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레이드] 요시다 슈이치 /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간만에 일본소설의 묘미를 느끼게 해준 책이다. 일본 소설은 다른 소설과는 다른 독특한 문체가 있다. 물론 번역을 통해서 읽지만 단지 번역된 글이어서가 아니라 일본 소설이어서 번역하면 다른 나라 소설과는 다른 그 느낌이 있지않나 싶다.
'하루키'를 읽고나면 하루키의 문체가 살아있듯이, '요시다 슈이치'의 글도 읽는 재미가 만만치않다.
소설의 주체를 '사람'이라 해야할지 '맨션'이라고 해야할지 잠시 망설여지지만 방두개와 거실이 있는 맨션에 네명이 동거하고 있다. 또 다른 한 사람이 합세해 결국 다섯명.
옴니버스 형식으로 각 장마다 동거인 한명씩 주인공이 되어 다른 사람을 바라본다. 대부분 이런 형식의 소설은 주인공이 바뀔 때마다 시간이 거슬러 올라가 다시 같은 상황을 반복하는 경우가 흔한데 이 소설에서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다. 소설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시간은 흐르되 시선만 옮겨가는 드라마나 영화처럼 그림이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그들 중 한명은 자신들의 거실이 마치 온라인상의 채팅실같다고 말한다.
p93
어쨌든 나는 이곳 생활이 마음에 든다. 여기 있으면 즐겁다. 물론 남들과 함께 사는 것인 만큼 적당한 긴장감은 있지만, 상황이 바뀌면 언제라도 마음이 내키는 대로 떠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중략)
인터넷을 즐겨 하는 대학 시절 친구들이 말하던 '채팅'이니 '게시판'이니 하는 것들이 어쩌면 이곳 우리들 생활상과 비슷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략)
싫으면 나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있을 거라면 웃으며 생활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인간인 만큼 모두들 선의와 악의를 동시에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마 미라이도 나오키도 요스케도 여기서는 모두 선인인 척 연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걸 두고 '계산된 교제'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내게는 이 정도가 딱 좋다. 물론 이런 생활이 평생 지속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단기간으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순조로울 수 있고 나름대로 의미도 있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p51
아야코 씨는 록 밴드에서 보컬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이가게에서 일했다. 올해 스물아홉 살,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르지만 아야코 씨의 말에 따르자면 밴드 이름이 '리미트'라고 한다.
(중략)
"저 만약에 말입니다. 아야코 씨 애인이 있잖아요. 그 애인의 후배에게 사랑한다고 고백을 받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어떻게 하겠냐니, 뭘?"
"아뇨, 그러니까 뭐 귀찮다거나 기쁘다거나."
"그 후배란 사람이 근성이 있어?'
"근성......? 굳이 말하자면 없는 편일걸요."
"그럼 당연히 귀챦지."
"네?"
"근성 없는 사람한테서 사랑한다는 고백을 받으면 귀찮다는 뜻이야."
"그럼, 근성이 있다면요?"
"글쎄, 그 사람이 '더 후'나 '킹크스'를 들어?"
"아뇨, 아마 안 들을 거예요."
"그럼, 비틀스와 클래식 중 어느 걸 좋아해?"
그제야 아야코 씨가 보컬을 맡고 있는 밴드 이름이 정말로 '리미트'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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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대화이다. '어떤 사람인데'라고 물을 때 지독히도 편협된 질문이지만 때때로 우린 이런 류의 질문으로 사람을 짐작해 볼 때도 있다.
읽는 내내 영화 [스페니쉬 아파트먼트]가 생각났다. 그 영화를 보며 2%부족하다 느낀 것이 [퍼레이드]에서는 그 2%가 채워진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