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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와 영토
미셸 우엘벡 지음,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우엘벡의 공쿠르상 수상작, <<지도와 영토>> 이거 정말 물건이다. 내게는 로맹 가리의 아류 정도로 느껴졌던 <<투쟁 영역의 확장>>에서 4년 후에 <<소립자>>가 나오고, 그리고 이 작품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 경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시간이 지나 농익는 그런 류의 변화가 아니라 영리한 작가의 스타일 실험에 더 가깝다. 지나침 없이 잘 계산된, 균형잡힌 작품이다.
제프 쿤스 같은 현대미술계의 실존 인물들이 등장한다고 해서 흥미를 끈 작품답게, 작품을 통해서 일종의 개념미술 작품을 구현하려는 듯하다. 제프 쿤스, 데미안 허스트를 비롯해, 프랑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유명인의 이름들이 사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디테일과 함께 등장하지만, 엄밀히 말해 이 소설에서 이 이름들이 차지하는 위치란 냉정한 상품 매뉴얼의 소개나 라이프스타일의 건조한 복기 - 이 소설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 와도 닮아 있다(그리고 실제로도 얼마간은 그렇지 않은가?). 마치 뒤샹 이후에는 삼성전자의 카메라 메뉴나 미슐랭 가이드 몇 페이지에 무엇이 실렸는지를 나열하는 것이 예술이 해서는 안 될 일이라 말할 수는 없다고라도 하는 듯한, 거침없는 펜놀림이다.
슈퍼마켓의 포인트 카드와 삼성전자의 카메라, 미슐랭 사의 오퍼레이션 광경과 캐논의 프린터 같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물들, 사태들의 난입은 하루키가 작품 안에 도입했던 고유명사들과는 정반대의 기능을 한다. 하루키가 상표들을 통해서 독자를 후기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안락한 취향과 욕망의 세계로 인도했다면, 우엘벡의 상표들은 우리가 그러고 싶지 않은 순간 - 소설을 읽는 안락한 취향의 순간 - 에도 펄떡펄떡 살아 숨쉬는 상품을 우리가 그것들을 이용하고 평가하는 날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들이댐으로써 도피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작가는 다분히 장난기를 발휘해서 소설가 <우엘벡>을 등장시켜 놓았는데, 이것은 블랙유머를 위한 장치일 뿐 작가 우엘벡의 소설적 분신은 (당연하게도) 주인공인 제드 마르탱이 수행한다. 그는 마르탱에게 아버지와의 접촉을 회복하고, 아버지가 남긴 반모더니즘의 유산을 발견하고, 조부모가 남긴 시골집으로 회귀하는 길을 열어주지만, 그가 배타적인 시골 주민들과의 접촉을 피해 마트와 드넓은 사유지를 직접 연결하는 사도(私道)를 연결하여 은둔의 삶을 선택하는 것을 보면 이 길에 구원이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정말이지 진정한 비관주의자이다.)
매우 영리한 작가는 제기될 수 있는 모든 반박에 대한 답변을 작품 안에 준비해두었으므로, 독자는 완패할 수밖에 없다(자기 자신을 포함해 가장 친한 이들까지도 기꺼이 조롱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작가를 어찌...). 제드 마르탱은 끝내 데미안 허스트(죽음)와 제프 쿤스(쾌락)를 함께 등장시킨 그림을 그려내지 못한다. 그는 스위스의 사창가 한복판에 위치한 안락사 기관 '디그니타스'에서 이 기괴한 조합을 다시 본다. 하지만 그는 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영원히 불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 이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희망을 뜻하는지 절망을 뜻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가 그림을 완성하는 대신, 디그니타스의 직원에게 주먹을 날렸다는 점에서 굉장한 위안을 얻었다.
p.s. 우엘벡을 좋아한다는 고백에 붙여온 단서를 앞으로는 그냥 철회할까 생각한다. 좋다고 생각하면 좋다고 생각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