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를 바꿀 14가지 거짓과 진실 - KBS '역사추적' 팀이 밝히는 비밀! 두 개의 한국사!
KBS 역사추적 팀.윤영수 지음 / 지식파수꾼(경향미디어)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승자의 시선에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명암이 생길 수 있다. 이 책의 기록이 사실여부를 떠나 굉장히 흥미로웠다. 역사를 좋아했기 때문에 많은 책을 읽었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교과서에서 좀더 깊이가  있을 뿐 다른 시야에서는 바라보지는 않았었다.

 

신라 김씨 왕족은 흉노의 후손인가? 흉노족은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한 유목기마민족으로 북 몽고와 중앙 아시아가 주무대였는데, 문무왕 비문을 판독한 결과 김일제는 흉노족 태자였는데 한무제의 포로가 되어 마부로 전락 했으나, 한무제 암살하려는 반란 세력을 진압하면서 제후국 왕으로 임명되었으나, 왕망이(김일제의 사촌) 쿠데타를 일으켜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세웠다가 패망하면서 김해로 남하하면서 신라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토착민은 백제나 고구려였단 말인가? 놀랍다.

 

왕의 요리사는 남자였다. TV에 방영되었던 사극은 모두 역사를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허구였다는 것인가? 나인들은 음식을 나르는 일만 했다니, 대장금은 결국 허구였던 모양이다. 요리사가 남자였던 이유는 노동강도와 왕의 신변보호 때문이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나쁜 문화가 순장 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나라들은 이런 풍습이 없었는데 유독 김해지방을 중심으로 한 가야에서만 있었을까? 신라가 유목 기마민족의 후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궁금증은 자연스럽게 해소 되었다. 스스로 선택했건, 죽음을 당했건 이 풍습은 인간으로서 최악의 풍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는 어려서부터 들었기 때문에 둘은 부부였다고 생각했는데, 무왕의 왕후는 사택씨라고 기록되었다는 사실이 의외였다.

 

정조가 정적인 심환지에게 299총의 비밀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신라가 흉노족의 후예라는 사실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의자왕 항복의 진실이다. 의자왕 하면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삼천궁녀 등등 야사가 많았던 왕인데 진실이 아니었다니.....

신라가 당을 불러들여 통일을 기했을 때 의자왕은 나당 연합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고사시킬 작전이었는데, 백제의 장군이었던 예식이라는 자가 배신하여 의자왕을 잡아 당나라에 바친 후 당나라 정3품의 장수가 되어 영화를 누렸다고 한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이나 고위 관료들의 행태를 보면, 국가나 국민의 안위 보다는 자신들의 영달에 목메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예식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혁신 해야 한다면서 혁신대상에 본인이 들어가면 탈당을 하고 발악을 하면서 자신은 꼭 공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과연 올바른 리더의 길인지 묻고 싶다.

 

신라 해적이 일본 대마도를 공포로 몰아 넣었다? 일본 역사에 의하면 백척의 배와 25백 명의 군대가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를 한번도 침공한 적이 없다고 배웠는데, 발해와 교역이 끊힌 신라에서 금, 은 동과 진주, 그리고 견면을 얻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역사의 기록은 예상대로 유리한 대로 기록 하는 것 같다.

단순하게 패거리들이 몰려다녔던 것이 아니라 정식으로 해군과 같은 체계를 가진 군대의 모습이었다고 하니, 신라의 진성여왕이나 당나라 장수, 저자의 추측대로 후 백제를 세운 견훤이 배후에 있었을 것 이다.

 

동래성에서 송상현 부사를 축으로 방어하다 학살된 양민의 소식은 접한 적이 있다.  전즉전 부전 가아도 (싸울테면 싸우고 싸우지 않을 거면 길을 빌려 달라)고 하자 戰死易 假道難전사이 가도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리는 것은 어렵다.)란 말로 결사 항쟁을 하였던 인물이다. 일본 역사서에 송상현을 추앙하였고, 송상현을 죽인 병사를 참수 하였다는 기록은 아이러니다. 5천명을 학살하고, 심지어는 5살 먹은 아이까지 죽여놓고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임진왜란은 조선 말살정책이었던 것 같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이순신이 23 23승의 전과를 올린 것이 리더로서의 역할을 잘한 것도 있겠지만, 녹도만호 정운이나 팔순 참모 정걸, 거북선을 만든 나대용, 송대립. 희립 형제 등의 참모들과 이름 없는 수군과 격군 들이 뒤를 받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니 우리나라 과거제도에 대해 궁금해서 알아보았다.

초시:240 -> 복시 33: -> 전시(복시 합격자를 성적순으로 배치하는 것)이었고, 3년에 한번씩 실시 되었다고 하니 출사하기가 보통 일이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양반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공부만 수 십 년 동안 했으니 공부의 강도가 요즘과 비교 되지 않았을 것 같다. 인구대비 공무원 수를 대입하더라도 5천만 명에 백만 명 정도니까 2% 정도되고, 한해 채용한 인원이 약 2만 명 이내라고 하니까 2,500명당 1명꼴로 뽑는데 반해, 14세기 경 인구가 600만 명 정도였고, 과거 채용인원이 전체 741명 이었으니, 8,097명당 한 명 꼴이었다. 들어가기 어려운 만큼 비리도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무척 애를 썼던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역사에 흥미가 좀 떨어진 분들이나 흥미가 있더라도 교과서 내용대로 알고 있었던 분들이 읽으면 좋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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