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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밑 악어
마리아순 란다 지음, 아르날 바예스테르 그림, 유혜경 옮김 / 책씨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언제나 그렇듯 사람에게 글로서 감동을 줄 때에는 길거나 짧거나 분량은 전혀 상관없다. 이 책만 하더라도 이 짧은 글 속에 우습고 슬프고 기괴하기 짝이 없는 감동의 종합선물세트가 있지 않은가.
침대 밑에 악어가 살고 있었다. 여느 날과 다를 것이 없는 날에 우연하게 기괴한 느낌이 들어서 침대 밑을 살펴보니 그곳에는 여행가방 만한 악어가 살고 있었다. 악어는 구두를 좋아했고 사내는 그래서 항상 구두를 사다 줄 수 밖에 없었다. 그 푸르고도 야성에 번뜩이는 눈을 가진 악어가 침대 밖으로는 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처음의 이렇게 기상천외하면서도 우습기 만한 사건을 보면서 나는 문뜩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 떠올랐다. 어느 날 자신이 벌레로 변한 사내와 침대 밑에서 악어를 발견한 사내. 자세히 들여다보면 둘의 이야기는 비슷하다. 무엇인가 정 붙일 곳 없고 소외된 한 인간의 모습. 물론 이 마리아순 린다의 『침대 밑 악어』는 마지막에 해피엔딩의 요소를 가지고 있어 끔찍하게 죽고 마는 그레고르 잠자와는 사뭇 다르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두 작품의 가운데에 놓인 가장 큰 화두는 인간이며 인간의 소외다. 혼자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처절함. 물론 이것을 처절하기보다는 우습게 그려낸 작가에게 감탄을 보내면서 어째서 우리에게는 이토록 인간의 소외가 중심에 놓일 수 밖에 없는 문제인지 생각해봐야 하겠다. 알레고리의 정 중앙에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항상 혼자이며 별다른 일탈 행위 없이 그래, 식상하긴 하지만 시계 초침처럼 딸까닥거리면서 사는 주인공이다.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어도 말도 못 붙이는 사람인 데다가 상사에게 시달리고 직장 동료에게 끊임없이 설교를 들어야 하고 친한 친구라고는 딸랑 한 명 밖에 없는 우리의 주인공. 그가 당장에 병에 걸려 죽어도 아무도 모를, 그런 주인공에게 악어가 나타난 것은 일상의 지속에 방해만 되는 존재로 그려진다. 의사도 찾아가 보지만―퀴클리 의사의 엄청난 진료 속도에 또 한 번 놀라면서― 해결책은 없다. 이 부분에서 가장 우스운 것은 누구도 주인공의 심정을 알아주지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심지어는 악어병에 대해서도 웃으면서 넘어간다는 것이다. 이 부조리. 어느 것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로지 혼자인 주인공의 앞에 악어는 증식을 할 뿐이다.
중간에 나오는 악어병의 처방전에 대한 것을 보자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우습게 그려졌지만 악어병은, 실은 주인공의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홀로됨의 고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마지막 찬스가 남아 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자신을 바라 봐주고 집에 찾아와서 걱정까지 해주며, 진정하게 주인공의 마음을 들어주는 여자, 엘레나.
어쩌면 식상하게도 이 이야기는 혼자서는 살 수 없고 필연적으로 사람을 찾을 수 밖에 없는 인간과 단순하게도 그 찾는 사람은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물론 결과로만 따지면 그렇겠지만 중요한 것은 과정이 아니겠는가. 친구를 부르거나 의사를 찾아가거나 구두를 구해주는 일 등의 일련의 사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정말 악어병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 것인 양 말하고 있다. 하지만 악어병은 정말로 심각한 병이다. 죽음에도 이를 수 있는 병이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웃으면서도 마냥 웃을 수 없다.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실은 심각하지만 심각하지 않게, 웃지 말아야 하지만 우습게, 슬퍼야 하지만 슬프지 않게, 그렇게 아이러니와 부조리, 알레고리가 모두 모여 여기, 우리 앞에 『침대 밑 악어』라는 이름의 작품으로 우리 앞에 있다. 한 번 읽은 뒤에 웃고 또 한 번 떠올려 본다. 이제 나에게도 악어가 생긴 느낌이 든다. 무시무시한 눈동자를 껌뻑이며 침대 밑에 들어앉아 자고 있는 푸른 악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