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밀란 쿤데라 전집 14
밀란 쿤데라 지음, 한용택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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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4 밀란 쿤데라

할아버지께.
열일곱 살 쯤 할아버지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처음 읽었습니다. 아직도 1-2년에 한 번씩 읽습니다. 십구 년 동안 할배가 자식처럼 세상에 뿌린 책들을 하나씩 캐다 읽었습니다. 이번 만남으로 (민음사가 저작권을 독점중인) 한국어판 할배책은 다 모았습니다. 아직 엄마 집에 있는 커튼이 남았으니 다 읽진 못했네요. 끝이 아니면 좋겠어요. 5년 전 할배 신작이 나왔을 때의 놀라움을 다시. 그냥 제 욕심입니다.
체코의 역사, 유럽의 예술, 음악과 미술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는 동아시아 토박이입니다. 할배가 글을 체코어로 쓸까 프랑스어로 쓸까 궁금했는데 대부분 프랑스어로 쓴 것을 아주 최근에 알았습니다. 이런 무식쟁이인데도 내가 모르는 소설가, 미술가, 음악가에 대해 할배가 쓴 글을 읽는 게 즐겁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아예 모르겠는 건 아니고 조금은 알 것 같은 게 신기합니다.
지난 번(이라고 해도 사 년 전) 배신당한 유언들을 읽고 카프카의 ‘성’을 읽었습니다. 사놓고 먼지 쌓은 ‘소송’도 읽어야겠습니다.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은 전자책을 사서 5년째 보다 말다 하는 중입니다. 올해 안에는 보려고 합니다. 이번 책에서도 라블레를 언급하셨는데 지난 번보다는 조금 와 닿습니다. 전자책에는 주석이 빼곡이 달려 있어 웃지 못하는 제게 ‘이건 말야 이런 걸 비꼰 거야’하는 개그 설명충을 동반한 느낌이지만 그나마 없었으면 더 맥락없는 독서로 괴로웠겠죠.
이번 만남은 역주가 하나도 없는데 그게 오히려 깔끔하니 좋았습니다. 할배와 마주한 자리에 누가 끼어들어 이러쿵저러쿵 했더라면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텐데 다행입니다.
인터넷 검색은 조금 했습니다. 세상 좋아져서 할배가 말하는 작가의 그림이나 음악가의 작품들을 손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다만 잊혀진 채 어딘가에. 머나먼 동아시아 방구석 칩거자에게는 작은 행운입니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에 대한 글. 저는 철학자 이름으로만 들었는데 윤이형의 소설 셋을 위한 왈츠에 잠시 나오고 빅뱅의 탑이 랩에서 읊어대서 동명의 화가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림을 찾아볼 생각을 한 건 할배 글 덕입니다.
사실 책의 첫 몇 쪽 넘겼을 뿐인데 격렬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할배의 과거 강간 욕망에 대한 서술 때문입니다. 강간 비유는 같은 글에서 계속 등장합니다.
베이컨의 그림을 보고 나서 그런 표현이 터무니 없지 않다는 걸 느꼈습니다만. 그럼에도 굳이 폭력과 공포의 재현을 위해 자랑도 아닌 추한 욕망을 뒤집어 까보였어야 했을까 의문입니다. 나중에 그 얘기를 들은 당사자 기분은 어땠을지. 화장실 물소리와 불편한 속과 비밀경찰에 시달린(릴) 불안에다 강간이라니. 제 뒤집어진 속은 어쩌실런지. 이 변태 할방구야. 그러니 할배가 카레닌 그린 걸 보고 자기 ㄱㅊ그린 거 아냐 하는 소리를 한 제가 무리는 아닌 겁니다.
...죄송합니다. 미안 카레닌.

할배가 소개하신 친우 에르네스트 브롤뢰르의 작품들도 찾아보았습니다. 한국어 검색은 도저히 안 되어서 몇 번 실패 끝에 ernest breleur martinique 란 검색어로 그의 얼굴과 회화와 설치 미술의 이미지를 얻었습니다.
할배가 직접 그의 아뜰리에에서 만난 천사가 하얀 오줌 눈 캔버스나 누운 초승달이나 뒤집어진 티셔츠 같은 밤은 못 찾았지만. 흥미로웠습니다.
마르티니크라는 지역에 대해서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인과 관련된 검색 결과는...마약 밀매에 (주장대로라면 잘 모르고) 얽혀 프랑스에서 체포되어 마르티니크의 감옥으로 보내져 수감 생활한 한국 여성의 (기자가 재구성한 가상)수기를 덕분에 읽었습니다. 그걸 읽고 그 섬에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접었습니다. 제 외모와 언어의 한계가 제가 겪을 미래를 미리 제한하네요.

지난 번 배신당한 유언들 덕에 야나체크와 스트라빈스키를 알고 몇 곡 찾아 들었습니다만 큰 감흥은 없었습니다. 이번에 들은 베토벤의 후기 소나타 속 푸가가 포함된 악장들은 꽤나 좋았습니다. 처음 듣는 베토벤 아직 듣지 못한 베토벤이 산더미인 걸 알았으니.
Beethoven-Sonata Op. 110, Adagio ma non troppo- Fuga
https://youtu.be/fGfT6tMKUUY

Iannis Xenakis - Metastasis
https://youtu.be/SZazYFchLRI
크세나키스의 음악 또한 새로운 충격이었습니다. 나라 잃은 충격과 기묘한 위안. 음악을 들으니 조금이나마 알 듯했습니다. 하여간 귀신 같이 이상하게 독창적인 건 잘도 찾아내. 그런 의미에서 샤무아조의 소설 훌륭한 솔리보도 무척 기대가 됩니다. 만 찾아보니 아직 현존하는 한국어판 샤무아조 작품은 없어요. 엉엉.
말라파르테의 원-소설은 아쉽게도 가죽은 없지만 이 책에 파멸로 소개된 책이 망가진 세계라는 한국어판으로 번역이 되어 있었습니다. 언젠가 읽어 보겠습니다.
아무래도 할배가 멋지게 무지개 가루 발라 압축 요약해서 그렇지 찬사를 보낸 책 대부분 실제로 읽으려 들면 기가 질려 덮고 말 가능성이 높겠죠. 그래도 할배가 언급하면 읽어보고 싶어지는 건 참 신기합니다. (돈 받고 서평 블로거 하셨더라면 성공...아,아닙니다.)

이번 책에서도 야나체크를 향한 첫사랑을 한 부에 할애하셔서 찾아 들었습니다. 콘체르토랑 교향악 한 곡씩. 유튜브가 요물이라 Janacek opera 검색하니 영어 자막 달린 예누파랑 꾀밝은 여우 풀버전까지 나왔습니다. 아주 한가해지는 언젠가 감상해 볼까 합니다.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 죽은 뒤에 괴롭힌 것도 모자라 여기서도 빠지지 않네요. 개구리 빼고 영원 회귀 찬미 하자는 뚱딴지 소리를 야나체크에게 직접 했다니...한국말에는 넌씨눈이라는 적정 표현이 있습니다.
무슨무슨파에 속하지 못한 외로운 천재들에 대한 사랑, 독창성과 상상력과 우스운 것들에 대한 찬사. (자신과 같은) 쫓겨나고 배척되고 인정 받지 못한 이방인 예술가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 그런 걸 아낌 없이 적어 두셔서 저도 손가락(끝 손톱)이나마 조금 적셔 봅니다.

노년을 어떻게 보내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아내 성함이 베라인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고(30주년 특별판 카레닌 표지에 괜히 심통나서 출처가 어디냐고 꼬치꼬치 물었더니 밀란쿤데라 에이전시를 통해 “There is a very important dog in the novel – his name is KARENIN – he was the author’s inspiration and when the idea came we cannot say.” 라 답해 주셨다는 아내분…)
자녀나 손자가 있는지 어쩐지도 전혀 모릅니다. 아마 없을 것 같은 기분입니다.
그래도 충만한 시간 보내고 계시겠지요. 그간 펴낸 수많은 글들과 평생을 함께한 예술과 (이제는 많이 돌아가셨겠지만 함께 예술을 말하고 만들던) 친우들과 그들과 보낸 날의 기억.
할배의 삶의 조각과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조각보를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다른 삶과 다른 세상과 할배가 느낀 아름다움들을 저도 느낍니다. 아직은 키치하고 통속적인 (할배가 싫어하게 만든) 것들이나 만들어내고 있지만. 그렇게 살고 있지만 아직은 새까맣고 새파란 날들입니다. 할배가 살지 못하고 쓰지 못하고 읽지 못한 것들을 누릴 시간 밖에 자랑할 게 없어요. 요것아 가는 데 순서 없다 하실지 모르지만 당장은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기쁩니다. 할배 신작이 없는 미래를 생각하면 아주 많이 슬픕니다.
늘 건강하시고 좋은 날들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한국에서 삼십 대 중반 여성 애독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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