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사랑을 이야기하다 - 신화 속에서 찾은 24가지 사랑 이야기
최복현 지음 / 이른아침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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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 노스럽 프라이는 신화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의 극단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 신화 중에서도 우리는 어느 부분에서 극의 극을 보는가.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바로 그것은 사랑일 것이다. 우리는 신화 속에서 사랑을 보았을 때 비로소 인간이 가진 감정의 극단 중에 극단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희노애락오욕의 감정이 예리하게 도드라지고 연인은 그 위에서 춤을 춘다. 그리고 바로 신화에서 보여주는, 이 책에서 보여주는 것이 이것이다.

현실이 사랑이 무엇인가 물어도 대답이 없는 사회라면 신화 속에서는 그것이 거침없이 표현된다. 아름다운 외모를 좇는 사람과 마음만 맞는다면 도망치는 연인, 죽어서라도 이루고 싶은 마음 등 그들이 생각하는 사랑과 그 방식이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거기에는 윤리가 없다. 사랑한다면 누군가를 죽이고라도 차지해야하며 또한 피하기 위해서라면 죽는 것도 불사한다. 신화의 세계에는 오로지 감정이 법이다.

책의 첫 장에 있는, 아폴론에게서 영영 멀어지기를 자처하고 나무가 되어버리는 다프네는 어떠한가. 거부하는 자의 강렬한 마음, 소유하고 싶은 자의 욕망. 그 사이에서 현실에서는 찾을 수 없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파탄에 이르는 것을 찬찬히 읽노라면 이것은 신화라 하기보다는 오히려 애증이 발전한 우리네 모습을 보는 것과도 같지 않은가. 분륜, 도피, 근친상간 등, 지금 우리가 문학에서나 볼 수 있는 오만가지 상이 신화에 담겨 있다.

그런데 그 일을 겪는 당사자는 누구인가! 영원히 죽지 않고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신이 아니던가. 그러한 신이 인간적인 감정을 겪고 그 안에서 무너지고 절규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그 당사가 신이 아닌 인간의 모습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전지전능한 신마저도 파멸로 이끄는 사랑. 그것은 우리가 가진 감정의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것을 겪는 것은 축복일지도 모른다고. 한편으로 사랑 때문에 눈이 머는 사람을 보면서 그것은 저주로도 느껴진다. 정말이지 사랑 그리고 나아가 감정이라는 것은 인간을 인갑답게 만드는 것이며 우리가 삶을 사는데 있어서 그 끝에 있다고.

예기(豫記)했듯 우리가 사랑이 가진 모습은 때로는 추하게 때로는 슬프게 심지어 아름답게 그려진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는가.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거기에 투영하고 현재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욕망의 극단에 있는 그 아슬아슬함 속에서 어쩌면 불안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토록 우리 안에 깊숙이 있었던 사랑이었고 감정이었기에 더더욱 심기가 언짢아질지도 모른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가질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울분일지도 모르고 현실 도피의 수단이 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신화에서 사람의 삶을 보고 감정을 보고 자신을 보고 더 나아가 현실을 보고. 이렇게 신화 안에서의 사랑은 우리에게 주는 것이 많다. 파멸의 세레나데와 사랑의 비가가 절묘하게 크로스오버를 시도한다. 저자는 신화의 끝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것 같다. 우리가 가진 사랑이여, 그것은 누구도 거부하지 못하는 운명이라고. 심지어 신마저도 그랬듯이. 그러니 짧게 짧게 남겨놓은 저자의 감상은 우리에게 당신은 지금 당장 사랑을 하라고 외치는 것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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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나보다 잘난 너를 왜 미워하는가? 우리를 지배하는 7가지 욕망의 심리학 1
조지프 엡스타인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인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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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누군가를 항상 미워한다. 물론 그것은 나에게 나쁜 짓을 한 사람에게 향한 미움일 수도 있고 혹은 나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향한 미움일 수도 있다. 원인이 없는 미움은 어째서 나를 괴롭히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에게 내제된 ‘시기’ 때문이다. 나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았는데도, 준 것 없이 미운 사람. 시기라는 마음은 자신이 만들어낸 미움이며 심지어 자기 자신이 시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 눈치 채지 못한다.

   누구나 시기를 한다. 그것은 당연하다. 신화에서 헤라는 아름다운 아프로디테를 시기하고 아프로디테는 에로스가 사랑하는 프쉬케를 시기한다. 이렇게도 시기는 오래된 마음이다. 오래된 만큼 사람들은 그 시기가 너무나 가까이 있기에 얼마나 나쁜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위에서 말했듯 눈치 채기도 힘든 시기이기에 더더군다나 시기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다. 그 시기하는 마음을 우리는 알아채도 토로하지 못한다. 스스로가 시기하는 자신의 모습이 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기는 다른 욕망들에 비하여 더욱 은밀하고 더욱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 책에 그러한 시기에 대한 많은 예를 보여준다. 소설 속의 대사 속에서, 캐릭터의 모습에서 우리는 시기를 읽는다. 시기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치명적이다. 자신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더더욱 우리는 시기를 깊은 곳에서 키운다. ‘나는 이러한데 남들은 어째서?’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결국에는 너를 파멸하기 위해서라면 나도 기꺼이 파멸의 길을 걷겠다, 하는 것이 바로 시기인 것이다. 시기하는 마음을 가짐으로써 대상자를 따라잡기 위해서 노력하는, 발전적으로 작용하는 시기는 그 수가 매우 적다. 보통의 시기는 그가 너무도 싫고, 나의 비참함은 상대적으로 상승하며 결국에는 그를 끌어내리는 것으로 만족을 삼는데 까지 이른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은 곧 사촌이 산 땅을 잃었으면 하는 것과도 같다. 외제차를 몰고 다니던 사람이 교통사고로 외제차가 박살이 나면 왠지 모르게 꼬시다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심지어 시기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에게 향하는 분노로까지 이어진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나라에서 한창 홍역을 앓고 있는 악플이 그 예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의 병을 키우는 이러한 시기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아쉽게도 책에서는 시기와 우리가 싸워야 하는 이유는 담겨 있지만 그에 대처하는 방법은 담고 있지 않다. 아마도 그것은 시기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치료해야하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나 시기가 나쁘다는 것은 알고 있다. 스스로를 면밀하게 바라보고 그 안에서 시기를 끄집어내서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어 보인다.

   이제까지 나는 대략적으로 이 책에서 나오는 시기의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한마디의 충언(?)을 하고자 한다. 그것은 이 책에서 느꼈던 일말의 아쉬움이다. 이 책은 쉽다. 정신분석학적인 지식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저자는 시기라는 마음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으면 그것을 위해서 여러 가지 예를 들고 있다. 나는 여기에서 아쉬움을 느꼈다. 저자의 개인적인 칼럼과도 같은 느낌이기에 내가 기대했던 진지했던 시기에 대한 이야기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 예라는 것도 간혹 이치에 맞지 않는, 그러니까 과도하게 해석된 예도 있다. 유대인과 미국에 관한 시기가 그 예인데 이로써 나는 이 책이 충분히 저자의 팔 안에서만 살아 숨쉬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견으로만 시기라는 것을 판단하기는 아쉬우며 단순히 시기의 감정을 쓴 문학작품의 예만을 충족함으로써 시기가 가지고 있는 본래적인 마음은 추측되거나 한 것으로만 보인다. 물론 이 책이 본격적인 심리학 저서임을 바랐던 나에게만 아쉬운 점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책은 쉽다. 가벼운 마음으로 나를 사로잡는 ‘시기’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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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밑 악어
마리아순 란다 지음, 아르날 바예스테르 그림, 유혜경 옮김 / 책씨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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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나 그렇듯 사람에게 글로서 감동을 줄 때에는 길거나 짧거나 분량은 전혀 상관없다. 이 책만 하더라도 이 짧은 글 속에 우습고 슬프고 기괴하기 짝이 없는 감동의 종합선물세트가 있지 않은가. 


   침대 밑에 악어가 살고 있었다. 여느 날과 다를 것이 없는 날에 우연하게 기괴한 느낌이 들어서 침대 밑을 살펴보니 그곳에는 여행가방 만한 악어가 살고 있었다. 악어는 구두를 좋아했고 사내는 그래서 항상 구두를 사다 줄 수 밖에 없었다. 그 푸르고도 야성에 번뜩이는 눈을 가진 악어가 침대 밖으로는 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처음의 이렇게 기상천외하면서도 우습기 만한 사건을 보면서 나는 문뜩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 떠올랐다. 어느 날 자신이 벌레로 변한 사내와 침대 밑에서 악어를 발견한 사내. 자세히 들여다보면 둘의 이야기는 비슷하다. 무엇인가 정 붙일 곳 없고 소외된 한 인간의 모습. 물론 이 마리아순 린다의 『침대 밑 악어』는 마지막에 해피엔딩의 요소를 가지고 있어 끔찍하게 죽고 마는 그레고르 잠자와는 사뭇 다르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두 작품의 가운데에 놓인 가장 큰 화두는 인간이며 인간의 소외다. 혼자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처절함. 물론 이것을 처절하기보다는 우습게 그려낸 작가에게 감탄을 보내면서 어째서 우리에게는 이토록 인간의 소외가 중심에 놓일 수 밖에 없는 문제인지 생각해봐야 하겠다. 알레고리의 정 중앙에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항상 혼자이며 별다른 일탈 행위 없이 그래, 식상하긴 하지만 시계 초침처럼 딸까닥거리면서 사는 주인공이다.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어도 말도 못 붙이는 사람인 데다가 상사에게 시달리고 직장 동료에게 끊임없이 설교를 들어야 하고 친한 친구라고는 딸랑 한 명 밖에 없는 우리의 주인공. 그가 당장에 병에 걸려 죽어도 아무도 모를, 그런 주인공에게 악어가 나타난 것은 일상의 지속에 방해만 되는 존재로 그려진다. 의사도 찾아가 보지만―퀴클리 의사의 엄청난 진료 속도에 또 한 번 놀라면서― 해결책은 없다. 이 부분에서 가장 우스운 것은 누구도 주인공의 심정을 알아주지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심지어는 악어병에 대해서도 웃으면서 넘어간다는 것이다. 이 부조리. 어느 것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로지 혼자인 주인공의 앞에 악어는 증식을 할 뿐이다.


   중간에 나오는 악어병의 처방전에 대한 것을 보자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우습게 그려졌지만 악어병은, 실은 주인공의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홀로됨의 고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마지막 찬스가 남아 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자신을 바라 봐주고 집에 찾아와서 걱정까지 해주며, 진정하게 주인공의 마음을 들어주는 여자, 엘레나.


   어쩌면 식상하게도 이 이야기는 혼자서는 살 수 없고 필연적으로 사람을 찾을 수 밖에 없는 인간과 단순하게도 그 찾는 사람은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물론 결과로만 따지면 그렇겠지만 중요한 것은 과정이 아니겠는가. 친구를 부르거나 의사를 찾아가거나 구두를 구해주는 일 등의 일련의 사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정말 악어병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 것인 양 말하고 있다. 하지만 악어병은 정말로 심각한 병이다. 죽음에도 이를 수 있는 병이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웃으면서도 마냥 웃을 수 없다.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실은 심각하지만 심각하지 않게, 웃지 말아야 하지만 우습게, 슬퍼야 하지만 슬프지 않게, 그렇게 아이러니와 부조리, 알레고리가 모두 모여 여기, 우리 앞에 『침대 밑 악어』라는 이름의 작품으로 우리 앞에 있다. 한 번 읽은 뒤에 웃고 또 한 번 떠올려 본다. 이제 나에게도 악어가 생긴 느낌이 든다. 무시무시한 눈동자를 껌뻑이며 침대 밑에 들어앉아 자고 있는 푸른 악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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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앤 아버스 - 금지된 세계에 매혹된 사진가
퍼트리샤 보스워스 지음, 김현경 옮김 / 세미콜론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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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앤 아버스를 처음 만난 것은 어언 7년 전이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백과사전을 훑어보다가 한 흑백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쌍둥이 자매가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이었다. 다른 것은 없었다. 단지 쌍둥이 자매는 서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진을 보고 충격, 그래 쇼크를 받았다. 쌍둥이는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찍이 이런 쌍둥이 사진은 본 적이 없었다. 나란히 서 있는 쌍둥이 자매는 얼굴이 엇비슷하게 생겼고 키도 비슷했고 머리스타일도 같았으며 심지어 옷도 같았다. 아마도 되새겨 보면 내가 그때 느낀 감정은 공포였을 것이다. 도플갱어를 보는 듯한 느낌.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무구한 의심. 기교도 딱히 유별나지 않은 단순한 사진 한 장에서 나는 공포를 느꼈던 것이다.


     그 후로 나는 다이앤 아버스의 다른 사진도 찾을 수 있는 대로 찾아서 보았다. 흑백 사진들이었고 역시 충격적인 사진들이었다. 세상의 이치에서 벗어난 듯한 기묘한 세계가 내 앞에서 펼쳐졌다. 단 한 장의 사진으로. 그리고 나는 공통적으로 사진들 속에서 느껴지는 한 가지를 알았다. 그것은 불쾌함이었다. 다이앤 아버스의 사진들에서는 아름답지만 무엇인가 뒤틀린 세계가 있었고 나는 그것이 왜인지 모르게 불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진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불쾌한 동시에 매력적인 사진들이었다.


     그리고 후일 그렇게 다이앤 아버스가 내 기억의 저장고에서 순위가 밀려가고 있을 때쯤 이 책을 만났다. 검은머리에 검은 눈. 그녀는 흡사 평범한 여인 같았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장난감 같은 저 사진기에서 놀라운 것들이 터져 나왔다는 것을.


     그녀의 사진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삶은 일개 범인인 내가 온순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다. 어쩌면 내가 그녀의 사진에서 느낀 그 불쾌하면서도 매력적인 기운을 그녀의 삶에서도 느꼈다면 당연한 말일까. 기묘하고도 불쾌하고 타락했으면서도 한편으로 순수한 세계에서 자신이 살았음으로 그녀의 사진에서 자연히 그런 분위기가 풍겼던 것일까. 그녀의 삶 역시 이해 불가한 점들이 많이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유별나다는 예술가들의 삶에 비하면 이해할 만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확실히 그녀의 삶은 무엇인가 갈증으로 가득 찬 세계였고, 자신이 채우지 못한다면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 누구도 채워줄 수 없는 갈증이었다. 아마도 그 갈증은 불가해한 것들에 대한 그러니까 미지에의 의구심이었을 것이다. 다이앤 아버스의 사진 속 세계는 단지 우리 사회의 일부분에 있는 것들을 찍어 놓은 세계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녀는 사진을 찍으면서도 우리 사회에서 범용치 않은 것들을 이해하려고 했던 것 같다. 흡사 카니발에서의 수염 기른 여자와 자라지 않는 난쟁이들을 보면서 일반적으로 우리가 신기하다라고 느끼는 것들을 그녀는 세상의 한 귀퉁이라도 더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녀의 삶이 그토록 범접치 못할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일지도.


     나는 그녀를 살아생전에 만나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사진들로 하여금 나 역시 그녀의 삶 속에 그리고 이해하지 못한 기묘한 것들의 향연, 세상의 귀퉁이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조금은 불쾌하겠지만 이런 불쾌함은 내가 이때까지 용납하지 못한 하나의 고정관념이나 기준들을 없애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이상한 것들의 마법사라고 했던가. 나는 다이앤 아버스를 마법사라고 보지 않는다. 그녀는 단지 우리를 사실적으로 그려냈던, 정면으로 마주하려 했던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의 그런 용기 때문에 나는 다시금 한 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껏 숨겨진 세상의 귀퉁이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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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면 매혹적인 죽음의 역사
기류 미사오 지음, 김성기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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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진리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은 죽는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죽고야 말고 그것은 피할 수 없다. 미지의 세계. 바로 사후의 세계를 두려워하여 사람들은 그것을 미화하거나 회피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죽음의 참다운 마력은 나온다. 꼭 갈 수 밖에 없는 세계, 그러나 일절 모르는 세계.


   아름다운 죽음과 추한 죽음의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단지 죽음은 죽음일 뿐이라 여겼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보다. 특히 예술의 세계에 있어서의 죽음은 에로스와도 같고 머나먼 진실과도 같은 회귀할 수 밖에 없는 진리에 가깝게 그려져 있다. 일례를 들자면 햄릿에서의 오필리아의 죽음은 어떻고 독배를 든 햄릿은 또 어떠한가. 그러나 이 책에는 이러한 숭고해 보이기까지 하는 죽음은 등장하지 않는다. 시체 썩은 냄새가 풍겨올 것만 같은 진짜 죽음들과 그 죽음을 인도한 사람 그리고 주검들이 즐비하다. 어떤 죽음은 그래, 황홀하지만 어떤 죽음은 그 지독한 냄새에 코를 틀어줘야 할 것 같은 죽음도 있다. 그러나 어쩌랴. 사람은 다 죽고야 마는 것을.


   챕터를 나누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산 사람이 없는 비극적 결말만이 나오는 탓에 그 비장미는 책장을 넘길 수록 덜하고 아름다움은 한 줌 허무로 바뀌어 버린다. 알고보면 매혹적인 죽음이라 했으나 이 죽음들은 다 매혹적이지도 않다. 기나긴 장례의 행렬을 보면서 겉핥기식으로 죽음을 보여주기만 했다는 생각 역시 지울 수 없다. 간혹 몰랐던 어떤 죽음이 나오긴 하지만 그건 지식의 파편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저자가 의도했던 매혹적임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크다. 너무도 많은 죽음이 있어왔기에 그것을 모두 소개하려했던 저자의 욕심이 컸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한 챕터만으로 집중해서 깊이 있게 추적을 했다면 좋았을 것을 하는 후회가 든다. 죽음의 그 깊이나 역사로 보아 쉽게 한 책에 담기에는 어쩌면 무리한 시도였는지도. 그러나 짧은 일화로서의 재미는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물론 단순 사건의 나열이기 때문에 제목을 바꿔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긴 하지만 말이다. 필연적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그 죽음의 역사가 녹록치 않았음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책을 읽는 내내 챕터를 나눈 방식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로스, 욕망, 집착, 자살 등등 저자가 임의로 분류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차라리 문학과 현실 이런식으로 했다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죽음과도 같다고 소개를 해놨지만 이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연쇄살인이나 기괴한 살인 등이 들어있어, 그저 흥밋거리로 치환하기에 좋다고 넣었을 것 같은, 그러니까 굉장히 바느질 자국이 많이 남는 천 쪼가리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그저 한 번 보고 넘기기엔 좋은 책이었으며, 또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가독성이 좋은 책이었다. 게다가 재미는 확실히 있다. 위에서 말했듯 흥밋거리를 그렇게 집어넣었는데 재미가 없을 리 없다.


  죽음과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거기서 발현되는 인간의 원초적인 에로스. 이 모두를 기대했던 나에게 있어서 이 책은 약간은 핀트에 어긋난 그저 그런 책으로 분류될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어떤 정보가 잘 떠오르지 않을 때 다시금 들춰보는 책 정도는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방대한 죽음을 한 권으로 소화하려 했던 저자에 대한 마지막 예의가 될 것이다. 죽음. 죽음은 달콤하지도 않고 안온하지도 않다는 것을 이미 알아버린 나로서는 알고보면 매혹적일 것 같았으나 이 죽음의 역사는 그저 죽음의 행렬뿐이라는 데에 만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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