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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맨스티
최윤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2월
평점 :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작가는 이 책에서 단어에 집중한다.
남자 양복 브랜드 이름 같기도 하고, 무슨 축구 클럽이름 같기도 한 낯선 단어가 제목에서부터 등장한다.
책을 읽어도 오릭맨스트가 어떤 의미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런 단어가 제목에 등장할 만큼 작가는 단어에, 이름에, 언어에 화두를 두었다고 볼 수 있다.
맨 마지막에 나오는 작가의 말에서 “언어의 확장된 기능을 통해 때로 정화도 일어나고 회복도 가능하다. 언어가 질서이며 생명을 가진 호흡이기 때문이다. “오릭맨스티”는 그런 언어를 경험하면서 또한 갈망하면서 씌어졌다”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이 작가의 말을 읽고 생각난 것은 “오릭맨스티”가 아니라 “엄마”, “가족”, “사랑”이라는 단어였다면 좀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오릭맨스티”라는 단어는 그만큼 낯선 단어였고 공감하기 힘들었다.
이야기의 스토리는 한 가족의 탄생에서 몰락 그리고, 또 다른 가족과의 만남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냥,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였다.
서로를 열렬히 사랑한 연인 사이가 아니라, 그냐 부모님의 성화에 결혼하기 적당한 상대라서 결혼을 한다.
따라서 그들은 수컷 인간인 “남자”와 암컷 인간인 “여자”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들의 결혼은 한 가족을 탄생한다.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기.
그들이 그저 그런 일상에서 평범하게 살았고, 서로에게 가족애를 느끼며 살았다면 그들에게는 남자, 여자, 아기가 아닌 의미 있는 언어로 불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겐 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회사공금유용, 사기 등으로 결국 남자와 여자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고 만다.
그리고, 아기는 벨기에로 입양된다.
이후로 이야기는 “나”라는 화자의 등장과 함께 이야기가 바뀐다.
이전까지 3인칭 시점에서 “남자”와 “여자”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면, “나”라는 화자이자 그들의 아기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는 것이다.
“나”에게 즉, 박유진에게는 “남자”와 “여자”는 이름으로 불린다.
즉 화자에게는 그들이 의미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박유진에게는 또 하나의 의미 있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릭맨스티”이다.
오릭맨스티는 갑작스런 발작과 같은 고통 속에서의 의미 있게 다가온다.
마치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작가는 단어속에 내포하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인간에게서 삶은 때로는 낯설고 위함하고 고통스럽다.
그 안에서 위안과 위로가 되는 것은 서로가 주고 받는 따뜻하고 진심어린 위로의 말일 것이다.
우리가 쉽게 말하는 단어에서 단어 자체보다는 그 의미와 진심에 더 무게감이 있는 것이다.
무슨 주문이던지, 오계어라든 이런 발음 자체보다 그 안에 꿈틀거리는 본심이 생명을 주는 것이다.
낯선 단어 “오릭맨스티”가 유진에게 의미를 갖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