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타자기를 치켜세움
폴 오스터 지음, 샘 메서 그림,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1. 타자기의 멋
작가들에게는 모두 저마다의 글 쓰는 방법이 있다. 어느 작가는 독일에서 공수해 온 연필로만 글을 쓴다고 하고 또 어느 작가는 잉크를 묻힌 펜으로만 글을 쓴다 했다. 이 책의 저자 폴 오스터는 올림피아 타자기로만 글을 쓴다 그러니까 이 책은 그가 글을 써낸 동지인 타자기에 대한 글인 것이다. 타자기는 그의 생애의 반절을 함께 해왔다. 오랜 시간 동안 벗으로 지내온 둘의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일단 고장나서 수리도 했고 아들이 부수기도 했고 이제는 리본조차 구하기 힘들다. 낡았지만 제대로 움직이고 또 항상 함께 해왔기에 이제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다. 오래 써왔기에 이제 그만 싫증이 날만도 한데 그는 리본을 사재기 해두었을 만큼 강한 애착을 보낸다. 왜일까? 우리는 항상 새 것이 더 좋고 가전제품이던 옷이던 무엇이던 헌 것은 버리고 새것을 사려고 하는데 왜 그는 그런 오래된 방식을 선호하고 있는 것일까? 단지 익숙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반 평생을 함께 해왔던 만큼, 그 타자기와 함께 빚어낸 이야기의 무게가 녹록치 않은 만큼 그는 그 타자기를 손댈 수 없을 것이다. 마치 아버지의 시계를 딸이 차고 또 그의 딸에게 물려주듯, 가보처럼 그렇게 전해지듯, 그 타자기 또한 오래도록 남아서 제 할 일을 해야 할 것이다.
불현듯 나에게도 타자기가 있음이 떠오른다. 3벌식으로 된 수동 타자기다. 한글용, 영어용 이렇게 두 대를 가지고 있다. 예전에 타자기에 대한 설렘을 안고 덥썩 산 물건이었다. 중고였기 때문에 꽤나 싸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로망은 단지 로망일 뿐이었다. 2벌식 자판에 익숙했던 나는 마음이 급할 때마다 자꾸만 잘못 치는 부분이 늘었고 타자기는 컴퓨터의 워드 프로그램에서 처럼 수정을 할 수도 없고 한 번 쓰면 되돌이킬 수 없었기 때문에 금방 흥미를 잃고 말았다. 그래도 다른이에게 자랑 삼거나 운치를 위해서 간간이 토닥토닥 거리다가 결국 리본이 다 되자 창고에 처박아 두었다. 그것을 내내 잊고 있다가 이제서야 이 책을 읽고 떠오른 것이다. 나같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닐 것이다. 흥미로, 허영으로 쉽게 사고 바꾼 물건들은 이내 잊혀져 버리고 만다. 가른 대신할 것이 많은 탓이기도 하다.
하지만 폴 오스터는 물건에 대한 애착과 동시에 물건 안에 살아 숨쉬는 추억과 이야기 거리들을 꺼냈다. 다시 한 번 곰곰히 떠올려 본다. 내가 나의 반 평생 이상을 함께한 물건이 있던가. 단언컨데 없다. 내가 처음 사고 그토록 아꼈던 많은 물건들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단지 가끔 내 기억 속에서 살짝 나와 ' 아, 그런 것도 있었었지.' 하는 감탄을 유발한 후 다시 수면 속으로 잠긴다. 아니, 그 마저도 안 되는 물건도 있다. 이런 모든 의미에 있어서 폴 오스터와 그의 타자기는 치켜세워질 동기가 충분한 것이다. 그것도 오랫동안 말이다.
2. 그림의 멋.
폴 오스터는 말한다. 오랫동안 함께 해오긴 했지만 타자기를 유별나게 생각한 적은 없다고. 오래 함께 해오면 물건에 인격을 부여할만도 한데 그는 그것조차 하지 않았다. 이 타자기에 또 다른 생명을 불어넣어 준 사람은 바로 화가 '샘 메서'이다. 책의 반은 온갖 타자기의 그림들로 가득하다. 어떤 그림은 고물 타자기에서 멋이 우러나오기도 하고 어떤 그림은 타자기가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으로도 보인다. 폴 오스터의 글뿐만 아니라 이런 그림들도 이 책의 볼거리 중에 하나다.
샘 메서는 폴 오스터의 친구로 어느 날 그의 집에 방문했다가 오래된 타자기를 보고 한 번에 흠뻑 빠지고 말았다. 그는 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타자기에 대한 그림을 계속 그려댄 것이다. 그것을 보고 타자기의 주인이자 오랜 친구이며 이 타자기를 더욱 빛이 나게 만든 장본인인 폴 오스터는 곰곰히 생각을 했다. 이 타자기에도 인격이 있는 것일까. 그는 모르고 있다가 다시금 타자기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둘은 모두 범상치 않다. 오래되고 익숙한 것에 대해서 그저 넘어가지 않고 다시 생각하고 그 안에서 여러가지 의미들을 끄집어 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우리들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나의 주변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낡고 오래된 것들에 대해서. 책장을 덮고 나서 당신은 분명히 사람 손을 오래 타서 번들거리는 어떤 물건을 떠올리거나 며칠 전에 버려버린 어떤 물건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고마워 하거나 아쉬워 할 것이다. 아, 나와 함께했던 모든 물건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