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 열다
로베르트 발저 지음, 자비네 아이켄로트 외 엮음, 박종대 옮김 / 열림원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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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나무와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어우러진 숲의 풍경은 마치 한 편의 마법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나는 동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고, 그렇게 책은 펼쳤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 오로지 숲 그 자체가 말을 거는 듯한 기운이 전해졌다. 한 그루의 나무, 한 장의 나뭇잎, 한 조각의 천, 그리고 귀여운 작은 모자가 다정히 손짓하며 나를 맞이하는 장면이 희미하게 그려졌다. 얼마 전 숲의 압도됨에 무서움이 느껴져 내려온 적도 있었다.

헤르만 헤세와 프란츠 카프카 역시 로베르트 발저의 열렬한 애독자였다. 그의 글은 신비롭고 고요했지만, 그가 걸어온 삶은 결코 평탄치 않았다. 전쟁으로 인해 독일 문학가들과의 교류가 끊기면서 발저는 점점 고립된 생활을 하게 된다. 그 속에서도 그는 자신만의 리듬을 잃지 않고, 《산책》, 《작문들》 같은 작품들을 세상에 선보였다. 흥미로운 점은, 다른 작가들처럼 자신의 삶을 기록하거나 자서전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산발적으로 발표한 짧은 산문은 은유와 묘사 속에서, 조용히 자신의 흔적을 새겨 넣었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마치 발저 자신이 숲 속에 숨어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자연속에서 작고 우연적인 순간들을보며 고요하고 고독한 존재와 마음의 움직임을 탐색한다. 마치 거대한 숲의 세계에 동화를 보는것과 같은 느낌으로 때로는 자연의 경이로움을 한껏 느끼면서. 나는 그저 경이로움의 대상이라고만 느꼈었다. 발저의 글은 일상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스쳤다. 스위스 작가라 하니 자연의 방대함을 더욱 느꼈지 싶었다. 거대한 풍경을 보며 숨막힘을 느끼고
세상과의 거리를 두고, 나무와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빛과 그림자 속에서만 속삭이는 사람. 그래서일까, 그의 문장은 읽는 이를 어쩐지 현실 너머의 세계로 부드럽게 데려가고, 나 또한 그 숲에서 한동안 머물고 싶게 만든다.

P.22 주변은 아직 모든 것이 밤이고, 하늘 가장자리에 실낱같이 희미하고 창백한 빛만, 실제로는 빛이 아니라 지치고 죽은 어둠의 잔해만 살짝 비칠 때의 숲 말이다. 이 시각의 숲은 소리도 숨도 의미도 없는 언어로 말을 한다. 모든 것이 이해 저편의 세계다. 달콤하면서도 차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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