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 라이징
토머스 해리스 지음, 박슬라 옮김 / 창해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책에 대한 감상을 쓰기 전에 나는 해묵은 이야기를 하나 꺼내려 한다. 바로 성선설과 성악설에 대한 이야기.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선한가 악한가 하는 이야기는 고대부터 이어진 빛바랜 화두 중에 하나다. 설에 불과한 두 가지의 이야기 중에서 나는 그 어떤 입장에도 서지 않으려고 한다. 굳이 선택하자면 난 이 두 가지를 합한 성무선악설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물론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도 조금은 심기가 불편하다. 그렇다면 성과 악이 전무한 상태에서 태어나 환경에 의해서 선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악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는 이야기는 어떤가?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래로 발달했던 인간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는 환경, 특히 3세 이전의 생활에 의하여 규정된다고 하는데 이것 또한 심기가 불편하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내가 기억할 수도 없는, 나는 손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일들로 내 일생이 결정된다는 논리가 마음에 안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서 선한 사람은 누구이고 악한 사람은 누구인가. 사회단체에 막대한 돈을 기부하지만 집에서는 아들을 상습적으로 때리는 남자가 과한 선한 사람일까, 악한 사람일까. 사람을 죽였지만 죽인 사람들이 부모와 가족에 대한 복수였다면 과연 그는 선한 사람일까, 악한 사람일까. 다른 예를 들어볼까. 50년 동안 산에서 수도를 한 대단한 고승이 입산하기 전에는 조직폭력배였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는 스님이었던 순간 동안에는 세상에 다시 없는 선인이었으나 과거 사람을 협박하고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삼고 살았다면. 지금 이 순간 그는 과연 선한 사람인가 악한 사람인가. 예가 길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인간의 삶은 복잡하고 사랑과 증오 즉, 애증이 교차하기 때문에 도저히 선인가 악인가 하는 하나의 절대적 지표로 가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죽기 전까지 한 사람이 완벽하게 선 할 수도 완벽하게 악 할 수도 있는가? 전쟁 중에 사람을 죽이던 사람들이 승전 하느냐 패전 하느냐에 따라서 영웅이 되는가 악한이 되는가! 이렇게 입장에 따라서 선과 악은 바뀌기도 하지 않은가.

 이 무거운 주제를 서두에 둔 것은 『한니발 라이징』에 나오는 우리의 한니발 렉터의 유년에 대한 이야길 하기 위해서다. 가족을 배신하고 식솔을 죽이고 가산을 팔아넘긴, 심지어 그 보다 더 악한 짓을 일삼은 무리에게 철퇴를 가하는 것은 과연 악인가 선인가. 어렵다. 분명 살인은 죄이다. 분명 법으로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법마저 이들을 처벌할 수 없다면. 그래서 제 손으로 그 사람들을 죽여야 한다면. 영영 잊고 살 수 없는 평생의 상처가 되어버린 것을 안고 살 수는 없다. 그러니까 그는 어느 쪽에서도 마땅할 수 없는 한니발 렉터였다.

 이러한 한이발 렉터의 선택의 기로에 함께 서서 내다보자. 당신은 어떻게 해야할까, 법도 도덕도 싹깡그리 없는 무질서의 향연에서 지울 수도 없는 상처로 영영 살아가야 하는 당신은 그 사람을 죽여야 할까 말아야 할까. 한니발은 전작의 작품과 같이 예상을 뒤엎지 않고 철퇴를 가한다. 하지만 그 누가 그에게 비난을 퍼부을 수 있단 말인가. 가족의 복수를 마땅히 한 사내에게 어떻게 비난만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작가는 한니발에게 이미 내제되어 있던 <악마적 본성>이 깨어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처음에 말했듯 한니발이 악한 본성만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그가 유년기 동안 당한 일들은 단지 그의 본능을 깨우기 위한 계단에 불과했단 말인가. 달리 말하자면 그가 만약에 전쟁을 겪지 않고 살았었더라도 그의 본성이 악마적이기 때문에 살인마가 될 수 밖에 없었을까. 그가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복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에게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한니발 라이징』은 이 모든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 결국 한니발이 편하게 잠들고 악마적 본능이 드디어 깨어났다는 식으로 끝나고 만다. 하지만 나는 달리 생각한다. 그가 악마적 본성을 지니고 태어나서 살인마가 된 것이 아니라, 복수의 끝에서 그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는 완전히 홀로 자신의 기억의 궁전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자신 또한 복수의 연장선 상에 있다는 것을 안 순간 그는 인간이 아닐 수 밖에 없게 되어버린 것이라고.  그 한 마디가 무엇인가 하면, 책에서 확인 하기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6월 26일 하멜른
케이스 매퀸.애덤 매퀸 지음, 이지오 옮김, 오석균 감수 / 가치창조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는 동화의 이야기는 항상 해피 엔딩이었다. 하지만 그림 형제가 엮은 동화들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베드 엔딩이 있었으니 바로 그것은 <피리부는 사나이>. 이 동화가 새롭게 쓰여졌다는 『6월 26일, 하멜른』은 보통의 동화와는 격이 다르다. 

 때는 중세시대로 영주와 영주민이 살아가고 피리로 마법을 부리는 악사들이 모여있는 피리 길드가 있다. 그리고 주인공 요하네스는 가난한 농노로 태어나 천신만고 끝에 피리 길드 수장의 도제가 된다. 그리고 그가 자라 드디어 쥐떼를 소탕하기 위해서 바로 그 전설이 살아 숨쉬는 하멜른으로 가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처음에 나는 격이 다르다라는 말을 썼는데 이는 단순하게 기존에 무수하게 쏟아져 나왔던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제목으로 나왔던 것들과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시대를 설명하면서 잠시 말했지만 이 소설은 피리부는 사나이를 차용했을 뿐 그 이야기나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부패한 도시에 염증을 느끼고 복수를 하기 위해서 부모로부터 아이를 데려간 무정한 악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여기에 등장하는 악사는 사람들을 도우고 흡사 해결사처럼 지혜롭게 사건을 해결하고 사례로 선행을 한다. 하지만 이 악사들이 단순히 선행을 하고 정의로 대변되는 사람들로만 표현되지는 않는다. 이들은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흡사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가 마지막에 반지를 던질까 말까 고민하는 연약한 인물로 묘사되는 것처럼 정의와 자비 그리고 개인적인 욕망과 복수로 인해서 언제나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의 자비. 그리고 욕망과 복수. 이 날카로운 평행선 위에서 위태롭게 춤을 추는 주인공 요하네스는 우리가 수없이 보아왔던 강하고 나약한 면이 없는 영웅과는 다르다. 그는 번민한다. 자신의 태생과 현재의 지위 사이에서 갈등하고, 권력을 휘두르고 싶어하면서도 주저한다. 계략에 빠지고 배신 당하고 주변의 도움으로 하나씩 사건을 해결해가면서 어엿한 어른이 되어간다. 그래서 어쩌면 이 소설은 성장소설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달리해서 이야기 해볼까. 당신은 언제나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인간인가? 가령 역 앞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동전을 줄까 말까 고민을 한다고 해보자. 구걸 행위라는 불법적인 행동에 대한 철퇴가 필요하기 때문에 <정의>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외면해야 할까? 아니면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동전을 꺼내주는 <자비>가 필요한 것일까? 쉽지 않은 선택이다. 이렇듯 우리는 작은 일에도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고 어떠한 것을 선택하더라도 그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개운치 않다. 하물며 한 도시를 두고 사람의 생사를 두고 해야하는 선택이라면 오죽할까.

 이런 선택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분명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나약하고도 번민하는 요하네스라는 주인공의 선택을 보면서 그를 유혹하는 달콤한 제안들을 보면서 나 또한 고민했다.  정의와 자비란 그럴싸하고 무거운 이름 아래서 어떠한 선택이 올바른 것인지. 그 미묘한 평행선 위에서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 과연 올바른 것일까.

 정의와 자비. 권력은 쉽게 부패한다고 누가 그랬던가. 아이와 어른. 깨끗하지만 반대로 더렵혀지기 쉬운 것. 이러한 두 가지의 양립 불가능 할 것 같은 선택들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면서 이 소설을 끝까지 선택을 주저한다. 하지만 끝에 가면 우리는 정녕코 마음 속에 한 가지를 꼭 담아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율배반의 기로에서 과연 끝까지 우리가 수호해야할 것이 무엇인지 이 소설은 재미있게, 아직 어른이 아닌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는 주인공의 재치있는 이야기에서 풀어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마존은 옷을 입지 않는다 - 인류 최후의 에덴동산, 아마존 오디세이
정승희 지음.사진 / 사군자 / 200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떠올려 본다. <벨벳 골드마인>에서 커트 와일드가 알몸으로 수많은 관중 앞에서 몸부림을 치고, <샤인>에서 데이빗이 알몸으로 음악을 들으며 텀블링에서 뛰던 모습을.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한 가지 느낀다. 아, 완전히 자유로워 보인다고. 어째서 나는 넥타이를 졸라맨 셀러리맨들에게서 사회의 각박함을 느끼고 벌거벗은 사람이 풀밭에 한가롭게 누워있는 장면에서는 자유로움을 느끼는가. 단순하다. 나도 모르게 옷이란 것을 문명의 산물로, 사회의 속박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옷을 벗을 수 없다. 당장에 옷을 벗고 거리고 나간다면 경범죄로 경찰에게 연행되리라.

 그러한 가운데 오늘날에도 벌거벗을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아마존에서 살아가는 인디오, 그 중에서도 완벽하게 자신들만의 생활을 고집하며 대자연과 섞여 살아가는 싱구. 우리는 그들을 보면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우리가 느끼는 알몸이라는 것은 자유이기도 하지만 광음증을 유발시키는 성적 판타지의 대상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들은 알몸이 지극히 당연하다. 

  왜 아마존은 옷을 입지 않을까. 그것은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문명의 허례허식 또한 필요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알몸을 보고서 부끄럽다. 우리는 자연이 주었던 것들,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던 것들에게서 만족하지 못하고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동안 그들은 욕심없이 살아왔고 그것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으니까. 알몸으로 치부를 다 보이고 있어도 그들은 당당하고 우리는 가릴 것을 다 가리고 치장까지 했지만 부끄럽다.

 자연이 주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또한 그 자연을 지키면서 적당하게 취할 줄 아는 욕심없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 그들에게는 옷도 필요치 않고 재테크도 필요치 않다. 심지어 어릴 때부터 당연스레 공동생활로 익혀 나가는 교육방법 때문에 조기 교육이니 유학이니 사교육이니 걱정이 없다. 비가 오면 피하면 될 일이고 더우면 물에 들어가면 그만이다. 이 단순하고도 지극히 당연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느끼는 것은 단 하나의 자유,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욕심이 부끄럽기도 하고 동시에 그 자유에 부럽기도 한 것이다.  

 가끔 맨발로 흙을 밟아보면 우리는 안다. 그 흙의 따뜻함을, 생명을 품은 강하고도 부드러운 그 느낌을 우리는 본능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 하지만 콩크리트에 둘러싸여 인공으로 만들 조경수를 보며 살아가는 우리는 맨발로 온전히 느꼈던 그 포근함을 만끽하지 못한다. 그래서 더욱 우리는 그들이 부럽고 또한 그립다.

 먼발치에서나마 그들의 자유를 보면서 나는 그것을 지켜주고 싶다. 우리가 정신없이 나가는 동안 잊고 있었던 자연과 자유를 만끽하는 그들에게 찬사를 보내며 그렇게 그들은 그들대로 자연스레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떠올린다. 내가 마천루의 끝을 보는 밤에 별을 헤아리며 오순도순 살아갈 그들을 말이다. 그리고 행복할 것이다. 아직은 그래도 어디 한 곳에서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지닌 그들과 함께 사는 지구는 아름답다고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자기를 치켜세움
폴 오스터 지음, 샘 메서 그림,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1. 타자기의 멋

 작가들에게는 모두 저마다의 글 쓰는 방법이 있다. 어느 작가는 독일에서 공수해 온 연필로만 글을 쓴다고 하고 또 어느 작가는 잉크를 묻힌 펜으로만 글을 쓴다 했다. 이 책의 저자 폴 오스터는 올림피아 타자기로만 글을 쓴다 그러니까 이 책은 그가 글을 써낸 동지인 타자기에 대한 글인 것이다. 타자기는 그의 생애의 반절을 함께 해왔다. 오랜 시간 동안 벗으로 지내온 둘의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일단 고장나서 수리도 했고 아들이 부수기도 했고 이제는 리본조차 구하기 힘들다. 낡았지만 제대로 움직이고 또 항상 함께 해왔기에 이제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다. 오래 써왔기에 이제 그만 싫증이 날만도 한데 그는 리본을 사재기 해두었을 만큼 강한 애착을 보낸다. 왜일까? 우리는 항상 새 것이 더 좋고 가전제품이던 옷이던 무엇이던 헌 것은 버리고 새것을 사려고 하는데 왜 그는 그런 오래된 방식을 선호하고 있는 것일까? 단지 익숙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반 평생을 함께 해왔던 만큼, 그 타자기와 함께 빚어낸 이야기의 무게가 녹록치 않은 만큼 그는 그 타자기를 손댈 수 없을 것이다. 마치 아버지의 시계를 딸이 차고 또 그의 딸에게 물려주듯, 가보처럼 그렇게 전해지듯, 그 타자기 또한 오래도록 남아서 제 할 일을 해야 할 것이다.

 불현듯 나에게도 타자기가 있음이 떠오른다. 3벌식으로 된 수동 타자기다. 한글용, 영어용 이렇게 두 대를 가지고 있다. 예전에 타자기에 대한 설렘을 안고 덥썩 산 물건이었다. 중고였기 때문에 꽤나 싸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로망은 단지 로망일 뿐이었다. 2벌식 자판에 익숙했던 나는 마음이 급할 때마다 자꾸만 잘못 치는 부분이 늘었고 타자기는 컴퓨터의 워드 프로그램에서 처럼 수정을 할 수도 없고 한 번 쓰면 되돌이킬 수 없었기 때문에 금방 흥미를 잃고 말았다. 그래도 다른이에게 자랑 삼거나 운치를 위해서 간간이 토닥토닥 거리다가 결국 리본이 다 되자 창고에 처박아 두었다. 그것을 내내 잊고 있다가 이제서야 이 책을 읽고 떠오른 것이다. 나같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흥미로, 허영으로 쉽게 사고 바꾼 물건들은 이내 잊혀져 버리고 만다. 가른 대신할 것이 많은 탓이기도 하다.

 하지만 폴 오스터는 물건에 대한 애착과 동시에 물건 안에 살아 숨쉬는 추억과 이야기 거리들을 꺼냈다. 다시 한 번 곰곰히 떠올려 본다. 내가 나의 반 평생 이상을 함께한 물건이 있던가. 단언컨데 없다. 내가 처음 사고 그토록 아꼈던 많은 물건들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단지 가끔 내 기억 속에서 살짝 나와 ' 아, 그런 것도 있었었지.' 하는 감탄을 유발한 후 다시 수면 속으로 잠긴다. 아니, 그 마저도 안 되는 물건도 있다. 이런 모든 의미에 있어서 폴 오스터와 그의 타자기는 치켜세워질 동기가 충분한 것이다. 그것도 오랫동안 말이다.

 2. 그림의 멋.

 폴 오스터는 말한다. 오랫동안 함께 해오긴 했지만 타자기를 유별나게 생각한 적은 없다고. 오래 함께 해오면 물건에 인격을 부여할만도 한데 그는 그것조차 하지 않았다. 이 타자기에 또 다른 생명을 불어넣어 준 사람은 바로 화가 '샘 메서'이다. 책의 반은 온갖 타자기의 그림들로 가득하다. 어떤 그림은 고물 타자기에서 멋이 우러나오기도 하고 어떤 그림은 타자기가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으로도 보인다. 폴 오스터의 글뿐만 아니라 이런 그림들도 이 책의 볼거리 중에 하나다.

 샘 메서는 폴 오스터의 친구로 어느 날 그의 집에 방문했다가 오래된 타자기를 보고 한 번에 흠뻑 빠지고 말았다. 그는 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타자기에 대한 그림을 계속 그려댄 것이다. 그것을 보고 타자기의 주인이자 오랜 친구이며 이 타자기를 더욱 빛이 나게 만든 장본인인 폴 오스터는 곰곰히 생각을 했다. 이 타자기에도 인격이 있는 것일까. 그는 모르고 있다가 다시금 타자기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둘은 모두 범상치 않다. 오래되고 익숙한 것에 대해서 그저 넘어가지 않고 다시 생각하고 그 안에서 여러가지 의미들을 끄집어 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우리들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나의 주변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낡고 오래된 것들에 대해서. 책장을 덮고 나서 당신은 분명히 사람 손을 오래 타서 번들거리는 어떤 물건을 떠올리거나 며칠 전에 버려버린 어떤 물건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고마워 하거나 아쉬워 할 것이다. 아, 나와 함께했던 모든 물건에 대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평화는 나의 여행
임영신 지음 / 소나무 / 200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으면서 울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도 전쟁은 무섭고도 아픈 것이었다.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에 전쟁의 공포에 나는 그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왜 사람들은 서로 죽고 죽일 수 밖에 없는 것일까. 한 쪽에서는 평화를 외치고 다른 한 쪽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살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그 가운데에 부모 잃은 아이들은 울고 있다.

 가끔 명동에 가면 거리에 세워진 게시판에 북한 어린이들의 참상이 담긴 글들을 볼 수 있다. 당신은 그 글을 그냥 무심히 보고 넘기는가?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고 해서 아무렇지도 않은가? 아니면 그들을 보고 눈시울을 적시는가? 그리고 몇분 가지 못해 잊고 마는가? 전자든 후자든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외면한 것과도 같다. 하지만 글에서는 아픈 사람들을 보고 우는 것은 아무 도움이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시작이라고 했다.

 평화의 시작은 작은 마음이고, 그것을 잊지 않고 행동하는 것은 평화로 향하는 발걸음이다.  

 나는 평화주의자다. 이 책을 읽은 다음에는 이 말하기가 얼마나 쑥쓰러운지 모르겠다. 사실 나는 평화주의자인 채하는 측은한 마음을 가진 한 사람일 뿐이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그저 고개 돌리고 마는 사람인 것이다.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차이는 천양지차. 그래서 나는 평화주의자일 수 없다.

 저자 임영신은 주부이자 어머니인데도 불구하고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평화의 증인이 되었다. 헌데 나는 일신이 자유로운 학생인 뿐인데도 그런 행동을 마음 먹은 적이 없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가.

 책에서 등장하는 탄피들의 무더기 속에 제 몸뚱아리만한 탄약을 들고 있는 아이, 전쟁이 내일인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해맑게 웃고 있는 사람들. 이 모든 사람들은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다. 단지 어디에서 태어나고, 어디에서 살기 때문에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시시각각 조여오는 전쟁의 장막 아래에 놓여 있는 것이다. 좌시하고 그대로 넘기기엔 너무나도 슬프다. 그래서 저자가 발벗고 그것을 책으로 내고 우리에게 알리려고 한 것일 게다.

 나는 단지 우리가 편하게 살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고 하자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렵든 우리가 편하든 같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채 고통 당하고 있는 것 자체를 조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이 책을 통해서 나는 평화로 가는 길에 나에게 있어서 모자른 것을 알았다. 거창한 여행도 말도 필요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최대한으로 용기를 내는 것 자체가 평화임을 알았다. 그래서 이런 책을 내준 저자에게 감사하고 또한 이 책을 내가 읽을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평화가 길입니다.

 이 말을 가슴 깊이 새기면서, 올해가 가진 전에 나도 그 평화의 길에 서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측은하게 동정과 연민의 시선 만으로는 아무 것도 이루어 지지 않음을, 작은 빵과 동전 만으로 이루어 질 일이 아님을, 나는 알았으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