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토지 7 - 2부 3권 ㅣ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7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김환, 강쇠, 윤도집, 윤도집의 큰 아들 필구,
진주의 관수, 산천 객주집 주인 석포, 운봉노인, 지삼만, 조막손 손가는 동학이란 이름으로 제폭구민, 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학정을 쳐부수고 일본에 항쟁하고 있는 인물들인데 환이의 주도권를 못 마땅하게 보고 있으나
냉철한 판단과 뛰어난 언변으로 그들을 설득하고 모임을 지속시킨다.
환이는 평사리에 가서 옛 추억을 생각하며 돌아다니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죽을 만큼 몰매를
맞고 춘매에게 위탁한 후 강쇠를 만나 돌아간다. 환이는 동네 사람들에게 대항할 능력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맞은 이유는 별당아씨에 대한 생각과 자신에 대한 원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와 달리 평사리 사람들이
환이를 때린 이유는 별당아씨와 도망가는 바람에 최 참판댁이 이 지경이 되었고, 때문에 자기들의 삶이
어려워 졌다는 논리 때문이었다. 내 생각에는 조준구하고 일본 놈들 때문인 것 같은데........
혜관은 상현과 기화를 만났고, 기화는 혜관과
간도까지 동행하기를 희망한다. 일가친척 없이 혼자가 되다 보니 서희나 길상, 월선, 김훈장 등 옛 추억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간도에 도착하여 최서희를 찾아 갔는데 길상과 혼인한 상태였다. 봉순은
둘의 혼인을 축복해 주었고 서희는 봉순의 등장에 당황해 하나 이내 안정을 찾고 예전과 같이 봉순을 대한다. 그러나
봉순은 길상의 엄청난 변모에 놀란다.
서희는 일전에 이동진이 사람을 보내 군자금을 요청하였을 때 거부한 이유를 봉순에게 설명해
준다. 물론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었지만 개인적으로 서희의 영특함에 놀랬다. 군자금을 내 놓고 싶었지만 세상에 비밀이 없기에 거부 했던 것이다. 이를
헤아리지 못한 김훈장이나 이상현 등은 돈 밖에 모르는 계집이라 치부하고 못 마땅히 여긴 것이다.
서희는 조준구가 토지의 절반을 팔아 먹었다는 말을 듣고, 봉순이의 연줄로 공노인을 보내 토지를 되 찾고자 한다. 향후 공노인의
활약이 기대된다.
상전과 결혼한 것이 자유의 날갯죽지가 부러진 것이라 생각하며 고독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길상은 갈수록 거칠어지고 서희는 공손하고 지순해졌다. 길상이에서 김주사, 김선생으로 신분이 상승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이네를 생각한다. 측은지심일까 아님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일까? 후회할 거라면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 했고 결혼을 했으면 결혼생활에 충실해야 할 것 같은데 길상이 무엇 때문에 흔들리는지 모르겠다. 아들까지
낳았으면 서희를 도와 집안도 일으키고 무지한 국민들을 계몽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김두수는 윤이병을 시켜 금녀를 데려오라고 시켰으나 금녀는 학교생활에 만족해 하며 윤이병과의
동행을 거부하고 윤이병에게 김두수의 밀정 노릇은 그만하고 그에게 멀리 떠나라고 충고한다. 이 일의 실패로
결국 윤이병은 김두수의 칼에 죽는다.
송애 또한 김두수 밀정을 하다가 길상과 송장환 그리고 그의 양아버지에게 까지 발각되는
바람에 용정을 떠나게 된다. 이 사건으로 김두수와 길상은 만나지만 서로의 속내는 드러나지 않는다.
주갑은 기화가 가져온 고기를 임이네가 숨겨놓자 골탕먹일 속셈으로 고기를 혼자 구워 먹다가
급체했는데 강의원의 도움으로 회복하고 강의원에게 위탁한다. 기화를 본 후 짝사랑을 하다 주제를 파악하고
강의원을 따라 나서기로 한 것 같다. 어느 누구 보다 의리도 있고 배짱도 있고 사리가 밝은 인물이다. 사실 이런 사람이 잘되어야 하는데 훗날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행방이 묘연했던 강포수가 그의 아들 두메를 데리고 용정에 나타났다. 강포수의 두메에 대한 무한 사랑로 공노인에게 부탁하여 두메를 학교에 보낸다. 두메와 홍이의 복선이 있는데 향후 독립운동에 한 획을 긋지 않을까 생각한다.
7권에서의 이슈는 길상과 서희 결혼 소식이었고, 그들만의
러브스토리가 있을 것 같았는데 저자는 단 한 줄로 그들의 결혼을 묘사하였다.
이동진과 권필응, 장인걸이 거론했던 손문과
원세개라는 인물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궁금하여 발췌하였다.
손문은 공화제 창시자로 국민정부시대에 국부로 최고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형이 있는 하와이에서 신교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으나 전통과 신문화의
갈등으로 홍콩으로 이주하여 의사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삼합회 수령인 정스량과의 친분으로 반청운동에
가담하여 혁명가의 길을 걷는다. 신해혁명 이후 귀국하여 임시 대총통에 추대된 후 중화민국을 발족 시키고, 삼민주의를 주장하며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공화제를 도입하기로 원세개와 합의 하고 총통의 자리를 넘겨주었으나, 원세개는 이를 어기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버린다. 이에 쑨원은 중국혁명동맹회를
개조하여 국민당을 설립하여 위안스카이에게 대항하였으나 무력에 밀려 폐퇴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사회개혁을
추진하였으나 제2혁명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하여 중화혁명당을 창설하고 군벌들이 얽혀 싸우는 틈에 호법운동을
벌여 광둥을 중심으로 정권수립에 힘을 썼으나 좌절되자, 국산당과 제휴하고 노동자와 농민을 결속시켜 북벌을
준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간암으로 사망하였다.
손민의 삼민주의는 태평청국의 혁명적 전통을 이어받고,
프랑스의 인민주권설, 영국의 사회학설을 받아들여 중국현실에 적응시켰던 것이다. 임시정부를 지원한 공으로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원세개는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조선의 정세를 안정시킨다는 빌미로 우장경을 따라
조선에 부임하였다. 임오군란 주동자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여 청나라로 압송하였고, 갑신정변에는 고종이 일본군에 납치되지 전투에 참여하여 고종을 구출하였다. 이홍장은
조선에서의 공적으로 조선주재총리교섭통상대신에 취임 시켜 서울에 주재하게 한다. 그는 조선의 내정, 외교를 조정 간섭하고 청나라 세력을 뿌리내리면서 일본, 러시아와
경쟁구도를 만들었다. 이후 서태후의 신임을 얻어 승진을 거듭하다 신해혁명 이후 총리대신이 되어 청나라의
실권을 잡은 후 황제를 퇴위시키고, 쑨원에게 넘겨 받은 총통에 취임하여 독재제체를 만들어 스스로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일본의 21개 요구 사항을 받아들여 연호를 홍헌으로 개원하였으나 주변국의 황제제도
취소 권고와 반원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원세개나 쑨원 둘의 삶이 한편의 역사 책이다. 설마
이들이 우리나라를 위해 도와 주었겠는가 마는 우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니 의병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거론할 만한 이유가 있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