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52
오스카 와일드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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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들이 지나가서 다시 본격적인 독서 모드로 돌아가고자 집어 든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좀처럼 속도가 나질 않는 작품이었다. 짧은 분량에 비해 화두가 너무 많아서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닌 이 작품을, 기존의 수많은 평들과 차별화를 갖기란 도저히 불가할 듯하여 그냥 가볍게 쓰고 말란다.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는, 요즘 표현으로 하면 세기의 얼굴 천재라 하겠다. 그를 숭배하는 어느 화가가 도리언의 초상화를 정말 기가 막히게 그려서 그에게 선물까지 했는데, 정작 도리언은 그 작품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유인즉슨 화가의 친구이자 극 냉소주의자인 해리 경의 각종 훈수질 때문이었다. 순수함 그 자체였던 도리언은 해리 경으로 인해 세상 때가 잔뜩 묻게 되는데, 아무튼 화가에 그림 속에 있는 자신은 현재의 자신보다도 더 순수한 예술미가 담겨 있어 비교 아닌 비교가 되는 것에 기분이 상했다. 하여 그림 속에 아름다움이 현실에 박제되고, 저 그림이 대신 늙어갔으면 하고 소원을 빈다. 그 바람은 놀랍게도 현실이 된다.


말빨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해리 경의 박식함은 상당히 재수 없지만, 틀린 말은 하나도 없음을 인정하는 도리언. 그래서 한동안 그와 어울리며 인생의 양면성을 실컷 터득하게 된다. 그럴수록 많은 실망과 함께 말할 수 없는 쾌감도 생겨남으로써 갈수록 순수를 잃어버린 제 모습에 취해간다. 그는 한 여배우와 사랑에 빠졌다가 그녀의 발연기를 보고 이별을 고했는데, 얼마 뒤에 일어난 그녀의 쇼크사로부터 본격적으로 영혼이 타락하기 시작했다. 다만 겉으로는 여전히 신사다운 품행과 차림새를 유지한 바, 이 겉과 속이 딴판인 스스로에게 꽤나 오랫동안 시달리는 모습을 보여주어 그래도 연민을 느끼게 해주었다. 허나 이 상태도 얼마 가지는 못했다.


도리언의 영혼이 타락해갈수록 초상화의 모습은 흉측하게 변해갔다. 창고에 그림을 처박아 두고 들락날락하는 그는, 매번 달라져있는 그림의 상태가 곧 자신의 영혼을 나타내준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고자 도리언은 온갖 예술 분야에 손대기 시작한다. 진기한 악기들을 수집하여 연주도 해보고, 각종 보석들을 모으기도 하는 등 다양한 데에 시선을 뺏기고 마음을 줘보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타락한 영혼과 예술은 좀처럼 결합되지 않거나 오래가지 못하였고, 그렇게 애꿎은 해리 경만 탓할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 어느덧 마흔 살 가까이 된 도리언. 여전히 풋풋한 스무 살의 모습이었지만 그는 과거의 해리 경보다 더한 회의주의자가 돼버렸다. 그와 어울리는 자마다 불행해진다는 말이 떠돌 만큼 평판이 안 좋았는데, 마침 초상화를 그려준 화가가 도리언을 찾아와서 화를 당한다. 기어코 도리언의 영혼은 세탁이 불가한 상태가 되었는데, 여기서 나는 파괴적인 감정에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분이 어떤지를 계속 공감하며 읽었다. 잃어버린 순수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절감할수록 조그마한 타락도 걷잡을 수 없는 죄악으로 와닿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 주인공처럼 감정 조절 실패로 계속 엇나가는, 그러면서도 적당히 멀쩡한 척하며 자신을 감추는 스스로가 이중인격자처럼 느껴져 환멸이 나기도 한다. 나의 위선들과 더럽혀진 영혼은 남들에게 비난받고 욕먹어도 싸건만, 미움받을 용기가 없어 깨끗한 척 살아가는 나 자신이 참으로 역하다고 느껴진다.


계속되는 불안과 공포로 인해 맛탱이가 가려 할 때쯤, 자신의 불안요소가 전부 사라지자 다시 착하게 살아보겠다고 다짐하는 도리언. 그러나 마음먹은 것과는 달리 초상화는 여전히 못생겼고, 그 자신은 여전히 풋풋한 와꾸를 하고 있었다. 과연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 걸까. 그저 인간은 겉으로만 정직한 척할 뿐이고, 영혼들은 그렇게 비춰지고 싶은 욕망에 굴복할 뿐인 걸까. 나는 이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현실과 이상의 균열을 방지하고자 우리는 교육을 받고 예술을 경험하여 굳건해지는 비결을 배워나간다. 그렇게 훌륭한 교육 과정을 밟고도 악마의 손짓 한 번에 쉽게 타락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자신이 그토록 잘나고 똑똑한 줄 아는 해리 경도 주인공의 속내를 절대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제 영혼을 정화시키지 않는 인간들은 한낱 껍데기에 불과하다.


원래 다루고자 했던 내용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아무튼 쓰다 보니 이렇게 됐다. 그림이 늙어가고 나는 계속 젊음을 유지한다라.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신선한 발상이었다. 어쩐지 영국판 <죄와 벌> 같기도 했는데, 인간 내면의 선악은 양자택일의 무언가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다만 어느 한쪽으로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믿음이 절대 선이라는 착각쟁이들이 너무 많은 오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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