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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 ㅣ 한국문학사 작은책 시리즈 4
홍상화 지음 / 한국문학사 / 2015년 9월
평점 :
어제 마라톤을 뛰고 왔는데, 동행했던 일행이
배번을 반대로 달고 있어서 왜 거꾸러 달았냐고 했더니 인생에 정답이 있냐고 되물어 왔다. 가만 생각해
보니 보편적이라고 해서 모두 진리는 아니듯 배번을 거꾸러 달았다고 해서 동행이나 나나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보고 있는 사람들이 좀 의아해 할 뿐이다.
이 책은 좌파를 비판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를 좌경세력으로 몰고, 정부를 비판하는 지식인들을 좌경 내지는 고질적인 사대주의에서 벗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 또는 신민지 근성에 젖어 일본 앞잡이 노릇이나 하는 사람으로 폄하하고 있다. 저자의 논리에 의하면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곧 북한을 옹호하는 것이고, 이
책에 좋아요를 달지 않으면 쓴소리가 쏟아질 것 같은 느낌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독자를 설득시키기 위해 일방적인 논거를 들어 주장하는 것은 곤란하다. 저자의 표현처럼 좌경 지식인들이 북한을 옹호하고 김일성 부자를 칭송하는 일이 사실이라면 휴전 중인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큰일이고, 이적행위로 처벌을 받을 수 있다.
정신 나간 한 두 사람이 한 말과 행동에 대해 좌파 전체가 그러는 양 호들갑 떠는
것도 그리 환영할 만안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무엇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은
충분히 알겠지만, ‘빈 라덴을 따라 나도 테러리스트가 될 거야……원자
폭탄을 메고 63빌딩을 폭파할 거야……’ 라는 예는 너무
허황된 표현이 아닌가 싶다.
김남주 시인과 조정래 소설가의 실명과 작품을 들어 좌경스럽다고 비판하였다. 사회가 다변화되고, 민주주의가 고착화 되면서 내가 하고 싶은 말, 쓰고 싶은 글 마음대로 표현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저자 또한 좌파
입장에서는 위험한 수꼴로 분류 될 수 있다. 김남주와 조정래가 자신의 작품에서 반미감정을 나타냈듯, 저자도 한쪽으로 편향된 자신의 주장을 소설이라는 미명아래 독자들을 설득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작품이던지 작가가 의도한 바가 있고, 그의
이데올로기가 들어 있을 것이다. 작품을 읽으면서 그 판단은 독자가 하는 것이지 누군가가 대신해 주지는
않는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한국 특유의 암기 위주 대학입시가 백지 두뇌를 만들어 좌파들에게
좌우되고 있다고 하고 비판하고 있는데, 이 부분 또한 사실과 다르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데올로기에 대해 관심도 없고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한 취직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만약 저자의 비판이 맞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어찌 학생들과 좌파들의 잘못인가? 우리나라 정책을
입안하는 정치인들과,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관료들과 지도자들의 잘못은 없단 말인가?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거나 적극적으로 참여한 지식인을 네 가지로 분류했는데, 꽤 잘된 분류라 생각 한다. 첫째 – 사회주의를 자본주의 체제보다 선호한 사회주의자(개인적으로 소수 인원일
것이다.) 둘째 – 인권 회복을 지상 목표로 설정한 인권
주의자 (개인적으로 다수가 이쪽이 아닐까 생각한다.) 셋째- 자신의 입지 확보를
위한 기회주의자 (썩은 고기를 찾아 정치판에 기웃거리는 하이에나 같은 사람들이 더러 있다. 좌파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고 우파에도 이런 부류가 꽤 있다.) 마지막으로
자신보다 더한 행복을 누린다고 생각되는 자들을 무조건 증오하는 증오주의자로 분류하였다. (사회 부적응자가
아닌 이상 이런 류의 사람은 극 소수일 것이다.)
한반도 분단 고착세력은 중국과 일본이라고 확단했는데,
중국과 미국일 가능성이 높고, 일본은 미국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미국이 고착세력이 아니라면 굳이 우리나라에 싸드 미사일을 설치 하려고 하는 이유는 뭘까요? 미국은 역대 전쟁에서 끝장을 내지 않는다. 언제든 다시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고 전쟁을 종식시키고 다시 이해 관계가 형성되면 다시 전쟁에 개입하곤 한다. 미국은
전쟁을 해야만 살 수 있는 나라이고, 지구촌의 평화를 원하는 나라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국이 행한 부정에 대해 저자도 p173~4에 거쳐 서술 하였듯이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한 일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국가든 단체든 개인이든 심지어는 동식물도 자기중심적으로
생존한다.
저자는 평화 상태를 정의하기를 ‘한 집단
안에서 모든 구성원이 한 사람의 강자를 인정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 평화 상태라 하였다. 현재 강대국은 계속 강대국으로 남아 있어야 하고, 현재 기득권은
미래에도 계속 기득권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만약 이것이 평화라면 난 전쟁을 택하고 싶다.
무엇이 다수의 국민을 위한 일인가에 노력하지 않는 자는 기득권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국제 질서에 누가 되는 국가는 도태 되어야 한다. 이 말을 하면
종북인가? 저자는 말끝 마다 지배계급을 향한 증오심은 교묘하게 주체 사상으로 연결시켜, 묵시적으로 강제하고 있다.
미국의 국사적 원조 때문에 경제부흥이 일어났고, 박정희의
유신정권이 경제 발전에 이바지 한 것에 대한 부분은 부정하지는 않지만, 경제적 부흥 때문에 주권, 인권 이런 것들을 막 내어 줘도 되는지 심사숙고 해 봐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혐오스러운 상류층이 제거되면 증오주의자들도 자연히 제거될 수 있고, 반면에 증오주의자들이 사라지면 혐오스러운 상류층도 우리 사회에 발 붙일 데가 없는데 어느 쪽이 쉬운 방법인가? 증오주의자들을 먼저 퇴치하면 자연스럽게 혐오스러운 상류층이 도태된다고 했다.
궤변도 이런 궤변이 있을까? 혐오주의자들을 증오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혐오주의자들이 없어져야 증오하는 사람들이 없어질 것 같은데, 반대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왜 이 모양이 되었는가 잘 생각해 보자.
혐오주의자들이 득세하고 판치고 있던 일제 강점기 친일파 청산이 되지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의
혐오주의자 단체인 뉴라이트가 있다. 여기에 소속된 인사들과 행태를 살펴보라. 그들을 증오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있다.
리뷰를 보면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가졌는지 알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혐오스러운 기득권에 반대하기는 하지만 북한을 찬양하지는 않는다.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처럼 어떤 것이 다수의 국민을 이롭게 하는지가 관심사일 뿐이다. 기득권을 비판하면 무조건 몰아
붙이는 것도 비겁한 짓이라 생각한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한 방향으로만 움직일 수 있겠는가? 때로는 반대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존중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말에 반대의견을 개진 했지만, 짧은
지식과 주워들은 풍월일 뿐, 저자의 지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재미있었고, 이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