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률
권수경 지음 / 야다북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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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률_권수경 #야다북스

황금률이라는 말은 살면서 한 번쯤 스쳐 지나가듯 들어본다. 나 역시 처음에는 황금의 퍼센테이지쯤 되는 말인가 하고 어림짐작했다. 그러나 윤리의 정수라 불리는 황금률은 의외로 단순하다. ‘네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이토록 분명한 말인데도 우리는 왜 끝까지 실천하지 못할까.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다. 옳다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도 모두 안다. 문제는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인간은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시키고, 자신이 받고 싶은 존중은 타인에게 쉽게 요구한다. 황금률은 분명 옳지만, 그것을 지켜낼 힘은 인간 안에 충분하지 않다. 보편적인 황금률은 인간의 공감 능력과 이성에 호소하지만, 인간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존재다. 손해가 예상될 때, 억울함이 앞설 때, 상대가 나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금세 원칙을 내려놓는다. 이것은 의지의 부족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황금률은 늘 나에게서 출발한다. 내가 어떻게 대우받고 싶은지를 기준 삼아 타인을 대하는 방식이다. 예수님의 황금률에서는 그래서 모든 것, 무엇이든지라는 표현이 붙는다. 내가 감당하거나 하는 선의 한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풍성함의 기준이된다. 사람들에게 하는 행동이나 태도는 단순히 인간관계의 기술로만을 요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다. 일반황금률이 인간사회의 기초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황금률은 그 기초위에 세워지는 복음의 완성이리라. 기독교인이라면 무조건 선하다에서 답을 찾는 것이 아닌 이미 받은 은혜가 삶으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열매가 되어야한다.

기독교 신앙은 흔히 오해된다. 마치 더 착해지고, 더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 요구에서 시작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복음의 출발점은 인간의 상승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강이다. 우리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 도달하려 애쓴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다. 그래서 신앙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은혜의 응답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황금률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할까. 성경은 그 이유를 의지의 부족에서 찾지 않는다. 우리가 이미 받은 것을 잊고 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용서와 사랑, 자격 없는 은혜를 기억하지 못할 때 황금률은 무거운 명령이 된다. 그러나 받은 것을 다시 기억하는 순간, 황금률은 짐이 아니라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태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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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리터러시 - 손안의 감옥에서 자유하기
김영한 지음 / 샘솟는기쁨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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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리터러시_김영한 #샘솟는기쁨 #손안의감옥에서자유하기

다큰 어른인 나마저도 스마트폰을 손에 놓고 살기란 여간 힘든게 아니다. 하물며 어른도 자제하기 힘든데 아이들에게도 올바른 스마트폰 교육이 필요하다. 자그마한 네모난 상자가 인간에게 주는 것은 과연 득이 많을까, 실이 많을까. 이제는 집에 집전화기보다도 어린아이까지 갖고 있는 핸드폰은 오늘을 살아가는 부모라면 응당 매일 마주하는 현실적인 고민이 되었다. 김영한 저자의 <스마트폰 리터러시>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해 감정이 아닌 구조와 원인 그리고 회복의 길잡이가 되는 책이다.

어릴적에 부모님께 ‘티비 그만봐라 눈 나빠진다’라는 말을 수도없이 들었다. 그때는 중독이라는 단어보다는 시력저하의 문제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 TV는 손바닥만한 스마트폰으로 업그레이드되었고 단순한 연락뿐만이 아니라 많은 것들을 핸드폰으로 하는 삶을 잠식하게 되는 물건이 되었다. Chapter 1에서는 하루 6시간 이상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상태를 경계경보로 규정한다. 손에 놓지 못하는 것은 중독을 넘어서 도파민 보상 회로와 욕망의 문제임을 짚는다. 스마트폰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정말 많은 연결된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더욱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Chapter 3에서 다룬 스마트폰의 과몰입이다. 나도 한창때에 스마트폰에 중독되었을때에는 자다가도 핸드폰을 확인하기 위해 수시로 잠을 못 들었던 경험이 있다. ‘팝콘 브레인’이라는 표현처럼 즉각적인 자극에 길들여진 뇌는 기다림과 깊이를 잃어간다. 이건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 누구나에게 해당된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남아와 2학년 여아를 키우고 있다. 첫째는 스마트폰 사용을 제어하기가 쉽지 않지만, 둘째는 비교적 잘 조절한다. 그 차이는 명확하다. 첫째에게 스마트폰은 가장 강력한 흥미 대상이지만, 둘째에게는 그림 그리기, 영화 보기, 놀이 같은 대체 가능한 즐거움이 존재한다. 이는 Chapter 6에서 말하는 ‘스마트폰 없이도 즐거운 대안 활동’의 중요성을 삶으로 증명하는 사례처럼 느껴졌다.

스마트폰은 우리의 삶 깊이 들어와 이미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그 편리함만 추구하고 과몰입과 중독의 위험을 간과한다면 우리 아이들의 시간과 감정, 그리고 관계까지도 서서히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일단 부모가 먼저 깨어있는 사용자로 서고 아이와 함께 고민하여 조절을 도모해야 한다. 스마트폰은 통제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배움이 도구가 되지 않을까? 디지털시대에 필요한 것은 무조건 하지 않는것보다는 분별력과 절제력이라고 느꼈다. 그 시작은 가정안의 작은 대화안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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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책
데이비드 플랫 지음, 강동현 옮김 / 구름이머무는동안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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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책_데이비드플랫 #강동현옮김 #구름이머무는동안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예수님을 설명할때에 PART1. 산위에서 아래로. 무엇을 얻기위해 산으로 올라가려는가? 인간은 높은곳으로의 오르고자 하는 욕구는 상당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산을 오른다. 더 높은 자리, 더 안정된 위치, 더 확실한 의미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위를 향한다. 신앙조차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름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려 하고, 더 단단한 삶을 확보하려 하며, 더 흔들리지 않는 상태에 도달하려 한다. 그러나 복음의 출발은 반대이다. 산위에서 계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다. 어찌 우리를 위해 낮은곳으로 내려오셨을까? 예수님의 삶은 죽음을 피하려고 하는 여정이 아닌 죽음을 통과하여 순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간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였을지라도 하나님의 계획안에서는 철저한 사랑이다.

이런 사랑을 알고도 나는 여전히 삶을 스스로 경영하려 든다. 예수님이 계시다는 사실은 머리로는 알지만 결정의 중심에는 과연 예수님이 있었는가. 신앙은 삶의 바탕이 되어야 하지만 정작 위기의 순간에는 호출하는 안전장치가 되지 않았는지. 삶의 이끄심, 매번 변화하는 나의 삶속에 항상 예수님이 이끄셨으면 좋겠다. 매번 흔들릴때마다 나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있었는가 묻게 된다. 예수님은 권력을 휘두르기 위해 오시지 않았다. 우리 아래로 내려와 우리의 종이 되신 예수님. 그분은 우리의 섬김이 필요치 않다. 예수님이 오심은 도덕적 모범을 제시함이 아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요구하신다기보다는 스스로는 결코 깨끗해질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갈대처럼 흔들리면서도 믿음이 굳건한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해 왔음을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신앙은 단단한 척하는 기술이 아니라고.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무너질 때마다 이미 내려와 계신 예수님을 다시 선택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결국 이 책은 질문으로 끝난다. 예수님은 이미 내려오셨다. 길도 이미 열렸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여전히 산을 오르며 나를 증명하려 애쓰고 있는가, 아니면 산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시는 그분 곁에 머물고 있는가.

이 책은 답을 주기보다, 그 질문 앞에 나를 오래 서 있게 만든다.
그리고 그 머묾 자체가, 이 책이 독자에게 건네는 가장 정직한 초대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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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충격이 신앙인을 만든다
김용대 지음 / 글과길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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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충격이신앙인을만든다_김용대 #글과길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를 원한다. 더 나은 삶, 더 인격적인 성숙, 더 깊은 영성을 향해 갈망한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거부한다. 수없이 다짐하고 또 다짐하지만, 정작 “그래서 무엇이 달라졌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쉽게 침묵한다. 말은 많았으나 삶은 그대로였던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 질문에서 자유롭지 않다. 나 또한 말만 해왔던 사람으로서, 그동안 쏟아냈던 말들이 내 삶의 본질을 얼마나 바꾸어 놓았는지 솔직히 확신하기 어렵다.
물론 변화의 계기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책은 내 사고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불필요한 생각들을 밀어내 주었고, 어떤 설교는 마음을 건드려 눈시울을 붉히게 하며 ‘변화해야 한다’는 결단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영상들은 나를 일상의 세계에서 끌어내어 깊은 사유의 자리, 이전과는 다른 시선의 세계로 이끌었다. 분명 감동은 있었다. 그리고 그 감동은 삶의 외형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하루를 여는 방식이 달라졌다. 고착되지 않은 삶의 리듬은 신선함과 일정한 긴장감을 주었고, 이전과는 다른 생활 태도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되었다. 이 변화는 어디까지 이르렀는가. 삶의 방식은 달라졌지만, 존재의 중심은 얼마나 흔들렸는가. 새로움과 긴장감은 있었지만, 그 안에 겸손과 침묵은 충분히 자리 잡았는가.
여기서 나는 중요한 구분 앞에 서게 되었다. 부지런해지는 것과 거룩해지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신앙적 규칙은 생겼지만, 그 규칙이 나를 하나님 앞에서 더 정직한 사람으로 만들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오히려 나는 여전히 말할 수 있는 신앙, 설명할 수 있는 신앙, 통제 가능한 신앙 안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나님 앞에서 더 솔직해졌는가, 아니면 더 정돈된 신앙인의 모습만을 갖추게 되었는가.
이 질문들은 책을 읽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또렷해졌다. 변화는 있었으나 그것은 삶의 구조에 머물러 있었고, 존재의 근원까지 내려가지는 못했다. 나는 변화를 원했지만, 나 자신이 무너지는 자리까지는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문제는 변화의 유무가 아니라 변화의 깊이였다. 그리고 그 깊이는, 아직 나에게 충분히 도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하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단번에 성사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중이다. 거룩한 충격은 어느날 갑자기 올수도 있지만 때로는 느리게 하지만 분명히 사람을 변화시킨다. 하나님께서 나의 생각을 다듬고 욕망을 정화시키며 삶의 방향을 수정해주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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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의 초대 - 뜻밖의 생각
민이언 지음 / 미드나잇인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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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의초대_민이언 #미드나잇인 #뜻밖의생각

나는 왜 철학을 좋아하는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이유는 단순한 호기심만은 아니다. 철학은 나에게 이 복잡한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이자 삶을 진지하게 모색하게 만드는 언어이다. 인간은 왜? 진리가 무언가? 선과 악은 어떻게 구분이 될까? 특히 나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기독교적 세계관 안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사유했던 철학자들의 글을 조금 더 동화된다. 그들의 철학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면서도 인간의 여러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나는 그 지점을 큰 공감을 느낀다. 철학에서의 사유는 질문속에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이다.

나는 신을 믿는다. 그리고 신앙 안에서 사람을 경계하라고 배워왔다. 그러나 실제의 삶에서 어떤 순간에 직면하면, 나는 여전히 사람에게 마음을 다 주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신앙이 말하는 태도와 삶이 요구하는 선택 사이의 간극, 이 책은 그 간극을 애써 봉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틈을 그대로 드러낸 채,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만든다.
인생은 결국 하나님과 나 사이의 문제이며, 결국은 홀로 서야 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왔지만, 베르그송의 공과 타일의 비유는 그런 확신마저 흔든다. 필연처럼 보이는 삶의 궤적은 사후적으로 구성된 해석일 뿐,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의 삶은 언제나 우연의 연속이라는 주장 앞에서, 나는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빚으셨다’는 말을 얼마나 쉽게 인과의 언어로 사용해왔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정해진 길은 정해지지 않았다라는 말에 동의하지만 동의하지 않는다. 길은 앞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뒤에 발견된다는 말은 삶을 하나의 설계도로 이해하려는 태도를 거부한다. 먼저 걸어간 사람들의 궤적을 따라가는 게 안전해 보일 수 있지만 그 방식으로는 결코 자신의 길에 도달할 수 없다는 냉정한 판단이 담겨있다. 나는 늘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디에도 완전히 정착하지 못한 채, 스스로 이방인의 자리를 선택해왔다. 한곳에 머무르는 삶보다 이동하는 삶이 나에게는 더 익숙했고, 그래서 여행을 좋아한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정착을 꿈꾼다. 떠나는 데 익숙한 마음과 머물고 싶은 욕망이 늘 함께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이제는 부정할 수 없다. 이 모순은 여행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여행의 목적지가 도착의 지점이 아니라 출발의 지점이라는 말은, 어쩌면 나의 삶을 가장 잘 설명하는 문장일지도 모른다. 나는 새로운 장소에 도착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돌아올 나 자신의 출발점을 확인하기 위해 떠난다. 이방인으로서의 이동은 정착을 거부하기 위한 선택이 아니라, 어디에 머물 수 있는지를 묻기 위한 과정이다. 그래서 나의 여행은 끝없이 떠도는 삶처럼 보이지만, 실은 언젠가 머물 수 있는 ‘여기’를 찾기 위한 우회에 가깝다.
우리는 일상속에서 살면은 일상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래서 자꾸 거기로 저기로 여기로 떠나는 걸까?

니체에게 사유란 참여가 아닌 거리두기였다. 그는 속해있음보다 벗어남을..충성보다는 이탈을 통해 사고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나는 어디 속해있기보다는 관망자의 입장에서 서고싶은 것일까?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이는 구조를 못보지만 한발 물러나 있는 사람은 그 구조를 볼 수 있는 눈이 생긴다. 사유란 세계에 더 깊이 묶이지 않고 잠시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갖는 일이다. 떠남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지만 두렵고, 머무르기를 원하지만 안주하는 삶은 싫어한다. 스스로 채찍질하며 서있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른 위치로 옮겨 설 줄 아는 삶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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