 쫓겨난 때, 사탄의 하수인 크롤리와 천사 아지라파엘이 대화를 나눈다. 크롤리는 혹여 선악과를 먹게 한 것이 악마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잘한 일'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 싸여 있고, 아지라파엘은 쫓겨나는 아담과 이브를 위해 화염검을 건네준 것이 잘못한 일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슬쩍 몸을 떤다. 이렇듯 크롤리와 아지라파엘 두 명의 악마와 천사는 실은 자기들이 무얼 해야 하는지 잘 모르고 위의 명령을 따르기는 하되 명령이 허용하는 한계 속에서 '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나름의 선택을 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크롤리는 어느날 아기가 담겨 있는 바구니를 상관으로부터 건네 받는다. 이 아기가 바로 '적 그리스도'. 성장하여 마지막 전쟁 아마겟돈을 일으킬 아이이다. 그리고 영화 [오멘]에서처럼 아이는 미국의 고위 정치인의 아이가 되어야 했다. 약간의 착오로 인해 영국의 깡촌에 사는 평범한 남자의 아이가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작은 착오로 인해 세상의 종말은 모두가 상상했던 것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그리고 실은, 천사와 악마인 아지라파엘과 크롤리도 인간 세상에서 오래 살다보니 이 세상을 멸망시키고픈 생각이 아무래도 기껍지가 않다. 그래서 이 소설은 세상을 멸망시키도록 운명지워졌으나 잠깐의 착오로 인해 운명을 빗겨나가게 된 소년과, 세상을 멸망시키는 데 도움을 주도록 엄한 명령을 받았으나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악마와,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도록 애써야 하지만 실은 윗분들의 생각은 그와는 달랐으며 자신 스스로는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도록 하고 싶은 천사와, 뛰어난 예언자를 조상으로 둔 현대 마녀 하나와 마녀사냥꾼의 자손 하나와 그 외 아무 생각 없는 여러 사람들이 얽혀서 만들어내는 한 편의 코미디가 된다.

갑자기 세상의 종말은 아이의 상상력이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방향으로 진행된다. 개구장이 데니스에 나올 것 같은 아이가 생각하는 세상의 종말이라니 어떤 모양새겠는가.(물론 그렇다 해도 파급력은 엄청나서 진짜 세상이 멸망할 정도지만) 결국 적 그리스도는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는 쪽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면, 적 그리스도가, 아니 적 그리스도임을 인식하기 전의 작은 소년이 즐겁게 사는 데 방해되는 것들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없어진다면 세상이 얼마나 무미건조하겠느냐 이거다. 결국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만끽하면서 살기로 결정한 적 그리스도는 모든 재앙을 없었던 것으로 돌려버린다.

이 책은 '천사들이 영원토록 노래하는 천국보다는' 내게 익숙한 세상이 더 좋아, 라는 단순한 얘기를 농담 쓰듯 써내려간 책이다. 거기에다가 한 가지 메세지를 더 첨가한다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어떻게 결정하나. 그건 아무도 몰라 식의 이야기랄까. 천사도 천사답지 못하고 악마도 악마 답지 못한 등장인물들. 흑과 백으로 나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식의 이야기가 유머러스하게 펼쳐진다(예를 들어 크롤리와 아지라파엘은 아마겟돈에 대비하여 인간계에 스파이를 몇 심어두고 있는데 그 중 몇명은 겹친다).

농담처럼 써내려간 책이기 때문에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면 꽤 유쾌하기 짝이 없고 역자가 붙여놓은 역주는 책을 읽는 데 꽤 도움이 된다. 번역은 훌륭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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