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더 무브 - 올리버 색스 자서전, 개정판
올리버 색스 지음, 이민아 옮김 / 알마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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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5 올리버 색스

이 책을 몇 달 전에 읽으려다 세 쪽만에 덮고 그 탓을 번역에 돌렸다. 가독성 없다고 번역가 때리고 싶다고. 벼르고 벼르다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세상에나 술술 넘어갔다. 책에도 문장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앞으로는 문장이고 번역이고 작가고 탓하기 전에 그 책을 읽을 때 내 상태가 정상인가, 제 정신인가 먼저 돌아봐야겠다. (다시 한 번 미안해요. 분이 풀린다면 나를 때려요 엉엉)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환각, 의식의 강을 읽고 네 번째 읽게 된 색스 박사 책이다. (그러고도 아직 사 둔 뮤지코필리아가 남아 있지. 후후)
이 책의 제목은 시인 톰 건이 이 십대에 쓴 시의 제목과 같다.

아무리 나빠도 우리는 움직인다. 아무리 좋아도
절대에 가닿지 못하는, 안식할 곳 없는 우리,
언제나 멈춰 있지 않아, 더 가까워진다.

신경과 의사이면서, 해양 생물, 식물, 시지각과 뇌(색맹, 시각언어로써의 수화) 등 다방면의 과학 분야, 문학, 음악 등까지 두루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글로 남긴 색스 박사의 인생을 그의 목소리로 듣는 즐거운 기회였다.
조현병을 앓는 가족(색스의 경우 형), 약물 중독, 우울증, 내향적인 성격 등 공통된 경험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읽게 되었다. (그러나 색스 박사는 의사로서,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가진 탐구자로서 열심히 신경과 뇌와 감각에 대해 파고들었지만 나는 그냥 멍청한 문돌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환각을 읽을 때는 마약쟁이가 뭔 의학적 호기심 운운하면서 되게 정당화하려고 애쓰네, 싶었는데 이 책에서는 자신이 명백히 중독이었음을 인정하고 그 기저에 사랑의 상실, 외로움 같은 이유를 덧붙이니 조금 더 이해가 되었다. 그의 곁에는 그를 지지하고 찾아주는 가족들, 친구들이 있었기에 최악의 상황에서 망가지지 않고 평생 (다시 올 수 있는 유혹을) 견디며 살아간 것 같다.
일생에서 만난 네 번의 사랑 또는 연애, 그 중 하나는 70대에 시작되어 삶의 끝까지 이어졌다는 점도 놀라웠다. 성적 지향이 달라도 연애에 아파하는 건 비슷하다. 그 다름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아픔과 긴 연애 공백은 안타깝기도 했다.
모터 사이클에 매달려 넓은 미국 땅을 여행하고, 고화석이 편편히 깔린 수백만년 된 지층 사이를 거닐고, 잔잔한 연못이나 파도 치는 바다에서 수영하거나 스노클링을 즐기는 젊은 박사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무거운 역기를 들어올리다 깔리거나 등반 중에 황소를 만나 다리 근육이 절단나거나 피오르에서 노 하나를 잃고 남은 하나로 죽어라 저으며 돌아오는 모습도. 내가 경험하지 못한 그런 경험들이 인생을 얼마나 즐겁게, 또는 긴장감 넘치게 만들었을까.
가족, 친구, 동료 작가, 동료 학자들과 주고 받은 서신도 좋았다. 같은 관심 분야를 가진 사람들과 긴 편지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건 또 얼마나 소중한 경험이었을지. 톰이 보낸 편지에서 색스의 글에서 ‘인간애’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칭찬한 부분이 좋았다. 글에서 필요한 게 뭘까 돌아볼 기회가 되었다.
지각 작용에 대해 리처드 그레고리가 ‘지각 작용은 감각 정보가 단순히 눈이나 귀를 통해 재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뇌에 의해 ‘구성되는 것... 기억과 개연성과 맥락에 따른 예상이 부단히 입력되면서 뇌 안의 만은 하부조직이 작동함으로써 그 정보가 구성된다’고 보았던 것, ‘뇌가 생각을 가지고 논다’라고 한 주장은 환각이나 감각, 환각, 착각에서 접했던 것이라 여기서 다시 보니 좋았다.
다른 챕터들은 쉬이 즐기며 읽을 수 있었는데 뇌와 의식의 재발견 부분은 조금 어려웠다. 에덜먼의 신경다윈주의 자체가 엄청 어려운 주장(아니면 내가 멍청해서 못 알아 듣는 것) 같은데 여러 세대에 걸쳐 자연선택이 일어나듯 한 개체가 살면서 신경세포단위에서 끊임 없이 변화하며 범주화하고 이를 통해 각자의 지각 능력을 형성하며 뇌의 지도를 그려간다고 주장한 것 같다. 색스 박사 덕에 어렴풋하게나마 독특한 이론을 소개 받았다. 박사가 이 이론을 통해 시사받은 것을 말하는 이 부분도 좋았다.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신경다윈주의는, 우리 스스로 원하건 원하지 않건, 저마다 독자적으로 자기를 계발하며 평생에 걸쳐 각자의 특성에 맞는 길을 개척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운명임을 암시한다.’
이 책을 보고 나니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는 것을 더 미룰 수 없을 것 같다. 꼬질거리고 글자도 너무 빽빽한 중고책을 하나 가지고 있는데 어렵더라도 올해 내에 천천히 다 읽어 보아야겠다.
포트노이의 불평부터 자기 앞의 생, 그리고 이 책까지 우연히도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비슷한 시기에 여럿 접하게 되었다. 그들의 민족적 자부심과 유대감, 거기에 그들이 당한 고난, 뭔가 복잡다단한 특색이 있는 것 같다. 다만 세 책에 나타난 유대인의 모습과 자기 인식이 이렇게나 다른 걸 보면 어떤 사람들을 민족, 인종, 국민으로 뭉뚱그려 파악하는 편견에 빠지지 않도록 신중해야 할 것 같다. (당장 한국인으로 뭉뚱그려지는 우리 주변 사람을 봐도 너무 다르고 다양하잖아. 왜 남들을 볼 때는 그걸 쉽게 잊고 다르게 보는 걸까.)
인간에 대한 애정. 환자와 가족과 동료와 수많은 동식물체까지 아우르는 관심과 사랑. 그의 글이 과학이라는 전문적인 분야를 다루고 있음에도 두루 읽히는 이유 같다. 나는 사실 아직까지도 수많은 의심을 내려 놓지 못하고 읽거나 보고 듣는다. 정말 그런 기분이었어? 그런 의도였어? 그런 생각이었어? (이 책 보면서도 가끔 그랬다. 몹쓸 병.) 심지어 나자신의 어제 오늘 내일도 믿지 못한다. 아님 어때. 하고 그냥 들어주고 받아들이는 날이 오면 좀 달라질까. 나도 남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러면 글도 삶도 나아질까. 내 신경세포들은 왜 이런 쪽으로 강화된 걸까요. 자꾸 한 방향으로만 갈까요. 반대로 계속 자극하고 강화하면 재구성될 수 있을까요.

아무리 나빠도 우리는 움직인다. 아무리 좋아도
절대에 가닿지 못하는, 안식할 곳 없는 우리,
언제나 멈춰 있지 않아, 더 가까워진다.

작은 희망이나마 주는 구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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