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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 평전 ㅣ 역사 인물 찾기 22
안재성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성공한 쿠데타는 혁명이고, 실패한 쿠데타는
역적이다 라는 말이 있다. 이 표현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공산주의를
표방한 독립운동가는 우리나라 역사 책에는 거의 존재 않는 듯 하여 끄적거려 봤다.
이 책을 읽기 전 이현상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다. 암살이란 영화를 보기 전 약산 김원봉이란 이름에 대해서도 들은 적 없다. 두 사람은 공통점은 첫째 독립운동가라는 점이고, 둘째 북한 노동당
고위직이라는 점이고, 셋째는 무력 투쟁을 했다는 점이고, 넷째
부자 집 아들이었다는 점이고,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보통사람들은 잘 모른다는 점이다.
꽤 비중 있는 독립운동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그들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나? 남북이 대치 중이고 主敵이 북한 이므로 북한으로 월북한 사람들은 독립운동가일지라도 역사에 남길 필요성을 못
느낀 것 같다. 물론 권력을 쥔 사람 측면에서……
개인적으로 그들을 존경하거나 찬양하지는 않지만 역사는 정확하게 기록되어야 하고, 이를 토대로 미래의 꿈인 학생들은 Fact를 알아야 한다.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에 사관이 바로 서면, 대안을 찾아 우리 미래가
투명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약산 김원봉은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을 조직하고, 적의 수괴, 매국노, 일본
고등경찰 및 밀고자, 친일 부호, 총독부 관리, 불량배, 모반자 즉 칠가살을 제거하는 일을 하다가 1930년 조선민족 혁명당을 지도하면서 조선의용대라는 군사조직을 편성하여,
1942년 조선 의용대를 이끌고 광복군에 합류하여 부사령관에 취임한다. 해방 후 귀국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별정치위원회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신탁통치 문제를 놓고 좌우익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한민당과 우익계열이 독자적인 행보를 취하고, 임시정부가 파벌싸움을
하자 실망하고, 여운형을 만나 그의 달변에 매료되어 좌파 계열에 합류하며, 1946년 2월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하여 중앙위원에 선출되고
이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에 참여하여 최고 인민회의 제1기
대위원과 국가 검열상 등 고위직에 임명되었으나, 자주 독립국에 집착하자 김일성에게 밉보여 1958년 옌안파와 함께 숙청되었다.
그의 비서였던 사마로에 편지에 의하면 남한의 극우세력도 임시정부의 보수세력도 그를
견제 하였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북한 행을 택했다고 한다.‘북한은 그리 가고 싶지 않는 곳이지만 남한의
정세가 너무 나쁘고 심지어 본인을 위협하여 살 수가 없다’라고 한다.
김원봉의 인품이 어떠했는지 어떤 사상을 가졌는지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갑자기 해방을 맞고, 미국이 통치하는 과정에서 친일파가 다시 득세
하고, 우익세력들이 독립운동가였던 자신을 압박해 오자 하는 수 있이 북을 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다. 국가가 위기에 빠져 있는데 어떻게 자신의
기득권만 주장 할 수 있었을까?
이현상을 네이버에서 검색해 보니 노동운동이나 독립운동을 한 사실 기록은 거의 없고, 조선 공산당에 들어가 빨치산 투쟁을 하다가 공비 토벌 작전 때 사실되었다는 간단한 내용밖에 없었다. 저자는 이렇게 열악한 자료를 가지고 육백 페이지에 달하는 평전을 쓸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많이 알려진 인물이라고 하던데
모두에 언급했듯 이현상이란 이름은 처음 들어 보는데 그의 행적은 내가 아는 누군가와
많이 닮았다. 태백산맥의 염상진 이란 인물이다. 아마 조정래
작가는 이현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저자인 안재성보다 더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네이버에도 없기에 그의 연보를 작성해 본다.
1905년 9월 27일 충남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 에서 사백석지기 양반집 막내 아들로 출생1920년 16살 때 전북 무주군 무풍면 출신의 최문기와 결혼하고 이듬 해 금산 읍내 금산보통학교 사학년에 편입. 1923년 전북 고창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여 19살 때 큰딸 낳음.
1926년 6.10만세때 만세 부르다
구속 6개월만에 출소 되었으나 중앙고보에서 퇴학당함.
1927년 상하이로 밀항하여 한인 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 하다가, 해외 운동의 분파성과 안일함에 회의를 느껴 귀국하여 고향에서 활동하다 아들 극 낳음.
1928년 서울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여 조선 공산당 청년단체인 고려 공산청년연맹에
가입하여 동맹휴학을 지도하다 치안유지 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징역 사 년을 언도 받고 감옥에서 이재유, 김삼룡
등을 만나 노동운동에 투신함.
1932년 만기 출소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트로이카를 결성하여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담당함. 이듬해 경성트로이카 최고 지도부의 일원으로 지도하다 체포되어 다시 징역 사 년을
언도 받음. 틈틈히 부부관계가 잘 되었던지 1934년에 둘째
딸 문영 출산.
1938년 화요회(마르크스 생일이
화요일이라) 계열 지도자 박헌영을 영입해 조선공산당 재건 경성콤그룹 결성하여 인민전선부와 선전부를 맡아
국내의 항일 무장 투쟁을 준비 이듬해 체포되어 재판을 기다리던 중 셋째 딸 상진 출생(부부 금슬은 좋았던
모양이다)
1942년 단식투쟁으로 병 보석에서 풀려나 도주하여 이간술, 김봉한등과 항일 활동함.
1945년 통일재건 조선 공산당을 출범하고 조직국 정치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함.
1946년 남조선노동당 결성하여 노동부장에 선출되고 노력인민의 인사부장까지 겸임함.
1947년 조선피혁에서 좌우익 노동자들 사이에 폭력사태가 벌어지자 남로당 노동부장으로
관여하다 체포되어 일제 고문 전문가 노덕술에게 고문을 당하고 불기소 석방됨.
1948년 남로당 군사부를 신설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월북하여 강동정치학원에서 유격대 군사훈련을 받고 김일성과 면담 후 이주하와 함께 남한으로 돌아와, 계획에도 없던 여수반란 주동자들로부터 지휘권을 인수 받아 무장유격전을 시작하며, 지리산 유격대를 결성하여 사령관에 취임하여 지리산 일대에서 군경과 충돌 계속함.
1949년 6월 평양에서는 김일성과
박헌영을 주축으로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과 조선노동당이 창당되어 소련으로부터 남침 허가를 요청하고, 800여명의
유격대를 남파하여 크고 작은 전투를 일으킴.
1950년 한국 전쟁 발발하자 낙동강 전선을 넘어 대구 팔공산을 점거하고 유격
투쟁지시 받고, 수행하던 중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으로 후퇴하면서 인민군 낙오병과 인공 부역자를 호위하여
북강원도까지 왔으나, 이승엽이 남한 유격대 총 지휘권을 맡아 달라는 지시를 받고 남부군을 창성하여 총사령관으로
취임함.
1951년 소백산에서 속리산, 덕유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와 게릴라 전을 벌임.
1952년 대규모 군경토벌대에 쫓기던 유격대와 좌익 피난민 등 이천여 명은 골짜기에서
죽거나 체포되고, 50여명만 살아 남음
1953년 한국전쟁의 실패로 인한 책임을 이승엽, 박헌영 등에게 돌린 김일성은 이현상에게도 미제 간첩 이승엽의 지령을 받아 움직였고, 당 간부로서 모범을 보이지 않고 하수복과 연애 했다는 비판을 하며 평 당원으로 강등되고, 이어 9월17일 지리산
빗점골 에서 사살됨.
1968년 평양 신미동에 조성된 애국열사릉에 가묘 안장하고 제1호 열사증 추서 받음.
1990년 북한 정부로부터 조국통일상에 추서됨.
놀라운 사실은 그의 4남매를 비롯하여 42명의 자손들이 북한에 살고 있으며, 막내딸 이상진이 일등서기관으로
김대중 대통령 평양 방문 시 만수대의사당 안내를 맡았다고 한다.
김원봉과 이현상의 무장투쟁에 대해 반대하는 세력도 있는데 과연 비폭력무저항 운동의
성공 여부는 얼마나 될까? 입으로 마음속으로만 하는 독립운동이 대안이었을까? 무장 투
쟁은 목숨을 내 놓고 하는 투쟁이다.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선전 문구를 보면 너무 과격한 경우가 많다. 선동하기에는 적정할지 모르겠지만 이현상의 말처럼 ‘너무 과격한 용어가
많으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반발심을 불러올 수도 있다. P85’
좌익이든 우익이든 각자의 노선에서 활동하다가 국가를 위한 일에는 대립을 거두고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하는데 관념적 투쟁이나 반대를 위한 반대가 너무 강하다.
일제는 투쟁적인 민족주의자들보다 사회주의자들을 강도 높게 탄압했다. 이유는 민족주의자들은 단순한 독립투쟁에만 애를 썼지만, 사회주의자들은
독립투쟁은 물론이고 일본의 노동자나 농민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같은 독재자만 양산되지
않았더라면 사회주의를 표방한 독립운동가들도 박수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다.
1930년대부터 국내 항일 운동이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주도 되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38선 분단을 주장한 쪽은 미군이며, 인천항을
통해 한반도에 들어온 맥아더는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임을 선언했다. 친일을 주도했던 동아일보 김성수, 조선일보 방응모,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 소설가 이광수, 최남선, 시인
서정주, 모윤숙, 김동환,
최린, 고문기술자 노덕술 등은 미군정의 지원 하에 친일파의 복권을 주도했다.
미군정은 자신들의 행정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일제의 관료기구와 인물들을 그대로 고용
승계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일본의 첩자를 막는다는 이유로 조선인들을 대거 제거했고, 우리 백성들을 죄수들이나 보내는 땅 사할린으로 강제 위주시켰으며, 중국
또한 일본 첩자는 잡는 다는 미명하에 조선 혁명가들을 대거 참살했으며, 우리 백성들을 탄압했다.
좌익 세력의 경우 주축 세력이 농민과 노동자였기 때문에 이들을 핍박 하지는 않았다. 이 책에도 나와 있듯 빨치산들은 쌀을 가져갈 때도 나중에 갚겠다는 증명을 해주고 가져갔다고 한다. 그러나 우익은 정권의 하수인이 되다 보니 적의 친구는 적으로 간주하고 백성들을 탄압하는데 앞장 섰다. 태백산맥에서 등장하는 염상구 같이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안위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물들이 주축을 이뤘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도자들도 문제가 많았다. 박헌영의 남로당은
김구와 김규식을 우익적 반정으로 규정하였고, 홍명희의 민주독립당은 여운형의 근로인민당까지도 우익적 반동으로
보아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았다.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웃기는 사람들이다.
힘이 약한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눈물이 난다.
미국과 소련 강대국을 등에 업고,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맡았던 이승만은
고집이 박
누구를 닮았고, 자금을 전횡하는 등 도저히 민주정부 수반으로는 어울리지
않았으나
초대 대통령을 한 이승만을 위시한 우익세력과 독재를 위해 동료도 숙청하는 김일성을
위시한 좌익세력 앞에서 김원봉과 이현상을 비롯한 많은 국민들이 피해자였다. 빨치산도
토벌대도 무엇을 위해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기득권의
적이 나의
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곤란한 쪽이 힘이 없는 사람들이다. 어린
이, 여자, 돈 없고 빽 없고
힘 없는 백성들만이 피해가자 된다. 좀 있는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나도 살아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전쟁만 국민들이 고통 받는 것은 아니다. 현재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힘들어 한다.
가엾은 국민들이여! 힘을 냅시다. 견디다 보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올 것 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언제쯤 국민을 위한 지도자가 나타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