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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을 말하다 - 이덕일 역사평설 ㅣ 조선 왕을 말하다 1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이 세상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듯 권력 또한 영원하지 않다. 하지만 그 권력을 갖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한다. 개인적으로 권력가들을 싫어한다. 단순하게 권력을 갖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아니다. 소위 권력가들이라 하면 사회 지도층인사들이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라 하면 사회적 책임이 뒤따르는 노블리스오블리제를 실행해야 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는 분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특히 국가와 국민의 부름을 받고 정치에 입문하는 분들은 사익이나 당익 보다 국익에 우선순위를 둬야 하는데 근래 정치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요즘에는 찾아보기 힘든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사회적 책임이 조선시대에서는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물론 역사의 기록이 100%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역사는 항상 승자의 기록이기에 그 들의 입장만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의 구성은 4부로 나눠졌고 각 2명의 왕들이 소개되니 8명의 왕이 소개 되었다.
1부 악역을 자처한 두 임금 – 태종과 세조
태종은 (1367~1422, 재외 1400~1418) 새 왕조 개창에 굳은 일을 자처하며 많은 공을 세웠음에도 공신(정도전) 등에 견제되었으나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재기에 성공하고 자신의 아들인 세종이 성군이 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주었다. 개인적으로는 조선 왕 중 가장 추대 받아야 될 왕이 아니었나 싶다. 기업이든 국가든 지속하기 위해서는 후계자 육성이 가장 중요하다. 자기 자신 한 세대의 성공은 자신의 노력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자신을 희생하고 후계자를 양성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태종은 공신이나 친인척까지 후계자에게 해가 될 성 싶으면 제거 했으며, 사적 친분에 의한 권력 점유를 단절 시키고, 법치를 제도화 시키는 작업을 하였기 때문에 세종이 성군이라는 칭송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것이 요즘 말로 시스템을 도입하여 운영한 것이다. 태종은 왕위 때문에 형제들과 싸운 것이 아니라 미래 조선을 생각 하였던 것이다. 그는 18년 동안 재위에 있는 기간을 호랑이 등에 탔다는 표현을 썼다. 이 말은 권력이란 위험한 것이므로 스스로 자중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세조(1417~1468, 재위 1455 ~ 1468) 태종의 구데타는 조선의 천년대계을 꿈꾸는 분명한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세조는 왕위를 욕심 낸 구데타로 밖에 볼 수 없다.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명분 없이 얻은 왕의 자리였지만 왕권을 강화하고 싶었으나 어차피 권력은 제로 섬 이므로 공신들 또한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 왕권 강화는 곧 그들과의 결별과 대립을 말하는 것이므로 맘만 먹고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왕권 유지를 위해 공신들에게 특권과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주며 눈치만 살피는 처지였다. 조선의 건국 이념이 유교이고 충과 효를 기본덕목으로 삼는 유학자들이 세조를 추출하려는 시도가 잇달았기 때문에 항상 불안에 떨어야 했다. 같은 구데타 라도 태종은 국가권력을 천명의 실현도구로 생각했다면 세조는 공신집단의 사적 이익실현을 도구로 사용했기 때문에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안위 때문에 제거하지 못한 공신들에 의해 자신의 후계자를 제물로 삼은 누를 범하게 되었다.
2부 신하들에게 쫓겨난 임금들 - 연산군과 광해군
연산군(1476~1506, 재위 1494~1506)은 권력은 왕의 것만이 아닌 사대부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여 폐위된 왕이다. 제로섬에서 자기가 더 많이 가지려고 하면 반대 세력들이 가만히 앉아서 밥그릇을 내놓지 않는다. 똑똑한 사람이었다면 자신의 아버지 성종이 했던 것처럼 힘을 가질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좀더 오랫동안 왕좌에 남아 있으면서 다른 일을 도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연산군은 왕권을 능가하는 공신세력을 제거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정적의 대립세력이었던 사림을 제거하는 우를 범하는 바람에 어느 쪽에서도 인정 받지 못하고 훈구와 사람 양수 겹장으로 결국 폐위가 된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공신들의 자리에 사람을 배치하고 공신들에게 빼앗은 재산을 백성들에게 나눠줬다면 좀더 낫은 임금으로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공감한다.
광해군(1575~1641 재위 1608~1623)은 첫 출발은 좋았다. 자신을 지지한 대북과 각 당파와 연립정권을 구성하여 전후 복구에 전념했으나 문묘종사에서 각 당파의 이해를 조절하는데 실패하며 연립정권이 무너진 것이다. 대북은 여당이었지만 소수당으로 힘을 집중시키지 못했다. 탁월한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각 당과의 연정에 실패한 후 자신의 지지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왕위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광해군의 몰락의 전조는 인목대비 폐모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이면에는 자신도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도 힘도 없었고 집중하지도 못하여 결국 소수 강경파에 휘둘리며 당론조절과 사회 통합을 이끌지 못했기에 좋지 않은 군주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면 광해군은 조선시대의 분위기를 거역하며 시대를 뛰어 넘고자 하였으나 인조의 구데타로 인하여 그의 정치색이 퇴색되고 폭군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어느 누구든 왕위에 오른 자는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다. 광해군을 대변하자면 자신의 형인 임해군은 백성에게 악행을 일삼아 지지한 자가 없었으며, 특히 군주인 광해군을 음해하려는 기운이 있었고, 인목대비는 자신의 아들 영창대군이 왕위에 오르기를 희망하였기에 그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3부 전란을 겪은 임금들 - 선조와 인조
선조(1552~1608 재위 1567~1608)는 중종의 셋째 왕비에서 낳은 손자로 전혀 왕위계승과는 관련 없는 인물 이었으나, 정치의 이해에 의해 인순왕후와 이준경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다. 선조 때 사림의 중앙정계 진출이 대폭 늘어나며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나 당쟁은 최고조에 오르게 되며 국가 안위 보다는 상대세력의 의견에 반대하는데 열을 올리는 등 국가가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문인들은 실리보다는 자신의 명분만 내세웠고, 무인들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체 안하무인으로 기세등등 했으니 나라가 올바르게 설리 없었다. 물론 조선시대가 사대부들이 권력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임을 알지 못하는 누를 범했으니 조선을 통틀어 가장 무능한 군주로 기록 되었던 것이다.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 동향을 살폈으나 동인과 서인의 당쟁으로 왕은 임진왜란을 예측하지 못했고, 전쟁 중 백성을 외면한 체 피난길에 오르고 전쟁이 끝난 후 국가를 위해 싸운 사람들의 공은 인정하지 않은 체 자신을 보필했던 인물들만 공신으로 추대하는 등 군주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서슴지 않았기에 무능한 군주로 낙인 찍힌 것이다.
인조(1595~1649, 재위 1623~1649)는 폐모론을 반대한 서인들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하였으나 광해군이 유지했던 중립외교와는 달리 숭명반청을 기치로 내걸어 청나라와 전쟁을 예고하였다. 폐모론은 명분일 뿐 북인들의 씨를 말리는 정치적 시도였다. 물론 정권을 창출하고 명분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칭명 사대를 유지 하였지만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는 처사였으며 소탐대실을 몸소 실천하게 된 것 이다. 이렇다 보니 문인들은 군사도 없으면서 전쟁불사론을 부르짖고 무인들은 큰소리 쳤지만 막상 공격당하자 도망가기에 급급했다. 병조 판서라는 작자는 군병의 숫자도 몰랐다고 하니 정말 한심한 정권이었다. 이런 정권을 두고 누가 국가를 위해 발벗고 나서겠는가? 백성들의 인심을 잃다 보니 의병활동이 전혀 일어나지 않아 인조는 결국 청 태종에게 고개를 숙이는 혐오를 겪는다. 개인적으로 선조보다도 더 무능한 군주는 인조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권력욕에 사로잡혀 신하로서 임금을 내쫓고 아버지로서 아들과 며느리를 죽이고, 할아버지로서 손자를 죽인 인물로 기록되었다.
4부 절반만 성공한 임금들
성종(1457~ 1494 재위1469~1494)은 예종을 거울삼아 자신을 보호할 줄 알았다. 왕위의 자리에 오르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니라 예종이 즉위하며 분경금지, 대납금지, 면책특권 제한 등 공신들의 권력을 축소하는 개혁조치를 발표했으나 공신들이 이를 가만두지 않고 왕위에 오른 지 1년 2개월 만에 급서하고 만 것이다. 세조가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등용한 종친세력들은 몰락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성종5년에 종친사환금지 규정 즉 종친들은 정치를 할 수 없다는 규칙을 정하는 바람에 종친들의 지위는 크게 낮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해 대비가 물러나겠다고 한 그날 바로 정권을 받았으나 바로 공신들을 제거하지 않고 공신들이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공백을 자신의 왕권과 새로운 정치세력 신진 사림으로 메워나갔다. 성종은 훈구와 사림 어느 쪽도 붕괴시킬 마음이 없었고 절절하게 활용하여 실리를 챙겨나갔다. 낮에는 요순 밤에는 걸주라고 표현한 야사를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12명의 부인에게서 28명의 자식이 있었다. 남의 힘으로 왕이 되어 현실과 타협하며 자신의 안위는 지켰지만 그 짐이 고스란히 그의 아들 연산군에게 지워졌다. 그가 특별하게 한 일이 없지만 성군으로 추대 받는 이유는 쿠데타왕 세조와 폭군 군주 연산군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반사이익을 얻은 것이라 한다.
영조(1694~1776 재위 1724~1776)는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의 아들로서 왕위계승과 거리가 있어 보였으나 노론의 지지를 받으며 왕권을 넘겨 받았다. 그러나 그는 경종 독살설에 휘말리며 자신만의 정치를 실현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검소한 군주로 백성들의 고통에 동참 했으나 제도개혁은 하지 못했다. 모순된 제도를 방치한 채 군주의 절검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정권은 노론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으나 사도세자는 감히 노론에 손을 댔고 그 대가로 죽음을 당한 것이다. 영조가 여기에 동조한 것이 잘못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외에 많은 정치를 실현한 것은 사실이다. 자신의 자식을 죽여가며 실현한 정치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절반만 성공한 군자라 하는 모양이다.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정체성과 경제력, 군사력을 가져야 하나 조선시대를 보면 명분만 중요시하기 때문에 실리는 모두 비천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약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대의를 위해서는 소의를 희생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런 점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정치적으로 훌륭한 인물들이 많이 나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들의 가장 큰 목적은 국가의 안위인 것이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정치의 최종 포커스가 국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위에 포커스를 맞추다 보니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수 천년 동안 답습한 악습은 이제는 철폐되어야 할 것이다. 누구든 완벽한 인간이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무엇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하는가는 분명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