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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마음 - 나의 옳음과 그들의 옳음은 왜 다른가
조너선 하이트 지음, 왕수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4년 4월
평점 :
책을 읽을 수록 혼란이 가중되었다. 과연
어느 것이 참이고 거짓이란 말인가? 참도 거짓도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세상의 모든 것을 이분법으로 나눠 이것은 참이고 이것은 거짓이다라고 분류되어 있다면 인간이 머리 싸매고 고뇌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 그것이 명확하기 구분되지 않다보니 나의 옳음과 그들의 옮음이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옳음이 참인가 그들의 옳음이 참인가? 그것을 찾기 위해 조너선 하이트 교수가 엄청난 공력을 들여 이 책을 썼다 과연 그 답을 찾을 수 있는지 확인해
보자.
도덕이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교수의 책
제목이다. 물론 이 책을 읽었는데 잘 기억 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요약이 안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국어 사전에 풀이를 옮겨 보면
'사회 구성원들이 양심, 사회적 여론, 관습
따위에 비추어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 준칙이나 규범의 총체, 외적 강제력을 갖는 법률과 달리
각자의 내면적 원리로서 작용하며, 또 종교와 달리 초월자와의 관계가 아닌 인간 상호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다.' 정말 이해하기 쉽고 명료하게 요약했다고 생각 한다.
그렇다면 이와 비슷한 뜻을 가진 윤리란 무엇일까? 핵심은
인간의 존엄(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개인의 소중함)과 그러한
사람들끼리의 보편 타당한 관계 속 에서 상호 관계를 맺는 것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또한 딜레마가 보편 타당한 관계를 명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좀 어렵게 설명되었는데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 실제의 도덕규범이 되는 원리, 윤리는 인간이 행하여야 할 올바른 길이며 공동의 선에 해당하는 길이 바로 윤리이고 그 길에 따라서 가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다.'
그렇다면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듯 하다. 도덕이나
윤리를 지키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이 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인간은 homo duplex이기 때문이다. 호모 듀플렉스는 '인간은 이중적인 존재이다.'라는 뜻이다. 에밀 뒤르켐은 개인적인 존재가 사회적인 존재에 의해
길들여지지 않을 때 사회는 무규범 상태인 아노미에 빠져들 것이라고 경고하고 개인은 카오스이고 사회는 카오스를 정화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코스모스라고
하였다. 이가 주장한 깊은 뜻은 잘 모르겠지만 '개인의 행동은
사회 활동을 통해야만 윤리나 도덕이 된다.' 뜻으로 이해했다.
기본적인 용어 정리가 되었으니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우리가 사회 생활을 하며 의문을 가졌던 부분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책의 두께 만큼이나
많은 내용이 들어 있다. 책의 구성은 총 3부 10장으로 되어 있는데 전체를 소개할 순 없고 각 부에서 한 개씩 발췌하였다.
첫째 왜! 나는 바르고 남은 잘못인가? 저자는 여섯 가지 사실을 들어 '직관이 먼저이고, 전략적 추론은 그 다음이다.'라고 정의 하였다.
하나. 뇌는 무엇에 대해 항상, 그리고 즉시 평가를 내린다.
둘. 사회적 정치적 판단은 순식간의 직관적
인상에 심하게 좌우된다.
셋. 우리의 신체 상태가 때로는 우리의 도덕적
판단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불쾌한 냄새나 맛은 사람들이 더 엄격한 판단을 내리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다.
넷. 사이코패스는 추론능력은 있으나 느끼지
못한다. 즉 도덕적 능력이 결핍되어 있다.
다섯. 아기는 느낄 수 있으나 추론 능력이
없다.
여섯. 정서 반응은 뇌에서 정해진 장소와
때에 맞추어 일어난다.
즉, 먼저 결정을 해 놓고 그 결정이 진실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이 선택한 결정에 대해 타당성만 찾아내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개인의 이성적
추론 능력을 과대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둘째 가난한 사람들이 왜 보수 정당에 투표하는가? 개인적으로
진짜 궁금했다. 보수주의자들은 어린 시절 엄격한 부모 밑에서 자라서 변화, 새로움, 복잡함을 심하게 두려워 하거나 존재 불안으로 인해 흑백논리의
단순한 세계관을 고수 하고, 인류 전체보다는 자신이 속한 집단을 더 중요시 한다 라고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 하지만 진보주의자는? 가난한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가난한 사람들이 왜 보수 정당에 투표를 하는지에 대한 답은 하지 않았다. 좌파의 도덕적 기반은 배려/피해기반과 자유/압제 기반에 기대는 반면 우파는 배려, 공평성은 물론이고 충성심, 권위, 고귀한 다섯 가지 기반 모두를 활용하였다. 세부적인 사례를 살펴보자.
진보주의자는 사회를 하나로 단결시키고 사회를 해하는 적을 억누르는 일을 실질적으로 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얻어내는 것이다. 여기서 적이란 권력을 쥔 채 그것을 남용하는 자 또는 부를 집적하는
자를 말한다. 이들은 세계시민 주의가 강하고, 평등을 신성시
하고, 시민의 권리와 인권 쟁취를 통해 이를 실현하려고 한다.
결론적으로 진보주의자들은 약자가 강제에게서 억압받지 않도록 정부가 방어해 줄 것을 기대한다. 과연 이런 이유 때문에 보수정당에 투표하는가? 이외에도 진보주의자들은
예를 들어 가장 열심히 일한 직원에게 가장 많은 보수가 돌아가야 하는가의 물음에 찬반의 의견이 대립하는데 보수주의자들은 100% 지지 한다고 한다. 즉 진보주의자들은 공평성 프레임에서 어정쩡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저자가 소개한 이유로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정당에게 투표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fake을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진보주의 자들이 적으로 간주한
경제적 모럴 해저드를 문화로 바꿔 분열을 조장하고, 언론을 장악하여 통제하고,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숨기고 서민들의 눈을 흐르게 했기 때문에 여기에 놀아났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두환은 프로야구를 들여왔고, 노태우는 국풍 이라는
문화행사를 이용하여 국민들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여 정권을 장악한 것으로 알고 있다. 과 새누리당이 해온 1% 부자들만을
위한 정책을 심판하고 노동대중에 대한 일관된 탄압에 저항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가 당선되면서
심판이 가로막히자 그 분노는 박근혜를 지지한 50대를 향했다. 20대가 65.2%로 지난번 선거보다 많이 참여했고 65.8%가 문재인을 지지했으나, 50대의 90%가 투표에
참여하고 62.5%가 박근혜를 지지하면서 기득권을 가진 5~60대
기성세대가 2~30대의 변화 열망을 숫자로 눌렀다는 얘기가 이어져 나왔다.
분노의 화살은 노인의 무임승차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대선 결과를 세대론으로 분석하는 흐름은 중요한 사회 구조적 쟁점을 숨기고 노동자, 서민의 눈을 흐리는 구실을 한다. 20대 노동자든 50대 노동자든 계급적 이해관계는 결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자와 서민들이 주목해야 할
지점은 따로 있다. 다음의 표를 보자.
마지막으로 마
가난한 이들은 왜 문재인을 찍지 않았나? 문재인을 지지한 게 과연 가난한 노동자와
서민을 위한 선택일까? 반대로 박근혜가 당선된 건
부자들의 결집일까? 선거를 8일 앞두고 발표된 동아일보 여론조사
결과는 다른 진실을 보여준다. 예상과 달리 월 소득 200만
원 이하의 가난한 이들이 박근혜를 더 많이 지지했다. 반면 200만 원 이상의 소득을 가진 이들 중 많은 수가 박근혜가 아닌 문재인을 선택했다. 또 학력이 낮을수록 박근혜를, 높을 수록 문재인을 지지했다. 이를 두고 한쪽에서는 못 배우고 가난한 이들이 멍청해서
박근혜를 찍었다고 쏘아붙인다. 다른 쪽에서는 반대로 박근혜가 진정한 서민의 대변자이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선택했다고 뿌듯해한다. 그러나 가난한 노동자와 서민이 가진
자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 박근혜를 지지했다는 건 상당히 유심히 살펴볼 지점이다. 가난한 이들이 문재인을 찍지 않은 건 문재인이 노동자와 서민의 삶을 더 낫게 바꿀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걸 보여준다. 선거기간 내내 민주당은 진보적 정권교체, 이명박
심판만을 외쳤다. 당장 끼니와 일자리를 걱정해야 하는 실업자와 저임금 비정규
노동자또한 민주당 정부를 경험한 노동자들이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은 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김대중 정부가 만든 정리해고제, 노무현 정부가 완성한 비정규직악법으로
노동자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받고 있는가? 저축은행 규제를 완화해 비리의 씨를 뿌린 게 김대중 정부였고, 국토균형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을 부동산투기지역으로 바꾼 건 노무현 정부 아닌가?
가난한 이들이 왜 박근혜를 선택했나?그렇다고 박근혜가 대안이 될 수는 없다. 민주당이
민주의 탈을 쓴 가진 자들의 정당이라면, 새누리당은
노골적인 가진 자들의 정당임이 분명한데 가난한
노동자 서민이 왜 이들을 선택했을까?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에서 토마스 프랭크는
미국 공화당 같은 자본가 정당이 노동자들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대중의
분노 원인은 경제적 문제이고, 사회의 전체적인 부를 자본가들이 독점하면서 발생하는 문제인데도
선거 시기에 그 분노를 계급 대립으로 연결시키지 못하도록 다른 쟁점으로 돌린다. 낙태와 동성애에 대한
찬반, 진화론을 교과서에 넣느냐 마느냐 등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문제로 관심을 돌리고, 분노의 화살을 자본가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스타벅스에서 여유 있게 고급 커피를 마시는 사무직 화이트칼라와 지식인들에게
돌리는 데 성공한다. 여기에 서민정당이라고 부르짖는
민주당의 우경화가 더해진다. 민주당은 지지층 확대를 위해 친기업정책을 수용했고, 블루칼라 노동자를 배제했다. 이런 분석은 한국사회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은 박근혜가 독재자의 딸이라는 걸 부각시키는 데 주력했다. 노무현 정부의 반노동자정책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문재인은 또 다른 노무현이었다. 반면 박근혜는 당명도 바꾸고 당의 색깔도 과감하게
붉은색으로 바꿨다. 또한 복지예산 확충, 반값등록금 시행, 경제민주화까지 동의한다고 얘기했다. 50대의 절실한 관심 사항인
하우스푸어에 대한 대책을 제시하고 국민의 70%를 중산층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한 건 민주당이 아니라 새누리당이었다. 공약을 깊이 들여다보면 결코 노동대중을 위한 정책은 아니지만, 박근혜는 대중이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겠다는 모양새를 취했다. 심지어
선거 며칠 전에는 젊은층의 지지를 끌어내려 군복무 기간 단축까지 발표했다. 선거기간 동안에는 겉보기엔
새누리당이 민주당보다 더 서민적인 정당이었다.
계급대립이
우선이다 BBK를 비롯해 범죄가 명백히 드러난 이명박을 다수가 찍었던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작년 4·11총선에서
월 소득 100만 원 이하 계층 중 새누리당을 찍은 비율이 76.2%라는
여론조사를 기억해야 한다. 매일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노동자아 서민에게 절실한 것은 ‘밥’이다. 이들은 눈앞에 놓인 경제적 고통을 해결할 방안을 찾고 있을
뿐이고, 박근혜가 더 낫겠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어떻게 부정부패 주범들에게 표를 줄 수 있냐고, 어떻게 보편적 복지가 아니라 선택적 복지를 지지하느냐고 질책하는 건 빗나간 공격이다. 50대 책임론을 들먹이며 세대갈등을 부추기는 건 가난한
이들을 분열시키는 해악이기까지 하다. 우리는 진보냐 보수냐
같은 허구적인 쟁점에 눈을 돌려선 안 된다. 정리해고제와 비정규직악법을 만든 진보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 우리는 알맹이 없는 진보 대 보수 구도를
거부한다. 우리는 노동자, 서민 대 부자의 대결구도를 분명히 하고 널리 알리고 지지자들을
모아야 한다. 물가폭등, 하우스푸어, 높은 등록금, 장시간노동, 저임금의
이유는 부자들이 더 많은 부를 가져가기 때문이고, 이들을 정치권력이 지켜주기 때문이다. 노동자와 서민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선 부자들과 싸울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노동자 서민이 실질적인 권력을 잡아야 한다. 정리해고를 금지하고, 비정규직을 철폐하고, 노동시간을 단축해 일자리를 나누고, 무상교육·무상의료·무상주거를 실현시켜야 하며, 이를 위해 부유세를
도입하고, 독점 대기업을 몰수하고 국가 소유로 바꾸어 노동자
권력이 통제해야 한다. 나아가 사장이라는 이유로, 공장·기업을 가졌다는
이유로 부를 독점하는 사회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삶이 나아지지 않는 절망의 자본주의를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을 수 있는 희망의 사회로 바꿔야 한다. 우리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쟁점화해서 박근혜를 선택한 노동자 서민과
문재인을 지지한 노동자 서민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가난한
이들이 꼴통 자본가정당인 새누리당이나 자유주의적 자본가정당인 민주당이 아니라 진정한 노동자정당을 지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이번 대선이 가리키는 유일한 진실이다.
마지마마지감 마지막으로 진보주의자에게 배울 점, 자유주의자에게
배울 점, 사회적 보수주의자에게 배울 점에 대해 알아 보자.
먼저 진보주의자에게 배울 점 - 관용, 아량, 공동체 의식, 권력자에
대한 약자의 수호, 배움에 대한 사랑, 믿음의 자유, 예술과 시, 도시생활 이런 것들을 진보주의자들은 지지한다. 기업이 시장을 왜곡시키고 외부의 짐을 타인에게 떠 넘기는 경향이 있는데 진보주의자들은 정부가 기업들에 맞서
대중의 권익을 지켜내기를 바라고 있으며, 정부의 규제는 꼭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 그래야 기업들이 올바른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아 지기 때문이다. 저자의
설명인데 이게 진보주의자들에게 배워야 할 점인가? 주장이 너무 빈약한 듯
.....
둘째 자유주의자에게 배울 점 - 사회적인
면에서는 개인의 사적인 자유를 옹호하기 때문에 진보주의자라고 불리고, 경제적인 면에서는 자유시장 경제를
옹호하기 때문에 보수주의자로 불린다. 이들이 가장 신성한 가치로 생각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다. 이들을 연구한 결과 보수주의 보다는 진보주의에 가까우나 복지사회가 미국의 자유와 미국의 도덕심을 무너뜨린다고
생각하고 있다. 배려 기반이 무시된 처사라고 볼 수 있다 라는 것이 저자의 설명인데 시장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배울 점이라는 얘긴지 배려하지 않는 것이 배울 점이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문장상 두루뭉술한 표현이어서
무엇을 배워야 할지 잘 모르겠다.
셋째 사회적 보수주의자에게 배울 점 - 이들은
질서와 안정을 추구하는 당파에 속해있다. 이들이 신성시 하는 것은 제도와 전통의 수호를 최고의 가치라
생각한다. 저자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보수주의자들이 누구보다 폭넓은 도덕적 관심사를 가지고 있으며 여섯
가지의 기반(배려/피해, 자유/압제, 공평성/ 부정, 충성심/ 배신, 권위/전복, 고귀함/ 추함) 모두를 비교적 골고루 중시하고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보수주의자들은
다른 이들에 비해 도덕 매트릭스의 폭이 넓기 때문에 도덕적 자본에 위협이 가해질 경우 진보주의자는 미쳐 인지하지 못해도 보수주의자는 그것을 감지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진보주의자나 자유주의자 보다 보수주의자가 더 낫다는 것으로
들린다. 저자는 여러 차례 본인은 진보주의자임을 역설했는데 결국 보수주의가 최적이란 것인가?
철학이나 인문, 사회과학에 대해 문외한으로
이 책 읽는데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하지만 보수가 진보를 포용할 수 있다는 말에 공감할 수가
없다. 나의 옳음과 그들의 옮음이 다른 것을 인정하고 각자의 길을 가면 되는 것이지 어느 한 곳에 동화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여러 가지 경험과 실험을 통해 적립된 이론이겠지만 그것 또한 참은 아닐 것이다. 나는 다수가 행복하게 되는 것을 바라고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을 지지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