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을 위한 왈츠
윤이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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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30 윤이형


말 그대로 미친 바람이 불어서, 창 밖 창 안 나무들이 꺾어질 듯 흔들리고 단발머리 소녀도 기저귀만 찬 발가숭이도 머리카락을 흩날린다. 그러면서도 각자 뭔가 집중해서 들여다본다. 예전에 끄적여둔 낙서가 잔뜩 담긴 스케치북, 바람에 날리는 이면지 같은 것. 습하고 무덥다. 저도 모르게 잔인한 소년이 휘두르던 줄넘기가 내던 소리를 닮은 바람 소리가 무섭다. 세상이 망하는 날의 오전같이 평화롭다. 평화는 깨지고 단발머리와 발가숭이가 싸우는 소리, 울음소리가 그런 날 아니고요, 그냥 평범한 날임을 일깨운다.
그리 많이 읽지도 않았지만 읽어도 모르겠다. 더 많이 읽어도 모를 것이다. 읽는 일 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읽는다.

작년에 읽은 러브레플리카와 오늘까지 읽은 이 소설 사이에는 십 년 가량의 간극이 있다. 삼십대 초반에서 사십대 초반까지 나이를 허투루 먹지 않은 작가의 문장은 날카롭게 갈리고 빛을 발하게 되었다. 온통 어둡고 외롭고 비관적인 속에서 막연하게 기대하던 것들이 제법 자신있게, 조금은 더 희망을 믿으며 자라났다. 물론 지금보다는 거친 십여년 전 이야기들도 집요하고 섬뜩하고 몽상적으로 풀어낸 재주가 보였다. 그 사이 또 어떻게 진화했을까 다음 소설집이 궁금하다.

-검은 불가사리-어려서 쓴 시, 소포로 받은 상자 속, 꿈 속 해변에서 반복되어 등장하고 화자의 눈에 박혀 모두가 외면하고 소중한 이들을 해친 불가사리. 짐작이 되는 은유이다. 불가사리와 작은 병사들의 전투도. 검은 별모양 눈동자의 시각 이미지가 강렬했다. Protect me from what I want.
-셋을 위한 왈츠-그림쟁이 삼남매의 비극의 삼각형, 삼박자의 왈츠. 셋 사이의 긴장이 잘 와닿지는 않았다. 둘도 어려운데 셋은 내게는 너무너무너무 어렵다.
-피의 일요일-와우를 한 번도 안해봐서 구체적인 이미지는 상상이 안 되지만, 게임 속 캐릭터가 바깥 조종자들에게 대항한다는 설정은 흥미로웠다.
-절규-뭉크의 그림으로 겹쳐지는 모습은 다소 식상하지만, 소리지르는 여자와 상처입히는 남자(소리지르게 하는 여자)의 감정선(레즈비언 서사?), 절규 대행이라는 이색 돈벌이 소재는 비현실적이지만 재미있었다. 퀴어 서사는 잘 영글어 나중의 루카에서 제대로 포텐이 터지지.
-DJ론리니스-디제잉을 잘 모르는 내게도 나름 비유들이 와닿았다. 이 소설은 악기들의 도서관 사이에 살짝 껴놓고 김중혁이 쓴 거라고 우겨도 나는 아마 깜짝 속았을 것 같다. 그녀 안에 작게 하반신만 잠긴 채 숨어 있던 존재는 뭔가. 좀 생경한데 또 뻔하다. 굿바이가 조금 더 세련되어진 모습 같다.
-말들이 내게로 걸어왔다-말과 말. 유치할 수 있는 말장난인데 유치하지 않았다. 쌍둥이의 질투. 언어를 지배하는 자와 그러지 못해 시기하는 자. 남의 말을 없앨 수는 있어도 빼앗아 올 수는 없잖아. 그러니 부러워할지언정 미워하진 말자. 추해.
-안개의 섬-자신이 예쁘지 않은 걸 알고, 예쁘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게임 개발자 이야기. 안개섬의 나무와의 대화는 너무 예측 가능해서 김새는데. 직장에서 잘 나가고 어린 남편 있고 뭐가 불만이냐! 육체와 정신 운운하는 건 약간 상투적이지만 공감되는 부분도 없진 않았다. 내가 그래서 거울을 안 봐. ㅋㅋㅋ
-판도라의 여름-비밀을 통제하려는 강박. 그 불행에 대해 잘 그렸다. 작가는 SF소설을 쓸때도 감각이 돋보이는데, 과학과 공상에 방점을 찍는 게 아니라 인간과 관계에 대해 고민한 지점을 잘 풀어내서 그런 것 같다.

바람이 아직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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