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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7 - 제3부 불신시대 ㅣ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1961년 5.16 쿠데타에 성공한 군사정부는 농어촌을 안정화 시키고자 농어촌고리채정리령을 공표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 이후 인구 다수가 농어민이고 임시방편으로 빚을 내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농어민의 빚 부담을 줄여주는 것이 목적이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①1961년 5월 25일 이전의 채무 중에서 연리 20% 이상을 고리채로 간주하고, ②원금이 세대 당 15,000원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리(里)·동(洞)의 정리위원회에 신고하고, ③고리채로 판정된 채무에 대해서는 채권자에게 농협중앙회가 발행하는 농업금융채권을 교부한다. ④농업금융채권은 연리 20%로, 그 중 8%는 국가 부담이고, 나머지 12%는 채무자가 정부에서 융자를 받아 부담한다였다. 개인적으로 국민 대다수가 1차 산업 종사자이다 보니 꽤 좋은 정책으로 보인다. 그러나 군사정부가 경제재건을 위해 공업부분을 중점적으로 육성하는 바람에 지속적으로 추진되지 못해 실패했다고 한다. 선법, 악법을 떠나 새로운 규칙이 생기면 이익을 얻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다. 추수가 되기 전에 법이 시행되다 보니 자금 주들은 사채를 빌려주려고 하지 않아 돈 가뭄이 들어 긴급하게 자금이 필요한 사람들에겐 마른 하늘에 날벼락일 수도 있다.
또 다시 10년 뒤 1972년 8.3 사채동결긴급조치를 선포한다. 긴급조치의 골자는 기업과 사채권자의 모든 채권채무관계는 무효화되고 새로운 계약으로 대체되는데 채무자는 신고한 사채를 3년거쳐 5년 분할상환조건으로 하고 이자율은 1.35%로 하고 사채권자가 원하면 출자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당시 신고된 사채금액이 당시 통화량의 80%인 3,456억 원 이었다고 하니 지금으로 환산하면 1,464,224 십억 원 이다. 이 조치로 수출이 증가하는 등 한국경제의 회복을 가져왔고 기업의 체질 개선을 가져왔다. 결국 투자자들을 희생시켜 대기업을 도와주는 형국이 된 것이다. 그리스, 로마 철학자들이 공부했던 철학이나 기하학 등이 지금까지 건재한 걸 보면 과거의 정책이라 하여 무조건 나쁘고 새로운 것이 좋은 것은 아니고 사용하는 사람이 어디에 적절하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호, 불호가 나눠지는 것 같다. 금융위기가 닥치면 국민에게 걷어들인 세금인 공적자금을 투입하여 위기를 덮으려 하는 걸 보면 과거의 정책에서 한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함을 볼 수 있다.
안경자의 남편 신지훈은 미국 유학을 갔으나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돌아오지 않았고 강숙자는 자신의 친동생 강미현을 유일표에게 소개시켜줬으나 유일표 사정을 알게 된 동생은 거부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임상천과 황집사는 자신이 가진 전 재산과 정동진 출장 중에 동업자를 보증인으로 하여 어음을 발행하고 할인하여 미국으로 도주하였다. 황진사는 임채옥을 데러 가려 했으나 임채옥이 거절하는 바람에 편하게 살수 있을 만큼의 돈만 건네 주었다. 허진은 사장의 신임을 받고 회사의 헤드쿼터인 기획실 중역이 되었으나 과거자신의 신분을 잊은 체 열악한 근로환경 개선을 외치는 노동자들의 노조활동을 금지 하며 현재는 분배의 시기가 아니라 성정의 시기라고 하며 유일표와 대립 한다.
정동진은 임상천이 발행한 어음을 막지 못해 부도를 내고 도망 다니다 한인곤과 임채옥의 도움으로 재기에 꿈꾸고 김선태는 고등고시에 계속 낙방되는 바람에 마지막으로 어머니 월하댁을 뵙고 나서 한강에 투신자살을 한다.
이상재는 허미경을 잊지 못해 양장점으로 찾아가 속내를 보였으나 허미경은 혼자가 되었지만 본인은 메인 몸이다 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힘들어 한다. 한편 배상집은 광부 계약기간이 만료되어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가난한 유학생 신분으로 변하였지만 광부들의 우상이 되어 광부들이나 간호원 심지어는 독일 회사에서까지 인정을 받는다.
이상재는 포항제철의 신화 박태준을 취재하는데 박태준에 대한 인물을 발췌하였다.
1963년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후 만성적자였던 대한중석을 1년만에 흑자로 전환하여 박정박정부터 제철소 건설 소임을 부여 받는다. 이에 박태준은 미국을 방문하여 KISA 대표와 담판을 했으나 협력 불가하다는 말을 듣고 돌아오는 길에 대일청구권 자금의 일부를 제철소 자금으로 전용하자는 생각을 박정희에게 보고하고 재가를 받아 일본에 가서 정재계 인사들을 설득하여 대일청구권자금 7천 370만달러와 일본 차관 5천만 달러를 들여와 포항제철소 건설을 시작하여 1970년 조강연산 130만톤 규모의 1기 설비를 착공하고 1973년 에는 비로소 용광로에서 처음으로 쉿물을 받아냈고 1992년에는 광양제철소까지 완공되어 2천 100만 톤을 생산할 수 있는 세계 5위의 철 생산국이 되었다. 제철산업이 단순하게 철을 생산하는 것에게 끝나지 않고, 자동차, 조선, 가전 등 관련산업의 성장과 경쟁력 때문에 국민경제적 기여도가 상당히 높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제품과 시장에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부분에 관심을 갖고 투자가 이루어 져 지속 가능한 혁신철강기술을 확보하여 고부가가치를 이루어 내야 할 것이다. 중국 등소평이 신일본 제철에 가서 포항제철과 같은 것을 중국에도 만들어 달라고 하자 당신에 나라에는 박태준 같은 사람이 없지 않소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박태준은 신화와도 같은 존재구나 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